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통제사회와 정보꼬뮨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기술과 감시 – 무엇이 어떤 이를 두렵게 하는가?

“희망과 공포의 정서는 인식의 결핍과 정신의 무능력을 지시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정리47의 주석

애플의 아이폰에서는 사용자의 동의를 얻어 그의 위치정보를 활용하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구동시킬 수 있다. 간단한 길찾기 기능은 물론이고, 자기 반경 5km(최대 100km) 안에서 트위터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찾아주기도 한다. 또 ‘증강현실’ 어플이라고 불리는 몇몇 어플들은 주변의 역, 버스 정류장, 약국, 편의점 등 온갖 편의시설의 위치를 띄워주기도 한다. 끔찍하게도!


아이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위치기반 서비스들. 왼쪽부터 구글맵, 스캔서치, 트윗버드의 nearbv twit

이 모든 서비스는 모두 사용자가 지도상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아내어 다른 사용자들이 입력해 놓은 지역 태깅 정보나, 서비스 사업자가 미리 구축한 데이터 베이스에 입력된 지역 자료를 사용자의 아이폰 화면에 띄워준다. 이 말은 역으로 아이폰 사용자의 위치를 마음만 먹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에서 사용자 개인의 위치를 알 수는 있어도 그 사용자가 누구인지는 식별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 가입자의 개인정보는 이동통신사가 가지고 있고, 현재 GPS에 접속한 단말기가 어떤 단말기인지 하는 것은 애플에서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데이터를 조합해 보아도 그게 누구인지 맵핑할 수 없다는 말이다.(트위터 사용자의 위치 같은 것은 사용자 자신이 공개한 경우에만 지도상에 표시가 된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스마트폰과 같은 최신 기술이 적용된 타자와의 변용에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정보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악한’ 권력과 ‘악한’ 자본의 감시역량을 더 촘촘하고 더 넓게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 때문에 모든 정보기기들, 모든 정보기술들과 단절해야 하는 것인가?

인터넷의 ‘악한’ 기원, 그 근거없음에 대하여

“스피노자에 따르면 악이 어떤 무엇도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선만이 존재하고 존재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악과 마찬가지로 선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선악을 넘어서 있다.” –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50쪽

정보기술을 배격하는 태도는 어떤 개인에 대한 데이터가 많을수록 그에 대한 보다 섬세하고 강력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서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2008년 봄에서 여름까지 있었던 촛불집회를 떠올려보자. 인터넷에서 쇼핑을 하고, 인터넷에서 동호회 활동을 하고, 이메일로 레포트를 제출하거나 기획서를 제출했던 사람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인터넷에는 얼마나 자주 접속하는지 하는 웹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서버에 저장되어 있는 그 무수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재미있는 점은 그들이 한손엔 핸드폰, 다른 손엔 디카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는 정보기기, 정보기술과 대중의 신체가 강력하게 변용했다는 것, 그래서 휴대폰 위치 추적이나 인터넷 카페를 감시하는 저들의 역량을 넘어서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들을 벼려 낸 것만이 아니다 ; 그들은 이 무기들을 쓸 사람들도 만들어 내었다.” – 맑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정보기술의 핵심에는 인터넷이 있다. 아이폰이든, 아무리 성능이 좋은 컴퓨터든 그것이 가진 위력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슈퍼카가 비포장 도로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인터넷은 원래 1960년대 말 미국 국방부에서 각 연구소와 대학에 분산되어 있는 컴퓨터들을 연결하여 방대한 자원을 공유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발상이 이어져 1986년에는 과학자들의 연구데이터를 교환할 목적으로 민간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이것이 확대된 것이 현재까지 온 것이다. 이 기술은 시작부터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이 현재와 같은 규모, 현재와 같은 편리함을 획득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과 같은 거대 자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쾌적하게 구동되는 운영체제(윈도우즈 or OS X), 웹 페이지를 깔끔하고 신속하게 띄워주는 인터넷 브라우저(IE, Safari, Chrome), 망망대해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로 신속하게 이동시켜주는 검색엔진(Google, Bing), 받아도 받아도 어느 것 하나 지울 필요가 없는 대용량 이메일까지 자본의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럴까?

