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 위에 그린 세계(코요아칸, 멕시코)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프리다 칼로, 자화상 위에 그린 세계(코요아칸, 멕시코)

코요아칸, 자전거를 갖고 싶은 곳

그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고 느꼈다. 코요아칸(Coyoacan). 이곳은 빛을 사랑한다. 햇살은 따갑고 나뭇잎은 반짝거린다. 집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개성을 뽐내면서도 수수하다. 외국에서 만난 장소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질 때, 낯설고 새로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반가운 경우도 있다. 내 마음의 풍경을 여기서 간직하고 있어줬구나라는 고마움 섞인 반가움이다.

복잡한 전선줄이 하늘을 갈라놓고 바쁜 걸음에 퉁명스러운 표정들, 서울살이의 한 가지 모습. 이국적인 장소에서 느끼는 매력은 어쩌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원했지만 얻지 못한 삶의 모습을 만나거나, 혹은 그 장소를 만나 갖고 싶은 생활의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지는 데에 있는지 모른다.

2년 만에 코요아칸을 다시 찾는다. 재작년 코요아칸의 공원에서는 아들로 보이는 꼬마를 데리고 나와 기타를 연주하시던 히피 차림의 아주머니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날의 햇살과 느긋함은, 여전할까. 하지만 코요아칸을 가려던 토요일 아침, 날씨부터가 쌀쌀하고 찌뿌듯했다. 누가 멕시코를 따뜻한 나라라고 말하는가. 적어도 10월의 우기 멕시코시티의 아침은 이불 바깥으로 나설 용기가 좀처럼 생기지 않을 만큼 쌀쌀하다.

아침에 인터넷을 보니 연일 이어지던 경제위기 소식에 조만간 북한 관련 중대보도가 있을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핵문제 아니면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관한 보도일 거라고 예감했다. 마음이 덜컹했다.

코요아칸에 가서 그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코요아칸의 풍경은 2년 전과 사뭇 달랐다. 히피 아주머니가 계시던 공원에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다. 코요아칸의 띠앙기스는 토요일에 선다. 그러면 인형과 천, 그림을 파는 가판대가 늘어서고 관광객들이 붐벼 활기가 돌아야 하지만 그날 토요일은 그렇지 않았다. 가판대에는 토속 공예품 대신 서명지가 놓여 있었다. 삐라를 한 장 받았다. 제목은 “코요아칸의 띠앙기스를 방어하는 전선” 내용은 이랬다. “코요아칸의 띠앙기스는 문화를 낳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서로 다른 인종 구성원들이 생계를 꾸려가는 곳이다. 코요아칸의 띠앙기스는 똘레랑스의 공간이며, 많은 이들에게 그러하다.”

서명운동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시에서 단속에 나서 더 이상 노점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장의 삐라를 보고 알았다. 코요아칸의 띠앙기스에는 500개 이상의 일자리와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계가 달려있다. 공원 근처에 ‘코르테스의 집’이 있었다. 지금은 구청으로 사용되는데, 그곳의 직원 분께 여쭤보니 코요아칸의 띠앙기스에는 마약 문제도 있고 쓰레기처리 문제도 있어 민원이 잦았다고 한다. 지금은 정비사업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서울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니 민원의 정체란 게 궁금했지만, 그 이상으로 알아낸 것은 없다. 아무튼 2년 전의 풍경은 사라졌다.

코요아칸에 나와 스산한 마음이 더해졌다. 공원을 떠났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다리를 꼬고 책을 읽고 있는 중년의 여성은 매력적이다. 햇살이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느낀다. 이 공간이 내포한 삶을 가지고 싶다. 남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곳이니 여행자의 바람처럼 머물러 있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러한 문제까지를 포함해서 이곳의 삶을 갖고 싶다. 그때는 자전거를 사야지. 날마다 저 노란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려야지. 종종 저 커피숍을 들러야지.


신성한 노동과 살아있는 문화의 근원이 닫혀 있다.

파란집

이곳의 삶을 가진 사람이 있다. 공원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파란집(Casa Azul)이 있다. 벽도 지붕도 문도 코요아칸의 하늘색을 닮았다. 여기서 프리다 칼로(Frida Kahlo)가 살았다. 그녀는 1907년 7월 6일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생일이 1910년 7월 7일이라고 말한다. 1910년은 멕시코 혁명의 해다. 그녀는 혁명의 딸이었다. 그리고 아스테카의 달력에 따르면 7월 6일은 ‘죽음’(Miquiztli)의 날이지만, 7월 7일은 ‘사슴’(Mazatl)의 날이었다. 그녀는 멕시코 문명의 딸이었다.

