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출판의 민주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출판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출판의 민주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출판


구글 VS 올드 미디어

우리가 알고 있던 종이책, 그 익숙하지만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낡은 것은 무너져 가고 있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구텐베르크의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구텐베르크 이래로 컨텐트는 늘 기술과 만나 스스로를 혁명적으로 갱신해 왔다. 중세의 컨텐트는 근대의 인쇄기술과 만나면서 대중과 혁명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 컨텐트는 TV, PC, 인터넷을 차례로 만나 스스로를 진부하게 만들면서 새로워졌다. 물론 이전의 혁명과 지금의 혁명은 성격이 다르다. 이전의 혁명이 컨텐트가 기술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의 혁명은 구글의 예에서 보듯 기술이 컨텐트를 지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술의 컨텐트 지배는 컨텐트 생산기업의 재생산 구조에 심각한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컨텐트 사업은 일방향성과 폐쇄성(컨텐트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소유)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었으나,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컨텐트 사업은 쌍방향성과 개방성을 요구받고 있다. 컨텐트 생산과 소비의 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는 “책은 살아남을 거야”라는 헛된 위로와 거짓말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혁명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이행기(혁명기)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찾고 속도를 조절하기란 쉽지 않다. 답을 알 수 없을 땐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길을 잃었을 땐 떠나온 곳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지난 3월,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수유너머’ 고병권의 특강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들었다. 우리 출판사에서 ‘개념어총서’와 관련해 기획한 연속 강좌 중 하나였다. 플라톤에서 최장집까지 종횡무진 넘나드는 강의는 현실적이었고, 강렬했다(자세한 내용은 7월쯤 책으로 되어 나오니 그걸 보시라. 책값이 백만원이어도 사고 싶으실 거다 ㅋㅋ). 그의 강의는 내게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했는데, 지금 출판미디어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조건을 ‘출판의 민주주의’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볼루션(Revolution)은 ‘다시 볼루션(소용돌이) 속으로’라는 뜻의 혁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리폼(Re-form)은 ‘다시 폼(형식)을 짠다’는 뜻의 개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개혁과 혁명을 쉽게 혼동한다. 개혁은 조용히, 혁명은 쓰나미처럼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용히 오는 혁명도 있고, 쓰나미처럼 오는 개혁도 있다. 지금 출판계에 들이닥친 혁명은 고양이 걸음처럼 왔지만, 그 소용돌이는 매우 크고 격렬하다. 지금 출판계의 관심은 온통 전자책에 가 있다. 그러나 폼을 바꾸는 전자책 정도의 안이한 대응으로는 출판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출판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출판 아르케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케(Arche)란 알다시피 원리, 근거, 혹은 문법을 말한다. 기반 혹은 토대라는 의미에서 아르케는 그라운드(ground)라고도 할 수 있다. 절대권력을 누려 왔던 책이라고 하는 단일한 상품, 정보에 대한 지식의 차별적 우위, 생산자와 소비자의 확연한 분리,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하던 출판사의 고유한 지위와 역할 등이 지금까지 출판을 떠받쳐 온 아르케 혹은 그라운드다.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새로 모습을 드러낼 출판을 ‘아나키즘의 출판’ 혹은 ‘언더그라운드의 출판’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소셜 네트워크 - 텍스트 네크워크 : 열린 장 - 복수성의 장

이런 거대한 변환의 배경에는 IT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있다. IT는 기술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냈고, 이 네트워크를 토대로 사람들간의 다양한 네트워크 즉 ‘소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원래 출판은 텍스트를 주로 다루는 업종인데,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이미 열린 ‘장’(場)이며, 복수성의 ‘장’이다. ‘텍스트’의 원래 뜻은 ‘직물’이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짜여지는 직물처럼, ‘텍스트’는 전 시대의 여러 텍스트와 동시대의 여러 텍스트를 인용해서 짠 직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여러 텍스트의 결과물인 독자가 관련됨으로써 의미가 생산되는 동(動)적인 장이다. IT 기술에 따른 소셜 네트워크의 확장은 출판의 이런 잠재성이 폭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제 지식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상호작용하면서 무한히 증식해 갈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홀로 고립된 순수한 결정체 혹은 원본으로서의 지식은 더 이상 없다.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있을 뿐!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지식의 권좌에서 내려온 컨텐트는 끊임없이 복제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된다. “니가 무슨 책이야?” 하고 자격이 의문시되었던 다양한 컨텐트가 대중지성의 지식계에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데모크라시는 데모스(Demos)의 지배, 즉 자격없는 자들의 지배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런 ‘자격없는 컨텐트들의 등장’이야말로 출판계에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뉴퍼블리싱의 컨텐트 세계는 n개의 컨텐트 세계다. 책이라고 하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날 때만 민주주의의 시대 감성에 맞는 다양한 출판 컨텐트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럴 때만 혁명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사무실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 놓고 상념에 넋놓고 있을 때, 김현경 주간이 옆으로 오더니 불쑥 던진 말이다. 일본의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글인데, 편집부 임쿤이 올 가을에 우리 출판사 웹사이트가 리뉴얼 되면 우리 출판 활동이 2기에 접어들 텐데, 그때 딱 어울릴 표현 아니겠냐며 해준 말이란다. 정말이지 ‘출판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시대 감성에 맞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한번으로 완결되는 혁명은 없다. 우리는 더 빈번히 혁명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쉽게, 깊게, 유쾌하게” 혁명의 시간을 살아내는 지혜다.

– 유재건(그린비 출판사)

응답 1개

  1. 쿠카라차말하길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마음 속에 꾹꾹 눌러두고 싶은 문구네요. 쉽고도 깊고, 깊고도 유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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