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소통의 힘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소통의 힘

지난 일요일 오후, 신촌에 모임이 있어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들이를 다녀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충무로 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우연히 두 자리가 비어 있어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하철 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봄나들이 다녀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이야깃소리 때문이겠거니 하고 앉아 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사실 아이가 아니라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하는 행동이 거의 너댓 살 먹은 아이 같아서 나는 순간 그 큰 덩치를 보고도 아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연신 지하철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들고 매달리기를 하거나, 큰 소리로 어린 사내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삼촌쯤 되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옥수 역에서 그 아이들과 부모들이 내렸는데도 그 청년은 내리지 않고 연방 장난을 치는 거였다. 그 때를 놓칠세라 우리 딸아이가 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딸은 나와 남편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붙임성이 지나칠 정도로 좋다. 늘상 지하철을 타면, 주변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기 일쑤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목소리와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신이 난 거다. 어른 중에 자기와 이렇게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는 감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오빠, 내 이름은 해솔인데,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나도 묵찌빠 잘 하는데, 나하고 하자, 응?”

“오빠, 여기 자리 비었어. 내 옆으로 와.”

그러자 그 청년도 신이 나서 내 딸 옆에 앉아 한참 묵찌빠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마 텔레비전에서 보던 발달 장애나 자폐 증상을 가진 청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분 중에도 자녀가 자폐증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나는 금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고, 혹여 저렇게 덩치가 큰데 갑자기 흥분하거나 해서 우리 딸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맘이 달았다. 주변의 어른들은 보고도 모른 체하거나 시끄럽다고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도 했고, 아예 우리 딸과 그 청년의 대화를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기도 했다.

엄마의 마음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개의치 않고 두 사람의 대화는 흥미진진하게 계속되었고, 기분이 좋아진 청년은 급기야 지하철 칸의 맨끝에서 맨끝까지 달리기를 하는가 하면, 지하철이 설 때마다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면서 우리딸을 웃게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하철이 대치역에 도착하자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던 청년이 고만 지하철 문이 닫히는 바람에 우리가 탄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그런데 문제는 딸아이였다. 갑자기 울상이 되어서 막 소리를 친다.

“엄마, 어떡해. 오빠가 차를 못 탔어. 엄마, 차 좀 세워 봐.”

“괜찮아, 다음 열차 타고 자기 집으로 갈 거야.”

앙앙 우는 아이를 달래며, 나는 순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진심으로 오빠 걱정을 하는 딸아이보다 당장의 안위에만 급급했던 나 자신이 더 못났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청년은 누군가와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내가 참여하는 모임에서 학습부진아를 위한 수업자료집을 만들고 있는데, 내가 맡아서 지도안을 만들게 된 텍스트가 공교롭게도 <도토리의 집>과 <우리 누나>다. 이 책은 모두 일본 작가가 쓴 것으로 장애아동의 삶을 다룬 책이다. 야마모토 오사무가 지은 <도토리의 집>은 총 7권으로 구성된 만화로, 일본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토리의 집에서 중증 장애아들과 그들을 키우는 부모들의 삶과 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만화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들이 세상과 부딪치면서 극복해 가야 하는 숱한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그러나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불행할 것이라는 일반인의 선입견도 확실하게 깨게 해 주는 책이기도 하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오카 슈조가 쓴 <우리 누나>는 초등 고학년 학생들에게 많이 추천되는 이야기책으로, 그 또래 아이들이 장애아동 또는 그들의 친구나 주변인으로 등장한다. 장애아동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교감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공연히 낯이 뜨거워지기도 하였고,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사뭇 진지해지기도 하였다. 이 두 책은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읽으면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좋은 책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뭔가 대단하고 어렵고 복잡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소통과 공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이 두 책은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해서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도 힘들 때면 그날의 일을 떠올리곤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 주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날 무척이나 우울했다. 이상하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형편없게 느껴지던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모임 약속이 있었기에,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해 힘없이 걷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한 시각 장애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것이다. 그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없었고, 차들은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으며, 차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사람과 나밖에 없었다.

나는 망설일 여지도 없이, 곧바로 시각 장애인의 손을 잡고 “저를 따라 오시면 돼요.”하며 달리던 차를 멈추게 하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넜다. 순간, 나는 내가 그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종교는 가지고 있지만, 만일 신이 있다면 분명히 신이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보낸 것이리라.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보잘것없다고 느낀 그 순간에 신은 내가 마땅히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다.

야마모토 오사무는 그의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애인의 삶은 우리를 기꺼이 돌아보게 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알게 해 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더욱 빛을 발하리라는 것을.

내가 굳이 장애인을 그리려고 생각했던 것은 무한 경쟁 속에서 무가치하다고 여겨왔던 장애인들이야말로 그동안 우리들이 사회적 이익을 위해 버려왔던 다양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덕목들을 새롭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도 성장기에 관철되었던 일본의 가치관은 철저한 경쟁원리였습니다. 사회적 이익을 생산하는 행위만이 가치로 인정되었으며, 얼마만큼의 사회적 이익을 내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주어지고, 심지어 서열화되어졌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안겨주었지만, 심각한 인간소외를 빚어냈습니다. 이제 일본사회는 전후 초기의 깊은 좌절 속에서 인간이 해야 할 바, 사회가 해야 할 바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수정해 가야 할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 책을 읽어보면, 사회의 편견 속에 얼마나 많은 장애아들이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고, 스스로를 상처 내며, 그를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고통’이 아이들이 나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토리의 집>은 은밀하게 그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는 장애아와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타인의 삶을 지탱해 주는, 자신과 타인의 생명이 이 사회 속에서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김대경(고등학교 교사)

응답 2개

  1. 고추장말하길

    해솔에게는 마음의 문턱이 없네요. 마음의 매끄러운 평면을 가졌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쿠카라차말하길

    광인과 아이의 소통이 참 감동적입니다. 지적, 발달, 정신장애인을 짐승취급하며 시설에 유폐시키는 현실에서 아이들과 그 장애인 친구의 소통은 한줄기 빛처럼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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