“저는 (공짜) 운영 체제(Operation System)를 만들고 있는데요(취미일 뿐 GNU처럼 전문적인 대형 작업은 아닐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기능들을 원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어떤 의견도 모두 환영입니다만 그것들은 모두 구현할 거라는 약속은 못해요.” – 리누스 토발즈가 어느 게시판에 남긴 메모(클레이 서키,<끌리고쏠리고들끓다>257쪽)

이 짧은 게시물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을까?

“저는 이 OS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저만의 OS를 만들어 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처음부터 시작해 모든 걸 만들어 나갈 시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 하지만 아기 OS를 키우는 걸 도울 시간은 있을 것 같습니다.” – 리누스 토발즈의 글에 오스트리아 어느 대학의 누군가가 남긴 메모(같은 책, 258쪽)


윈도우즈의 '창문'을 깨고 나오는 리눅스 펭귄

저 간단한 메모들이 현재 전 세계 서버의 40%에 탑재된 리눅스의 시작이다. 운영체제에 관심이 있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전세계의 수많은 개발자들이 운영체제를 이루는 각 부분을 맡아서 개발한다. 구글을 사용하건 야후를 사용하건 간에 어쨌든 인터넷에 접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리눅스를 간접적으로 사용한다고 할 때, 이 프로젝트가 세상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생산방식을 ‘동등계층생산’(peer production)이라고 부른다. 시장성을 따지고, 이윤율을 계산해서 생산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않고, 특정한 규칙을 스스로 창출하고 그 규칙만 따른다면 누구든 개발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등계층생산’의 예로 유명한 다른 것으로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프로젝트가 있다.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가 발생했을 때, 18분 만에 위키피디아에 관련 항목이 등록되고 몇 분 후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철자를 교정하고 새로운 정보를 덧붙였다.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2,500명에 달했고, 어떤 주류언론도 제공하지 못했던 정보를 순식간에 제공했던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연결된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창의력, 컴퓨터, 인터넷만 있으면 무엇이나 협력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돈 탭스코트, 앤서니 윌리암스, <위키노믹스>, 111쪽)

문제는 변용 능력

이런 경향은 위와 같은 비영리 프로젝트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구글 검색만 보더라도 사용자가 검색을 하면 할수록 좋아지는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된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유튜브는 수천만 명의 회원이 올린 수억 개의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 유튜브를 이용하면 유명 스타에서부터 미국 시골의 작은 클럽에서만 공연하는 아티스트의 (동네 사람이 찍어서 올린) 라이브 비디오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업로드 행위는 사용자를 전세계의 음악팬과 교류하도록 한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이렇게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족쇄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구글 검색, 지메일로 주고 받은 이메일,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또는 본 동영상 등은 그 사람의 취향이나, 성격,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지까지 사용자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개인의 정보를 고스란히 데이터화한다.


공포는 벽을 돌파한 후에 사라지지 않는다. 벽을 뚫고가는 운동 속에서 소멸한다.

90년대 후반부터 폭발적으로 깔리기 시작한 네트워크는 만국의 책상(데스크톱)을 연결해 버렸다. 또 아이폰으로 가시화된 스마트폰은 만국의 사람들의 손바닥을 네트워크화했다. 스마트폰은 카메라, 전화, 컴퓨터가 통합된 휴대용 기기다. 이 기능들을 조합하면 사진을 찍어서 간단한 메모와 함께 ‘즉시’ 웹에 올리고(이 사진에는 위치정보가 함께 표시된다) 네트워크 안에 있는 사람들과 현재의 감정이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찍은 사진의 대부분이 컴퓨터 앞까지 오는 동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서 하드디스크의 용량만 잡아먹는 골칫덩이가 되었던 데스크-네트워크 시대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이 ‘놀라운 변화’는 ‘놀라운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던 가정으로 돌아와보자. “어떤 개인에 대한 데이터가 많을수록 그에 대한 보다 섬세하고 강력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가정 말이다. 웹 서버에 저장된 나의 정보들, 스마트폰을 통해 수집된 나의 모든 정보들, 이 모든 정보들을 누군가가 감시한다. 감시자는 이를 토대로 나를 통제할 다양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할 것이다. 문제는 힘이다. 정보기술 자체에 내재한 선이나 악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것을 두고, 그것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투쟁이 문제다. 사람들이 꼬뮨주의적으로 올린 동영상 데이터, 지식정보를 이용해서 자본화하는 거대기업들이나, 그것들을 이용해서 촘촘한 감시망을 짜고 있는 국가권력이 인터넷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감시’와 ‘통제’ 역시 강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것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우리가 감시당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또 언제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위해 온전히 사용된 적이 있던가? 문제는 ‘감시’ 때문에 정보기술 자체를 거부하거나, 그것과 변용하려는 노력을 멈추거나 하는 것이다.