파란집 2층에 올라가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프리다의 침실과 작업실이 있다. 작업실에는 스케치하다 만 그림, 작업노트, 편지, 휠체어, 붓과 물감 등이 놓여있고, 그녀의 침실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의 사진과 그들의 책, 그리고 마야의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랑을 했다. 1층 침실에는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것 마냥 중절모가 하나 걸려있다. 그 모자의 주인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이다. 천재 벽화화가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 여기에 호색한이었다는 평가를 덧붙여야 프리다에게는 공평한 것일까. 푸른 벽 한 구석에는 “프리다와 디에고가 이곳, 파란집에서 1929년부터 함께 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 둘은 부부였다.

프리다는 스물 한 살에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디에고는 당시 유럽 유학에서 돌아와 멕시코의 공공건물들에 대형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디에고는 이미 명성을 지닌 화가였으며, 두 번의 결혼생활을 거쳤고, 프리다와는 그녀의 나이만큼 스물 한 살의 차이가 났다. 프리다는 아직 개화하지 않은 화가지망생이었다. 디에고는 훗날 프리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한다. “무희처럼 발랄하고 날렵하며, 장난기에 넘치면서도 진지하고, 절대적인 것을 향한 불길에 타오르던 비범한 소녀를 보았다.”

둘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프리다의 집에서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은데다가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편력은 꽤 알려진 바였다. 하지만 프리다의 치료비 때문에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결국 둘의 결혼을 승낙했다. 디에고는 거구였고, 프리다의 체구는 작았으며 디에고 옆에 서면 더욱 왜소해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불렀다. 세간의 눈에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

만약 수컷 코끼리에게 짝을 옮겨다니는 습성이 있다면, 이 비유는 더욱 적절할 것이다. 디에고는 결혼한 후에도 줄곧 바람을 피웠다. 프리다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를 갖기도 했는데, 이때 프리다는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랐다. 프리다는 나중에 자기 인생에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는데, 하나는 그녀에게 평생 고통을 짊어지운 교통사고였으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와의 만남이었다.

파란집의 벽에는 프리다와 디에고가 서로를 향해 남긴 말들이 새겨져 있다. 사랑의 속삭임과 혁명의 낱말이 어색하지 않게 공존한다. 그렇듯 자기만의 강렬한 색채를 지닌 두 사람의 일상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그림과 혁명의 열정을 공유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는 동반자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생활도 어느 한 구석은 비루하고 구질구질했을까. 그들은 사상토론을 나누고 언쟁을 했을까. 딴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디에고는 저녁식사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을까.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들은 그 감정을 그림에 담았을까. 감정의 골이 생겼을 때 그들은 현명하게 잘 극복하는 커플이었을까. 서로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 가장 매력을 느꼈을까. 나이 차이는 생활에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했을까.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에 관해서는 연구물이 많다. 맘만 먹으면 이러한 궁금증들을 얼마간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삶의 거처에 와보았으니 그 풍경만을 가지고서 상상해보고 싶었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 위에 그린 세계


<우주, 지구(멕시코, 나, 디에고, 숄로틀이 어우러진 사랑의 포옹>(1949년 작). 멕시코는 프리다를 낳고 프리다는 멕시코를 그렸다. 해와 달, 하늘과 땅이 음양의 포옹을 나눈다. 이 우주의 조화 속에서 프리다는 어머니 대지 멕시코 안에서 그 자신이 어머니처럼 디에고를 감싸 안는다. 대지의 한 쪽 팔에 숄로틀이 잠자고 있다. 숄로틀은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화적 동물이지만, 거대한 사랑의 포옹 속에서 숄로틀도 달콤한 잠을 이룬다.

나는 사랑이 열정과 행동을 공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랑은 아늑하지만 아울러 긴장감도 배인다. 누군가와 이어져있다는 것은 자아의 확장이겠으나 그 부대낌은 폭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생활의 무게는 서로가 공유한 열정, 서로를 향한 애정을 침식하기도 한다.

프리다에게 생활의 무게는 더욱 벅찰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그녀의 육체에 남겨진 상흔의 무게도 더해진다. 프리다는 열여덟에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였고 그 파편이 그녀의 배를 관통하여 척추를 뚫었다.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스무 살로 접어들던 무렵, 사고는 그녀의 행복과 함께 그녀의 자궁을 찢어놓았다.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이것이 그들의 부부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프리다 자신이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여러 차례 유산했다. 그녀는 그 상처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섯 살 때 척수성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으며, 결국 성인이 된 후에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그녀는 평생 서른 두 번의 수술을 견뎌내야 했으며, 특수제작된 코르셋을 착용해야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2층 그녀의 침실에는 위에 거울이 달린 침대가 있다. 그녀의 작품이 대개 자화상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그녀가 자유롭게 거동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화상은 자화상에 머물지 않았다. 혹은 그녀는 자화상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내가 사랑하는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루쉰>이라는 저작에서 루쉰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절망에 절망한 자는 문학가가 되는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누구도 자신을 지탱해주지 않기에 전체를 제 것으로 해야만 한다.”

