여행을 사고하다

[창간호] 개인의 몫(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멕시코)

- 윤여일(수유너머R)

1.

네 사람이 구부정하게 서 있다. 머리모양과 차림새가 비슷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싶다. 서 있는 곳은 경작지로도 보이고 뒤로 흐릿하게 나무 형상이 있는 걸 보아 어느 들판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자를 보니 대낮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정오 무렵에 이들을 만나거나 불러낸 모양이다. 둘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고, 둘은 카메라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같은 눈높이에서 표정들은 연속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다소 불안한 낯빛이다. 특히 카메라를 향하고 있지 않은 둘은 한기를 느끼는 듯 얼굴을 매만지거나 팔로 몸을 추스르고 있다.

그 사진에서 물러나 벽면에 걸린 다른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다. 여자의 표정이 밝지 않다. 담배를 문 남자의 눈빛은 퀭하다. 배를 타고 강 건너편으로 갈 모양인데, 어떤 일을 앞두고 있길래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일까. 사진 아래로 달린 설명을 보니 남자의 이름은 프란츠 블롬이다.

사진들이 걸려있는 벽면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간다. 몇몇 집기들이 보존되어 있고, 그 남자가 사용했다던 카메라도 전시되어 있다. 이 카메라로 저 네 인물의 사진을 찍었다면, 카메라를 설치하고 빛을 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사진 속 인물들과의 거리로 보건대 그들의 표정은 멀리서 찰나로 포착한 것이 아니다.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에는 적어도 수 초간의 교감이 오갔으리라.

나는 나-볼롬 박물관에 와있다. 이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고고학자 프란츠 블롬과 거트루드 두비 블롬 부부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옮겨놓은 곳이다. 나-볼롬은 마야 초칠어로 ‘재규어의 집’이란 뜻이다. 프란츠 블롬은 마야 유적을 탐사한 이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지금 전시된 모습은 그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겠지만, 그들이 수집해 놓은 마야 유물을 보면 분명 어떤 애정이 묻어났다.

2.

여기는 멕시코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이다. 도시 이름 치고는 길고 특이하다. 그 생경한 이름 속에 낯익은 또 하나의 이름이 들어있다. 그렇다. 성직자 라스 카사스. 주의 종이었지만 이교도들인 선주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산크리스토발. 여행을 한다고 낯선 존재를 낯설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경험적인 자명함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는 원래 한 쿠바 농장의 노예소유주였다. 1502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때 아버지와 동행하여 소위 신대륙에 발을 들여놓았다. 역사의 각색을 거친 탓일까, 시대의 파고 탓일까. 그의 인생행로는 전형적일만큼 극적이다. 선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몬테시노스 신부의 설교를 듣고 깨달은 바가 커서, 1515년 자신이 소유한 엔코미엔다를 버리고, 1524년에는 재산마저 모두 헌납한 채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후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서품을 받은 신부가 되어 지금의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에서 포교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선주민을 포교할 적에도 그들을 미개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그들이 보여준 신심을 찬양했다. 라스 카사스는 다른 사제들이 지니고 있던 편견과 맞서 싸웠으며, 정복자들이 선주민을 수탈하려 들면 힘주어 비난했다. 선주민에게 뭇매를 가하고 돌아와 정복자들이 신께 죄를 고백하려 할 때면, 그들에게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는 일마저 거부했다. 아울러 저술 작업에도 나서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통해 정복자들의 만행을 구세계에 고발했다.

3.

<라스 카사스> 펠릭스 파라 1875년 작. 멕시코 국립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소유권 논쟁은 소위 ‘신대륙’에서의 대량학살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땅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는 선주민들은 생명권도 박탈당했다. 통계에 따르면 1492년부터 1560년 사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약 4000만 명이 사라졌다. 물론 그 안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서 저지른 이 역사적 장부는 청산되지 않았으며, 청산될 수 없다. 라스 카사스는 그 장부를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하지만 역사가 한 개인의 미덕과 헌신만을 사서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라스 카사스가 신학사가 아닌 아메리카 식민사나 유럽 지성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데는 그가 어느 논쟁에 참여했다는 사정이 크다. 그야말로 세기의 논쟁이었다. 규모에서 그러했고, 시대사적인 의미에서 그러했다. 스캔들의 요소도 충분했다.