항존하는 감시와 통제와 더불어 함께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기술과 연대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인터넷에는 온갖 알아들을 수 없고, 희안한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언어를 배우려고 했던 적이 있던가? 더불어 이 언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욕망을 섬세하게 관찰해 본 적이 있던가? 또 그런 말들을 생산할 수 있는 어떤 플랫폼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홈페이지, 2000년대 중반에 멈춰 있는 게시물들까지. 대부분의 이른바 진보매체라고 불리는 웹 페이지들에서 감시사회 담론, 정부의 인터넷 검열 담론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텍스트들이 출력되는 웹 페이지들은 인쇄매체의 언어를 그대로 웹 사이트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촌스럽다. 이 낡은 스타일, 낡은 언어, 변하지 않는 신체가 무능력의 핵심, 공포의 원흉이 아닐까

꼬뮨주의의 경향적 확대

“인간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물체들과도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브루노 라투르 외, <인간●사물●동맹>

컴퓨터(스마트폰까지)와 인터넷은 뇌신호, 손과 발의 근육들을 전자적 신호로 변환하여 세계의 다양한 뇌신호들과 접속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도구이다. 이 도구는 선형적 시간까지 파괴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지식정보들과 직접적인 접속,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뇌신호들과의 접속까지 매개해준다. 구글의 다양한 서비스와 무료배포되는 오픈 소스 프로그램들은 그 모든 접속의 역량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구글북서치는 저작권 기간이 만료된 도서들을 스캔해서 무료로 사용자들에게 배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글뉴스는 전세계의 신문페이지를 검색해서 각 신문사별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링크를 제공한다. 물론 구글의 이러한 프로젝트에 기존의 미디어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발의 요지는 한 가지다. 구글이 자신들의 수익을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신문기사나, 도서편집 등은 자신들이 다 하고, 구글은 단지 스캔하고 검색 알고리즘을 돌린 것만으로 그들의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수익저하는 당연히 컨텐츠 생산자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그리고 미디어 교체에 따른 이러한 충격은 사용가능한 컨텐츠의 무료화 또는 초저가격화를 실현한다. 전통적인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구글이 아무리 대단한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 아무리 감시체제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더라도 이런 형태의 소스개방은 대중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긍정성을 갖는다.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보는 컨텐츠’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리눅스와 위키피디아의 예에서도 봤듯이 ‘생산툴로서의 컨텐츠’ 역시 무료화와 초저가화 되고 있다. 포토샵과 거의 비슷할 정도의 이미지 편집 기능을 가지고 있는 김프오픈오피스 등 온갖 생산툴이 무료로 배포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 이것은 거대한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그래서 그 거대한 신체를 이루고 있는 대중의 역량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구글 같은 거대 자본도 바로 그 거대함 덕분에 자신을 무너뜨릴 기반을 끊임없이 스스로 창출하고 있다. 감시와 통제의 공포는 그것이 일어나는 어떤 장(場)으로서의 네트워크에 대한 무지에 기인하고 있다. 어디에든 접속하고 유용한 모든 것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생산하라! 그렇게 해서 생겨난 힘만이 모든 감시를 그저 ‘보는 것’에만 그치게 할 것이다.

– 정군 (그린비 웹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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