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편집자의 말 – 대통령의 고백질과 다짐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대통령의 고백질과 다짐질

 

4월 20일,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작년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던 대통령은 노래를 부르는 장애인 합창단 앞에서 눈물을 흘렸죠. 그러면서 장애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았는지 올해도 대통령은 특정한 날에만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장애인의 날에만 생색내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훈계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영부인도 숭고한 다짐을 했는데요. 장애인이 역경을 딛고 서면 자신은 밝은 빛을 비추는 초가 되겠다고 했답니다. 좋은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내뱉은 사랑 고백도,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초가 되겠다는 다짐도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 ‘장애인의 날’만 되면 그 소중한 맘을 잊지 않고, 고백과 다짐을 매년 반복하는 대통령. 어떻게 봐야 할까요? 2000년대 들어 장애인들이 사슬로 몸을 묶고 온 몸을 던져 얻어낸 법과 제도들이 있습니다. 교통약자이동편의법, 장애인차별금지법,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 장애인연금, 장애인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등등. 매년 되풀이되는 고백과 다짐처럼, 말로는, 문장으로는, 심지어 법률로는 장애인의 권리가 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사랑 고백이 미약하게나마 법률로 강제된 것은 고백한 사람이 아니라, 그 고백을 질리게 들은 사람의 투쟁 덕분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과 제도도 예산을 잡지 않고, 시행 강제기구와 그 책임을 명확히 해두지 않으니, 고백과 다짐만 덧없이 제도화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구의 중세 권력자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다가 교회에서의 용서와 다짐을 통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곤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고백과 다짐만이 반복되니, 그 고백과 다짐이 죄짓는 마음만 가볍게 만들어준 셈이지요. ‘장애인의 날’이 어째서인지 그렇게 보입니다. 평소 이익은 이익대로 챙기는 사람들이, 가끔 부족한 ‘도덕적 마일리지’를 챙기는 날처럼요. 그것도 돈 안 드는 고백과 다짐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정부 들어 장애인 권리가 아주 심각하게 후퇴했다고 합니다. 특정한 날만 사회적 약자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말, 아마도 365일을 ‘장애인의 날’처럼 생각하자는 것일 텐데요. 그러나 장애인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365일, 어느 하루 ‘장애인’임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없다고. 모든 날이 ‘장애인의 날’들이었다고.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365일 모두를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한 달 전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철학수업을 할 때의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르네요. 저는 중등과정인 불수레반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우리 안에는 맹수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나올 때였습니다. 맹수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충동들, 정서들을 지칭하는 것인데요. 그때 학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휘저었습니다. 그 맹수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말이죠. ‘내 안의 맹수들’에 대해서 이토록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 그 맹수들의 존재를 이토록 절감하는 사람들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불수레반 학인들이 느끼는 우울, 분노, 격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들 같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발언을 들으며 함성을 지르는 참석자들. (출처:에이블뉴스)

이 맹수들이란 장애인들이 입은 상처이자 또한 장애인들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습관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의 짐을 더는 수단으로 다짐을 이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 고백과 다짐을 받아 줄 착한 장애인은 없습니다. 쇼는 집어치워야 할 겁니다. 행사장 안에서 쇼를 보는 건 동원된 박수부대지만, 행사장 바깥에는 쇠우리에 가둘 수 없는, 갇혀 있기를 거부한 맹수들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저기 사랑을 습관적으로 고백하는 로맨티스트에게, 이제야말로 우리가 맹수들임을, 우리는 꽤나 잔혹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할퀴고 물어뜯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장애인의 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맘이 격해졌습니다만, 이번호에서는 ‘여강만필’의 주인공 김융희 선생님을 특별히 소개합니다. 제가 수유너머에서 선생님을 처음 뵌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노년을 맞을 때 선생님처럼 계속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한답니다. <전선인터뷰>에 선생님 인터뷰가 실렸으니 여강만필과 함께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눈치채셨나요? 지난호부터 새로운 코너가 생긴 걸. ‘밍글라바 코리아’. 이주노동자방송(MWTV)의 공동대표이자, 이주노동자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멤버, 그리고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버마행동’의 일원인 소모뚜 님의 칼럼이 실리고 있습니다. 버마어로 ‘밍글라바’는  ‘축복합니다’는 뜻으로 일상적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아픈 죽비로 나타나는 일이 많지요? 소모뚜님이 한국 사회에 전하는 축복 인사, 밍글라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모기가 만난 사람들’의 새로운 사진들이 2주 연속 올라오지 않고 있는데요. 김민곤 선생님께서 이천 도자기 축제와 관련해서 작업하시느라 서울 스튜디오에 오실 수가 없었답니다. 이제 일정이 대체로 끝났다고 하시니 다음 주부터는 다시 선생님의 사진과 글을 만날 수가 있을 겁니다. 독자분께 미안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 고병권(수유너머R)

응답 2개

  1. 서교동말하길

    이촌이 아니고 이천 아닐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성당 다니는데 부활과 성탄에 판공 성사를 의무적으로 봐야 합니다(고백성사 또는 고해성사, 화해성사라고도 합니다). 고백질과 다짐질을 반복하는 건 아마도 사제 또는 목사에게서 배운 덕목인 것 같아요ㅜ

    • 고추장말하길

      ‘이촌’을 ‘이천’으로 수정했습니다. 재밌는 오타가 났네요^^ 경기도 이천과 제가 무슨 친척간도 아닌데…^^; 고맙습니다. 서교동 성당에 다니시나요? 아는 분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자주 들러서 여러 말씀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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