소위 신대륙 발견 이후 인디오는 참여하지 않은 인디오 논쟁이 벌어졌다. 주어진 물음은 이랬다. “인디오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인디오는 이성적 존재인가? 인디오의 소유권을 인정해도 좋은가? 인디오를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되는가?” 당대 최고의 지성이 이 물음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기실 그리 논쟁적이진 않았다.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 볼테르는 선주민을 게으름뱅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뒤를 이어 베이컨, 보댕, 몽테스키외, 흄 등 서구 근대정신사의 대부들은 선주민을 열등한 종족이라 폄하했다. 또한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학설을 내세워 근대 유전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뷔퐁은 “신세계의 퇴화한 인간들”을 아예 인류로 분류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이들보다 앞서 라스 카사스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때는 1550년이었고, 장소는 스페인의 바야돌리드, 그리고 논쟁 상대는 세풀베다였다. 세풀베다는 스페인 왕실 소속의 고위 성직자이자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던 인문주의자였다. 논전의 면면은 화려했다. 주최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 대서양 너머로 콜럼버스를 보냈던 이사벨라 여왕의 손자였다. 사회는 교황의 특사 살바토레 론시에리 추기경, 교황의 최종결정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제출된 물음은 “아메리카는 누구의 것인가”였다.

먼저 세풀베다가 꼬박 하루를 발언했다. 그는 아메리카의 소유권이 유럽인, 특히 조국 스페인에게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를 위해 선주민에게는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자격이 부족하다고 논증했는데, 이때 최고의 권위를 지닌 세 권의 책을 논거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그리고 <성경>이었다. 그는 <정치학>을 스페인어로 옮긴 장본인이기도 했다. 세풀베다는 인간은 자신이 맡아야 할 자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노예는 죄를 짓고 징벌을 받아 노예가 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예설에 근거해 아메리카 선주민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평등하게 대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상숭배, 식인풍습, 인신공양을 근거로 들어 그들은 사회 이전의 상태, 즉 ‘노예상태’에 있다며 이따금 성서의 내용을 가미했다.

세풀베다는 인문적 지식을 죄다 동원하여 선주민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했다. 여기서는 한 개인의 비열함보다는 차라리 근대 지식의 어두운 일면이 엿보인다. 먼저 ‘인권’에 대한 물음은 ‘물권’에서 터져 나왔다. “인디오는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는가”는 “아메리카의 진정한 소유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의미를 지녔다. ‘사회’라는 말의 용법은 또 어떠한가. 그것은 문명의 잣대가 되어 선주민을 윽박지를 때 쓰인 말이다. 그들에게는 사회가 없다든지, 사회화가 덜 되었다든지 등등. 그리고 세기를 가르는 물음들, 인간에 대한, 인간 권리에 대한, 세계에 대한, 신에 대한 물음들은 유럽 안에서 발화한 게 아니라 선주민의 세계와 조우하여 터져 나왔건만, 그 물음들은 선주민의 존재들을 밀쳐놓고 소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스 카사스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 그가 당시 지성계에서 승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간, 인권, 세계에 관한 논쟁은 이후 높은 출발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 역시 시대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세풀베다에 이어 등장한 그는 미리 준비해둔 반론을 닷새에 걸쳐 읽어 내려갔다. 음조는 차분했다. 한 마디 실언이 그를 종교재판의 화형대로 이끌 수도 있었다. 그는 성서에 근거해 반론을 폈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땅을 얻었던 것은 그 이전에 여호와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아메리카가 그런 약속의 땅이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는 인디오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입증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도 아즈테카와 잉카라는 세계를 거느렸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더라도 군사의 힘이 아닌 가르침과 설득에 근거해야 한다. 또한 인디오는 예술과 학습능력 면에서 결코 뒤떨어졌다고 할 수 없다. 회교도와 유대교도 비기독교도인이지만 억압과 강제 노동에 저항할 권리가 있듯이, 인디오 역시 저항권을 지닌다. 그리고 인디오만이 우상을 숭배하고 인신공양을 드린 것도 아니다. 고대 스페인, 그리스, 로마에서도 우상을 숭배했으며, 사람을 제물로 바친 적이 있지 않았던가.

4.

라스 카사스는 목숨을 내놓고 논전에 임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기울이는 노력은 시대의 힘에 의해 굴절되기 마련이다. 시대정신은 시대의 힘에 채이고 마모된다. 이것은 그가 당대에 여러 사람의 미움을 샀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후세에 그의 행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바뀌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한다. 세풀베다-라스 카사스 논쟁은 그야말로 세기의 논쟁인지라 이후로도 번번이 회자되었는데, 라스 카사스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개 과거의 논쟁을 비평할 때는 논쟁구도 바깥에서 조망하면서 행위자들을 싸잡아 평하든지, 아니면 높아진 뒷시대의 기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 논쟁을 두고도 세풀베다와 라스 카사스의 차이란 결국 방법론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라스 카사스도 인디오를 기독교 세계로 동화시키고, 식민체제 속으로 거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풀베다가 군사정복을 승인했다면, 라스 카사스는 교화로 감복시켜야 한다며 온건한 방법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스페인 국왕의 자식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짧은 보고서>에 나오는 선주민들은 상투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선하지만 가엾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다. 또한 당대에 그 책은 ‘흑색선전(Leyenda negra)’에 활용된 전력도 있다. 1495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를 분할 독점하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때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짧은 보고서>는 호재였다. 그 책에서 고발된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구실로 삼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둘 능력이 없다고 비방했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 등이 흑색선전을 이용하여 아메리카로 발을 내딛어 더한 짓을 했던 때, 라스 카사스는 이미 눈을 감았다.