바깥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운 중국의 조건에서 루쉰이 기존의 어떤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감내해야 했던 고투를 기록한 말이다. 프리다도 닮은 영혼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며 자기 내면의 밑바닥에 있는 편린들을 건져내 작품으로 삼았다. 문학가이든 화가이든 ‘작품 세계’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들은 단지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 말에 값할 만큼 자기응시를 거듭하고 내면의 고독을 곱씹었던 이들이리라.

그리하여 그녀의 자화상 속에서는 하나의 세계가 구축된다. 그녀는 단지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자화상 속 그녀의 표정에는 날 것의 감정들이 자기응시의 힘을 바탕으로 여과되어 드러난다. 고통과 분노, 인내, 소망, 사랑은 말로서는 분절되지만 그녀의 표정 속에서는 함축적으로 함께 머문다. 한편 자화상 속 그녀의 몸은 입기도 벗기도 하고, 다치기도 장식이 되기도 한다. 얼굴에 깃든 표정은 자아를 주장하지만, 몸은 바깥에 노출된 채 수동적이다. 하지만 몸은 얼굴에 깃드는 표정을 낳는다. 그녀는 자화상에 세계를 담았고, 그녀의 몸은 그렇게 하나의 세계였다.


프리다 작, <코요아칸의 프리다, 1927>

하지만 나는 이를 두고 가령, 삶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타는 예술혼으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그림을 자기존재의 이유로 삼았다는 식으로는 정리하고 싶지 않다. 어떤 인간이 일상을 보낸 장소를 엿본 다음에야 그런 수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생활과 그 생활의 무게를 짊어지고 그 생활 속에서 피어난 것의 관계는 단절이거나 비약일 수 없다. 차라리 생활의 버거움은 그녀의 예술을 낳기 위한 가혹한 조건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예술은 일상 속에서 자신을 골라낸다. 허약한 꽃은 피어나지 못할 테며 질긴 꽃은 긴 생명을 얻으리라.

그녀는 1954년 7월 13일에 자살했다. 죽기 전날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있는 자화상> (1932년 작) 디에고 리베라는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뒤 산업화된 미국의 모습을 찬미했다. 프리다는 그런 디에고의 모습을 실망을 느끼며 멕시코의 태양과 토착문화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이 작품을 그렸다. 오른쪽에는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 나오는 산업화된 그리고 삭막한 미국의 풍경이, 왼쪽에는 피라미드와 그 아래 흩어져 있는 석상들과 땅에 뿌리를 드리운 다양한 꽃이 있는 멕시코가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손에는 멕시코 국기가 들려져 있고 그녀의 시선은 멕시코를 향한다. 담배 또한 멕시코를 그리워하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피라미드 위로 해와 달이 떠있고, 그것은 낮과 밤의 투쟁과 조화, 하늘과 땅의 결합을 보여준다.

– 윤여일 (수유너머 R)

응답 5개

  1. 말테말하길

    어… 이상하다… 여기에 분명히 댓글을 남겼었는데… 이상하다…ㅠㅠ

    • zziraci말하길

      아… 죄송합니다. 서버 이전을 하면서 약 하루 정도 중복 접속이 되었어요.
      이전 서버에 남기셨을 수도 있구요. 이사 중에 남기셨을 수도 있어요.
      따로 삭제하지는 않았답니다.

      죄송해요~ ㅜ.ㅜ

  2. 연초록말하길

    어떻게 그 먼 곳에 갔을까, 의문이 풀렸습니다,어제 저녁 밥먹다가

    그래서일까요?

    멕시코에 관한 글이 더 잘 읽히는군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보고 싶어지네요.덕분에

  3. 단단말하길

    “삶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타는 예술혼으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그림을 자기존재의 이유로 삼았다는 식으로는 정리하고 싶지 않다. 어떤 인간이 일상을 보낸 장소를 엿본 다음에야 그런 수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하……” 이 부분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제가 사람들한테 예술가는 천재성, 광기 뭐 그런것 때문에 훌륭한 작품 만들어내는거 아니라구 얘기하고 다니거든요.
    언젠가(정확히 언제인지 충분히 기억하지만..) 글쓰기를 하는 본인의 마음가짐 또는 풀어내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얘기하실 때 예술가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그림 그리고 음악 만들고 춤추고 글 쓰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속에 세상의 불편한, 그러나 진실을 말하려는 예민함이 묻어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면 다 예술가될 수 있는거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4. 남희석말하길

    정말 흥미있는 글입니다. 그림 설명도 재미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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