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마음을 읽는 다양한 방법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마음을 읽는 다양한 방법
– <아버지의 그림 편지> 곤살로 모우레 글 / 페르난도 마르틴 고도이 그림 / 김정화 옮김 / 푸른숲어린이

하나.

얼마 전, 아버지 꿈을 꾼 적이 있어. 딩동. 벨 소리가 났는데 거실에 앉아 있는 식구들 누구도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어. 딩동, 또 다시 벨 소리가 났어. 마지못해 문 앞으로 다가가 구멍으로 밖을 내다 봤더니, 아버지가 서 있었어. 식구들을 향해 귀신이라도 본 듯 소리쳤지.

“아버지가 왔어,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들은 그 누구도 아버지를 맞으러 달려가지 않았어. 서로 끌어안고 벌벌 떨기만 했어. 벨 소리는 자꾸 들리고, 둘째, 셋째, 넷째가 차례로 다가가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난 뒤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어.

그러다 잠이 깼는데,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어. 꿈이 너무 생생해서, 꿈속에서조차 야박하고 냉정했던 내가 징그러워서, 저승에 가서도 홀대받는 내 아버지가 측은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뱃속에 있던 것들을 왕창 게워냈어.

한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내 아버지를 사람들은 ‘웬수’라고 불렀어. 마누라도, 동생들도, 친척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어. 아버진 그 홀대를 견딜 수 없었는지, 점점 더 입을 닫았어. 젊었을 때는 자유와 향락을 위해 세상을 떠돌더니, 나이가 들어서는 작은 방에 자신을 유폐시켰어. 밥을 먹을 때, 화장실에 갈 때를 빼면 밖에도 잘 나오지 않았어. 그러더니 낮잠을 자듯 혼자 그렇게 세상을 떠났지.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평생 한 번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준 일 없는, 만인의 웬수였던 아버지를 보내는 날이 축제가 되었지 뭐야. 등을 지고 살았던 친척들이 모이고, 쌓였던 오해들이 풀리고, 통곡 대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어. 햇빛은 또 왜 그렇게 눈부시게 찬란하던지!

고모들이 그랬지.

“얘, 네 아버지가 생전 처음 좋은 일을 하는구나.”

주르르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쓱 닦아내며 내가 대답했어.

“그러게요.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나쁜 감정일랑 몽땅 들고 갔으면 좋겠어요. 이쁘고 좋은 오늘 요 기억만 남기고.”

그날은 그렇게 믿었어. 아버지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기억일랑 모두 날아갔다고. 그러니 이제 아버지를 떠올리면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아련한 그리움만 남을 게라고.

그런데 아니야. 기억은 참 징해. 아버지가 선물로 남겨준 축제의 기억보다, 그 전에 내 맘에 각인된 상처들이 훨씬 더 또렷하게 되살아 나. 그래서 아직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밉고 미안하고 서러워.

둘.

그래서일까? 아버지와 아들의 곡진한 애정을 그린 <아버지의 그림 편지>는 내게 참 특별한 느낌을 줘.

이 책은 마이토 판두로라는 열 살짜리 집시 소년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야. 비밀스러운 편지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어가는 이야기.

어느 날 아버지가 불한당 같은 사람들에게 끌려가. 교도소에 갇혔다는 소식만 들릴 뿐, 무얼 잘못했는지, 언제 바깥세상으로 나올지 알 수 없어. 마이토는 선생님의 권유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모르는 아버지에게 “식구들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자기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아버지를 무척 사랑한다고.”

그러자 아버지로부터 답신이 와. 투박한 종이봉투에 적힌 ‘판티토’라는 글씨를 보는 순간, 마이토의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아버지는 항상 마이토를 그렇게 불렀거든.

편지지에는 글 대신 줄이 여럿 그어져 있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어.

마이토는 천천히 편지를 들여다 봐. 그러자 긴 곱슬머리의 남자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여.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는 스무 개쯤 되는 화분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의 모습이. 나무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고, 아버지와 화분들 위에는 커다란 태양이 빛나고 있어. 하늘엔 새도 한 마리 날고 있고.

선생님이 뭐라고 쓰여 있느냐고 묻자, 마이토는 눈을 감아. 그러자 그림들이 파르르 되살아 나. 마이토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천천히 더듬어 가면서, 엉성하고 단순한 그림 속에 담긴 아버지의 전언을 해독해 내. 새를 통해 자유를 되찾고 싶어 하는 은밀한 마음까지.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그림이라는 비밀 암호를 통해서 서로의 삶을 주고받아.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서툰 글자로 쓰여진 편지가 도착해. 아들과 조금 더 가까워지기 위해 아버지는 그동안 감옥 안에서 열심히 읽고 쓰는 것을 배웠던 모양이야. 봉투에 이름을 쓰는 것부터 연습을 하다가 조금 자신이 붙자, 용기를 내서 내용까지 쓴 거지. 그런 아버지 마음을 알 리 없는 마이토는, 너무도 짧고 단순한 편지에 마음이 상해서 엉엉 울어.

“안녕 판티토 놀라지 안았니?
이제 나도 글짜를 쓸 쭐 안다
나도 잘 지낸다
너도 잘 지내지
판두로 “

글씨로 된 편지는 마이토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아. 글씨로 된 편지를 통해서는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어. 이제 아버지의 편지는 더 이상 특별한 편지가 아니야.

