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매이의 여성성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매이의 여성성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매이가 “아빠, 매이 언니지, 오빠 아니지?” 한다. 처음으로 듣는 ‘젠더’ 발언이라 놀라워서 “응? 무슨 소리야?” 했더니 “응, 매이, 송연이 언니야. 오빠 아니야” 한다. 송연이는 요즘 매이가 엄청 예뻐하는 한 살 아래 여자애다. 매이가 ‘치카치카’(칫솔질)를 안하려 하거나 일찍 안 자려고 할 때 “매이, 이제 애기 아니지, 언니지? 언니는 치카치카도 잘하고 일찍 자야지? 그래야 키도 크지?” 라며 언니노릇을 하게 하는 어린이집 동생이다. 그러면 매이는 “응, 송연이는 애기야. 매이는 언니야” 라면서 언니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데 “오빠 아니지”는 뭔가? 드라마 <추노>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언니’라는 호칭은 성별과 상관없이 친한 손위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굳이 오빠와 대비시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입한 게 누굴까?


앗! 저는 아닙니다만...

“선생님이 그러셨어? 매이 오빠 아니라고?” “응” 그 다음 날인가, 평소엔 멋지다고 잘만 입던 스파이더 맨 내복을 싫다며 기어이 공주가 그려진 내복을 입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매이, 오빠 아니야. 언니야” 란다. 며칠 후 어린이집에서 데려 올 때 선생님한테 “매이가 요즘 굉장히 여성적이죠? 좀 심할 정도로.” 라며 넌지시 떠봤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매이 쪽으로 활짝 웃으시며 “매이는 이제 아기가 아니라 여자지요?” 라고 하신다. 어떤 어린이집에서는 매이또래 아이들에게 ‘결혼놀이’를 시킨다고 하는데, 설마 영주 어린이집에서도 그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언젠가 아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는 매이가 레즈비언이어도 좋을 것 같아. 그쪽 파트너 부모는 둘을 안 받아들이고, 우린 두 사람을 인정하고 집도 얻어주고 잘 해주면….히히 우린 살가운 딸 하나 더 생기는 거구, 매이는 시댁 스트레스 안받아도 돼고, 우왕 대박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해서 (우리가 원한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어린이집에서는 생각이 다른가 보다.

세 번째 봄을 맞아 매이의 여성성이 활짝 꽃피고 있다. 미용실 가서 머리 자르자고 해도 긴 머리가 예쁘다며 안 가려고 하고, 잠옷도 그냥 내복은 싫고 꼭 레이스 달린 팬시한 원피스만 고집한다. 입고는 살랑살랑~”아빠, 나 신데렐라 같애?”하고 꼭 물어본다. 엄마랑 목욕할 때는 한 시간 넘게 욕조에서 엉덩이를 살랑거리고 손을 꽃처럼 접었다 폈다 하며 노래 부르고, 교회에서는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엄마처럼 껴안고 업어준다고 야단이란다. 산 강아지가 두 마리나 있건만 꼭 강아지 인형을 품에 안고 토닥거리며 잠들고, 엄마 화장품을 바르고 손거울을 보며 “매이 예뻐?” 하는 등 온갖 ‘여시짓’을 한다.



꽃 처럼 갈대처럼

남자아이를 길러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성과 타자에 대한 정서적 관계는 여자아이가 훨씬 풍부한 것 같다. 아내가 들려준 교육학 실험 관찰에 따르면,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 여자 아이들은 보통 “엄마 많이 아파?” “어디가 아파?” “내가 약 발라줄께” 하며 호호 불어주는 등의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반면에 남자아이들은 뚱한 표정으로 못 들은 척하거나 그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딴 짓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이런 차이는 다 큰 남녀들을 보면 더 확실하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정서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여자와 자신의 정서적 무능을 감추기 위해 “약 먹었어? 병원 가봐” 라며 논리적으로 반응하는 남자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런 젠더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사회적으로 부추겨지고 이용된 측면도 있지만 분명 기질적인 요인도 있다. 보통 여성적 기질, 남성적 기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성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인간, 아니, 생물 일반의 대칭적 기질이다. 프로이트가 수동성과 능동성이라고 부르고(수동성이 나쁘고 능동성이 좋은 건 아니다. 수동passion은 감성적 수용능력, 정서적 관계 능력, 열정, 희생 등을 의미한다. 수동성이 타자에 대한 감응능력이라면, 공격성, 합리적 분석, 논리적 지배 등의 의미를 가진 능동성은 타자에 대한 지배능력이다) 칼 융이 아니마, 아니무스라고 부른 이 대칭적 기질은 남녀 불문하고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는 상보적 기질이다.

이 대칭적 기질의 유전학적 표현체가 X염색체와 Y염색체인데, 두 염색체의 조합 과정에서 XXX를 갖게 된 사람은 과도한 수동성으로 대인관계에 장애를 일으키고 XYY를 가진 사람은 과도한 폭력성으로 반사회적 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두 염색체 중 성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Y염색체라는 사실이다. 가령. XXY나 XXXY나 XXXXY형의 조합을 가진 사람은 X염색체가 더 많아도 역시 표현형은 남성이다. 왜냐하면 최초 생식선의 성분화를 결정하는 요인은 Y염색체에 있기 때문이다. Y염색체의 짧은 팔에 있는 H-gene(남성 유전자)가 작용함으로써 여성으로 마무리될 초기 성선과 미분화 단계의 내부생식기와 외음부 등을 남성형으로 특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각 단계에 문제가 생기면 여러형태의 (가성)반음양[(pseaudo)hermaphroditism)]이 생긴다. 프로이트도 인간의 성은 오직 하나의 척도, 즉 ‘남근’(의 상상적 소유와 상상적 결핍)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목적론자들은 남성이 ‘완성’형이고 여성은 ‘미완’형이라고 해석하는데, 생물학자들은 좀 더 현명하게 인간(포유류)은 암컷이 ‘기본’형이고 이 기본형이 H-gene의 작용으로 수컷으로 개조되는 것이라고 본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남성(남근)은 인간의 기본형(여성)에 부가된 일종의 ‘잉여’(과잉)이다. 이 남근의 잉여가 인간사회를 소유적 관계와 지배-피지배관계로 재편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 남근의 잉여도 인류가 든 ‘패’ 중 하나다. 여성적 기질이든 남성적 기질이든 그것은 삶의 결정인자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천부적으로 머리가 좋다거나 타고나게 예쁘거나, 사주가 기똥차게 좋거나 기막히게 나쁘거나, 부자 부모를 두었거나 가난뱅이 부모를 두었거나 그것들은 모두 화투판의 패와 같은 것이다. 자기가 들고 있는 패를 지혜롭게 사용해서 자기식의 행복점수를 낼 일이다. 다만, 특정 패만 귀히 여기고 특정 패는 아예 치지도 않는 규칙 따위는 바꿔가면서.


떡실신녀의 이야기는 다음주에도...

– 매이 아빠

응답 1개

  1. 달맞이말하길

    샘, 잘 읽었습니다. 남근의 잉여. 자기가 들고 있는 패를 지혜롭게 사용해 행복지수를 높이라는 이야기가 참 좋네요. 정신분석 세미나를 복습하는 것 같아 더 좋구요. 메이가 갈수록 예뻐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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