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국가는, 미친 짓이다. <크레이지>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크레이지>는 좀비영화의 대부 조지 로메로의 <분노의 대혈투>(1973) 리메이크작이다. 바이러스로 마을 사람들이 미쳐서 서로 죽인다는 설정만 보면 ‘좀비가 나오지 않는 좀비영화’ 쯤 되겠다. 하지만 <크레이지>의 진정한 공포는 ‘미친 사람들’이나 ‘괴(怪)바이러스’에 있지 않다. 살을 뜯어먹는 좀비보다 총을 든 인간이 더 끔찍하진 않으며, 확산양상이나 증상에 일관성이 없는 바이러스는 정체성이 약하다.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미친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폭력성을 지닌 ‘국가’이다. 영화의 가치는 기존의 미국영화들과 전혀 다르게 국가를 사유하며, 국가라는 폭력기구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회의하는데 있다.

첫 시퀀스, 소도시 학교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하던 중 장총을 든 주민이 걸어들어온다. 보안관은 술에 취했다는 판단하에 제지하려하지만, 위험을 감지하여 사살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화두를 품은 발문에 해당된다. 누구도 보안관을 탓하지 않는다. 정당한 법집행이었으며, 기민한 대처가 없었다면 많은 이들이 위험해 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직 희생자의 처자식만이 과잉 공권력의 행사에 항의한다. 아내는 “주정뱅이 한명 쏘았을 뿐이라고 발표할 것이냐” 따진다. 그러나 시신에선 술도 마약도 검출되지 않는다. 두번째 시퀸스, 아내는 어쩐지 이상한 남편의 상태를 눈치 채고 불안해하지만, 남편은 괜찮다고만 한다. 한밤중 아버지가 칼을 들고 있다며 무서워하는 아들과 아내가 옷장에 숨자, 그는 옷장을 걸어잠그고 불을 확 싸지른다. 그리곤 평온하게 휘파람을 부는 가장. 이 장면 역시 영화 전체의 알레고리이다.

상수원에 생화학 무기를 실은 비행기가 추락한 사실을 안 보안관이 임의로 수도를 끊고, 임신한 아내를 대피시키려는 순간,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친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버스에 실어 임시막사에 부려놓고 체온계 하나로 감염자를 분류한다. 강압적인 조치에 항의하는 주민들은 총살한다. 동요하는 주민들로 갑자기 통제선이 뚫리자 군은 철수하지만, 이후 생존자를 수색하여 감염 여부에 관계없이 총살하고 화염방사기로 소각한다. 전화, 인터넷 등 통신망을 끊고, 고속도로를 봉쇄하고, 헬기로 차량을 폭파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군은 주민들에겐 대면조차 되지않는 ‘괴물’이다.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작전에 투입되었다는 방독면 속 신병의 얼굴이나, “그럼 전 세계로 감염이 퍼져나가야 되겠냐?”고 묻는 기술자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위성사진으로 내려다보며 폭탄투하로 인구 1,200명의 마을을 불태우는 군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구사일생으로 인접 도시로 탈출하지만, 위성사진은 인구 12만명의 인접지역으로의 2차 폭격을 예견한다.

기술자의 논리는 첫 시퀀스 보안관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던 모두의 논리와 같다. 위험인자의 조속한 제거이자,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다. 보안관은 첫 시퀀스에선 ‘대’를 대의하였지만, 이후 ‘소’가 되어 주체로서 아무리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도 ‘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소’는 술에 취했든 안 취했든, 감염이 됐든 안 됐든 배제되고 박멸되어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그 ‘소’가 점점 확대된다. 두번째 시퀀스처럼, 국가는 다시금 두려움에 떠는 국민들을 가두어 놓고 불바다를 만들고나서, 유유히 휘파람을 불 것이다. 뉴스에는 연쇄 폭발사고가 일어났다는 보도가 나갈 뿐이다.

수많은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국가는 재난의 원인을 인지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재난에 맞서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98년에 만들어진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에서는 지구가 깨져나가는 상황 앞에서도 국가는 우주적 작전을 지휘하며 정부각료와 국민의 일부를 선별 대피시키는데, 국민은 국가의 살생부적 조치와 군의 명령을 따라 질서를 유지한다. 즉 재난이 클수록 국가의 기능은 더욱 강화된 채 유지된다.

그러나 911사태 이후 국가는 그다지 미덥지 않게 그려진다. <투모로우>(2004)에서 국가는 대피령만 내리고 대책을 마련치 못하며, <우주전쟁> (2005)에서 일반국민들에게 국가의 존재는 미미하다. <미스트>(2008)에선 너무 늦게 도착하였고, <눈먼 자들의 도시>(2008)에선 재난이 커지자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군은 구원자로 보이고, 무능하긴 해도 국가의 통치성 자체가 의심받진 않았다. 반면 <크레이지>의 국가는 대단히 유능하다. 다만 국민을 적으로 삼는 게 문제이다. 실로 놀라운 인식변화이다.

물론 국가에 의한 바이러스 누출과 주민 학살은 원작의 설정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국가에 대한 불신’을 담았다고 평가되는 원작조차 과학자들은 치료제를 찾으려 노력하고, 폭격이라는 ‘최종해결책’은 고려되기만 할 뿐 실행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첨단 위성기술로 야구장 상황을 감지한지 이틀만에 주민을 몰살하고, 폭격 대상지역을 더 확대하는 ‘아쌀한’ 국가에 대한 인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911 이후 애국법에 의해 감시와 언론통제가 강화된 미국. 두 군데 동시전쟁과 부자들에게 감세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재정파탄에 이른 미국. 예산과 병력 차출로 재난관리에 구멍이 뚫려 인재에 가까운 카트리나 참사를 초래한 미국. 차도 없는 흑인들에게 대피령만 내린 후 치안부재의 악선전을 해대며 늑장대처한 미국. 걸어서 백인거주지까지 간 수백명의 주민들 머리 위로 경찰부대가 총을 쏜 미국. 빈민거주지를 신도시로 개발하려는 시정부에 의해 흑인들의 80%가 집에 못 돌아간 미국. 금융위기로 집을 빼앗긴 ‘서브 프라임’ 국민들은 버려두고 천문학적 세금으로 부자 금융가를 구제한 미국. 이러한 국가를 목도한 후 인식의 전환이 생긴게 아닐까? 영화 <괴물>의 ‘삽질’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불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듯이, 자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는 <크레이지>의 국가는 ‘제국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2010년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여실히 드러낸다. 미국이 변하고 있다.

– 황진미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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