보물을 잃어버린 듯 당혹해하는 마이토에게 선생님은 “시작된 것들은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라고 알려줘.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고. “하나가 끝나면 다른 것이 시작되는 법”이라고. 언젠가는 다시 아버지가 네가 꿈꿀 수 있는 편지를 보내오실 거라고.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나면, 새로운 일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선생님 말처럼 아버지의 편지는 점점 더 활기를 띠고, 아버지와 아들의 비밀스러운 대화도 계속 이어져.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언젠가 아버지가 보냈던 그림처럼 기적적으로 부자는 만나. 황량한 마을, 돌무더기 쌓인 길에 앉아 있는 마이토와 수산나 선생님을 향해 누군가 걸어 와. 등에 햇빛을 가득 받으면서 천천히 비탈길을 걸어 온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마이토의 호흡이 점점 가빠져. 그러더니 천둥소리 같은 기침을 해대며 벌떡 일어나서, 사내에게 달려가.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내 품으로 새처럼 뛰어들지.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어. 오래도록. 춤을 추듯 조금씩 발만 움직이면서.

한 폭의 영화를 보는 듯, 이야기가 참 아름다워. 작가는 말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수단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언어가 얼마든지 있다는 걸 보여줘. 아버지와 마이토가 그림만으로 대화를 나누었듯이, 수산나 선생님과 마이토는 바라봄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서로의 마음결을 짚어내거든.

마이토의 진술을 통해 말의 허위성을 고발하기도 해. ‘수없이 많은 말들이 거짓이며,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말들도 대개는 공허한 말로 끝나고 만다.’면서.

마이토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쉽게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민하는 선생님 모습을 통해, 진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내고, 마음을 찔러 피를 나게 만들지만” 동정심에 찬 거짓보다는 가혹한 진실이 더 낫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결국 마이토에게 진실을 알려주거든.

언어나 사회적 편견 따위로는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도 잘 보여줘. 마이토와 아버지가 글과 감옥(사회적 편견)이라는 공간을 뛰어 넘는 소통의 힘을 보여줬다면, 마이토와 수산나 선생님 역시 스승과 제자, 집시와 이방인이라는 계층을 뛰어 넘는 소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수산나 선생님은 가난한 집시 소년 마이토에게는 유모와 같은 존재야.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을 시켜 주고, 손톱으로 이를 잡아주거든. 온 동네 개들이 짖어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까지 찾아와 아버지 소식을 알아봐 주고, 홀로 남은 마이토를 끝까지 지켜주는 믿음직한 존재이기도 해. 하지만 수산나 선생님 또한 아버지를 향한 마이토의 끝없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통해 깨우침을 얻어. 일방적으로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로 배움을 주고받는 관계인 게지.

마이토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집시들과 이방인들은 서로 아주 다른 동물들”이야. 하지만 작가는 마이토와 수산나 선생님을 통해, 서로 아주 다른 동물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하며 믿고 의지하는지 잘 그려내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다름에서 오는 의심의 벽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마이토와 선생님을 통해 어울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거든.

셋.

이 책에는 액자 소설처럼 또 하나의 부자 이야기가 나와.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맘껏 울지도 못해. 아버지와 이야기할 기회를 놓친 것이 분해서 모든 감각이 멎어버렸거든. 며칠 동안 씩씩거리던 아들은 아버지 묘지를 찾아가, 주저리주저리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토해내. 그런다고 대답이 들릴 턱이 있나?

그렇게 몇 달이 지나 가. 어느 날, 아버지가 남긴 땅을 손질하던 아들은 잡초들 틈에 있는 제라늄을 발견해. 아버지는 갔지만 아버지가 키우던 제라늄은 계속 자라고 있었던 거야. 커다랗고 빨간 꽃까지 피우면서.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아들이 향기를 좀 더 가까이서 느끼려고 꽃줄기를 잡자, 머릿속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 아들은 꽃줄기를 잡고 그동안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물어.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들려와. 제라늄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대답이.

그 뒤로 아들은 문제가 있거나 궁금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아버지의 땅으로 달려가곤 했대.

어딘가 내 아버지의 땅도 있을까? 마이토 아버지가 보내온 그림처럼, 이야기 속 아버지가 키우던 제라늄처럼, 나와 내 아버지를 이어줄 비밀 암호가 하나쯤은 남아 있을까? 그래서 내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내 아버지도 달달한 대답을 해 주실까? 그렇게 지금이라도 아버지와의 추억을 다시 쌓아갈 수 있을까? 좀 더 일찍 마음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달맞이

응답 4개

  1. 곶감말하길

    아버지랑 화해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만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 저도 아버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싫었던 아버지처럼요……

    • 달맞이말하길

      참, 이상하죠? 싫다, 싫다 하면서 닮아갑니다. 어쩌면 내 속에 그와 닮은 부분이 있어서 더 싫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버지와 다른 세상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 다른 세상을 꿈꿀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그냥 무작정 아이들 앞에서는 솔직해져요. 아이들이 감당 안 될 정도로요. 날몸으로 만나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어서. 진단을 하셨으니 처방도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곶감님, 홧팅!

  2. 둥근머리말하길

    왜 독자를 울리고 그러시나요.. 마음을 읽는 데 참 서툴다싶어요, 나이가 들어서도요..ㅠㅠ

    • 달맞이말하길

      나두 그래유. 어디 학원이라도 있었음 좋겠다. 가서 배우게. 나랑 좀 닮은 선생님이 있는데, 학교에서 만나면 늘 그래. 애교학원 다니자고. 우린 그래야 이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런데 애교학원만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어. 배워야할 거, 바꿔야할 게 아직 너무나 많다. 어쩌나. 눈도 침침하고 허리도 쑤시고 머리도 듬성듬성 빠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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