사진: 짧은 보고서,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짧은 보고서>의 삽화이다. 대개가 선주민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이다.

라스 카사스는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키고자 헌신했지만, 그의 시도는 몇 겹으로 뒤틀렸다. 또한 그 자신이 시대의 상식이라는 한계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선주민을 아끼는 마음에서 노동력이 정 부족하다면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데려와 쓰면 될 일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의 발상과 시도는 숱한 주관적․객관적 한계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한계를 말하고 싶지 않다. 역사의 뒤에 온 자로서 가치판단을 내릴 작정도 아니다. 다만 한 인간의 이름이 새겨진 땅 위에 서서, 그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남겨진 흔적들을 가지고서라도 복잡함을 복잡함대로 받아들이며, 그의 고민의 결들을 살피고 싶다.

종교의 제약, 지식의 제약, 제도의 제약, 정치 환경의 제약. 그 여러 제약들을 품고 있었기에, 한 개인의 시도는 뒷걸음질 쳤지만 역사의 무게를 지닐 수 있었다. 그 무게를 헤아리는 일은 손쉬운 가치 판단보다 어렵고 가치 있다. 후세 사람들이 시대의 한계 운운할 수 있는 것은 앞선 자들이 시대의 한계 속에서 한계치를 조금씩 바꾸어놓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5.

한 개인이 기울이는 노력은 시대의 힘에 의해 굴절된다. 시대 속에서 한 개인이 지니는 한계와 복잡함을 이곳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에서 곱씹어보기로 마음먹게 된 데는 라스 카사스에 관한 사전지식만큼이나 저 한 장의 사진이 계기가 되었다.

다시 네 인물이 등장한 그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다. 사실 출처도 몰라 되는대로 묘사할 수 있을 뿐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사진을 찍은 프란츠 블롬에 관해서라면 쥐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 다만 그가 살던 집을 거닐고 있노라면 저 사진에서 어떤 감상이 옮아왔다.

나는 묘하게 저 사진 속에 블롬 자신이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명의 얼굴에 드리운(혹은 내가 읽어낸) 불안감에 블롬 자신의 시선이 교차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감은 한 데 어우러져 다가올 시간을 향하는 것 같았다.

사실 네 사람 표정의 의미를 읽어내기란 힘들다. 의미를 헤아릴 단서가 내겐 전무하다. 다만 그 사진에 정말 블롬 자신의 심상이 스며들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개인이 갖는 어떤 비극성일지 모른다. 고고학자로서 사진 속 그들을 만난 순간, 그들의 세계는 해체되리라는 예감과, 그래서 사진으로 담거나 기록해야겠다는 자각과, 그런데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그 해체를 재촉하리라는 두 번째 예감이 겹치지는 않았을까. 기록하는 수밖에 일개의 개인으로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자신의 기록으로 그들의 존재는 바깥세계에 노출된다는, 어떤 공모관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두려움.

개체는 부자유하며, 부자유하기 때문에 선택은 진정 의미를 지닌다. 개체의 의지는 시대와 사회의 힘으로 굴절되지만, 그런 만큼 개체의 고독과 굴곡은 역사로 진입할 수 있는 창구를 품는다. 어쩌면 저 사진을 두고 끌어올 감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사진 해석은 완전히 헛짚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감상과 해석이 낯선 곳으로 나온 내게는 여행의 사고에 관한 어떤 원점 같은 것을 제공해주리라 생각했다. 나중에라도 뒤져보면 프란츠 블롬에 관해서 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에 관한 이해는, 사진에 대한 감상은 이대로 봉인해두기로 했다.

–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1개

  1. 연초록말하길

    여행을 사고하다란 제목으로 여러 편의 글이 올라와있군요,.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자고 생각하고

    머리가 비교적 맑은 시간,첫 글을 읽습니다.

    우선 제가 십년이상 연말에 다니고 있는 여행지와 저자의 여행지가 참 다르구나,무엇이 여행지의

    선택을 결정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것이 좋다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라 선택을 다르게 하는 기저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 다름이 오히려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이 되는지도 모릅니다.동일한 지역을 다닌 여행기라면

    그것도 그 나름으로 비교를 통한 (글의 저자는 그 곳을 어떻게 읽었나,무엇에 끌렸나) 글읽기의

    재미가 있겠지만 완전히 다른 곳,다른 시각이 매혹을 주는 것은 내 안에 없거나,다르게 형성된

    생각을 건드리고 불편하게 하고,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 전 과정의 시간이 소중한 경험이

    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여행기는 한 사람의 인생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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