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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 없는 감시, 통제사회의 안보체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훈육 없는 감시, 통제사회의 안보체제

한국식 ‘전자발찌법’이라 불리는 <특정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3월 31일 국회를 통과했다. 전자발찌 부착대상을 살인범으로까지 확대하고, 부착기간을 최장 30년까지 상향조정하며, 형기 종료 후 의무적으로 보호관찰을 받게 하는 것이 주된 개정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이중처벌이다, 재범 예방 효과가 의심스럽다, 프라이버시권을 비롯한 인권침해 요소가 너무 크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아동 성폭력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과 사회 안전망 강화 여론에 묻혀 버렸다.

그에 반해, 애초 정부안대로 (재범율이 높지 않은) 살인, 강도, 방화범은 물론이고 (재범율이 높은) 폭력, 마약 사범에게도 전자발찌를 채우게 하지 못한 걸 한탄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런 사람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추세는 위치추적 전자장치가 확산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이 경우에는 인권 담론도 별다른 장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형 전자발찌제도의 반대 논거 중 하나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범죄자 위치추적 장치 부착제도는 구금을 대체한 인권 친화적 형벌 방법으로 시행되었지 한국처럼 강력범죄에 대한 이중처벌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런 주장까지 받아들여 경범죄에 대한 구금 대체용 전자발찌제도까지 시행되면 전자발찌 제도는 인권침해라는 오명까지 벗고 더욱 확산될 것이다.

어차피 전자발찌 제도는 사법적 형벌과는 무관한 보안 시스템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무선 위치추적 장치의 효용성만 놓고 보면 그것에 ‘노예 족쇄’니 ‘손오공 머리띠’ 같은 살벌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 장병의 위치를 신속하게 파악해 인명손실을 줄이기 위한 전파 식별(RFID) 기술의 도입이 지연된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드높다. 지금 무선위치추적 장치는 사법적 처벌과는 상관없이 보안 산업의 블루칩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 첨단 보안장치는 군사용 목적뿐 아니라 어린이, 환자, 노동자의 안전과 감시 수단으로 환영받을 것이고, 주민등록 정보, 건강관련 정보, 신용정보, 범죄관련 정보, 생체인식정보 등 개인 식별 정보의 통합 저장 및 원거리 식별 기능까지 결합하면 그 활용 범위는 실로 무한하다. 그것을 생체칩 형태로 만들어 이마나 손등에 주입하면 기독교 일각에서 요한계시록의 ‘666’으로 의심하는 ‘베리칩(VeriChip)’의 유토피아가 완성된다.

훈육사회에서 안보사회로

이중처벌용이든, 구금 대체용이든, 전자발찌 제도의 도입은 감옥의 훈육기능을 포기한다는 것, 감옥의 교정기능이 실패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감옥은 더 이상 범죄자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교정하는 훈육기관이 아니라 단지 위험한 사람들을 일정기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감금기관으로 변하고 있다. 인권 차원에서 보면 오히려 그게 수용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교정, 교화 교육을 일종의 정신적 고문으로 여기며 이중처벌이라고 거부하는 재소자들의 주장에 인권 단체는 당혹스럽기만 할 뿐이다. 감옥만 그런 게 아니라 감옥을 모델로 한 감금-훈육 기관들 전체가 변하고 있다. 학교는 학생들의 훈육기능을 포기하고, 공장은 표준화된 노동규율을 포기하고, 병원은 질병의 원인 규명과 발본적 치료를 포기하고, 가정은 아이들의 표준적인 양육을 포기한다. 각각의 닫힌 공간에 사람들을 배열해 놓고 시간표대로 정해진 행위 목록을 시행하여 온순하고 유용한 신체를 길러내는 ‘감금-훈육’ 장치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일반적 권력 모델이 아니다.

개개인의 신체와 영혼을 표준적인 형태로 주조하기 위해 집요하고 치밀한 훈련, 징계, 교정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방식은 이제 유효성을 상실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더 이상 그런 훈육된 개인, 사회 체제의 자본이 될 생산적 노동력의 담지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무 전산화와 자동기계의 발달로 인간의 노동력은 양적으로 덜 필요해지고 질적으로 탈숙련화 되고 있다. 정규적인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것이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시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는 시대, 모든 개인을 유용한 노동자로 만들기 위한 훈육장치는 비용만 많이 들뿐 오히려 자본의 가치증식에 방해가 된다. 오늘날 자본의 가치는 공장보다 시장에서 증식한다. 유통과 마케팅이 공장을 지배하고 증권시장이 산업자본을 지배한다. 자본의 가치는 공장제 노동보다 시장에서의 가치 변형과 가격 변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상황에서 감옥, 병영, 학교, 병원, 가정과 같은 훈육장치들은 형질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감옥으로 대표되는 ‘훈육’ 메커니즘을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 메커니즘은 시장을 모델로 한다. 시장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시장은 주권이나 훈육권력과는 다른 형태의 지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권력 장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욕망과 경쟁, 상호 모방과 심리적 전염에 의해 재화의 가치가 결정되고 자원이 배분되는 시장의 원리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권력 모델이 되고 있다. 푸코는 그것을 ‘안보’(security) 메커니즘이라 불렀다. 안보 메커니즘의 주된 특징은 사람들을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경쟁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이다. 그때 정상성은 훈육기제처럼 욕망의 억제와 규범의 강제가 아니라, 욕망과 경쟁의 자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논리다. 안보 메커니즘이 추구하는 정상성은 통계적인 정상성, 즉 정상분포곡선의 유지이다. 정상분포곡선의 양쪽 극단,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부분은 정상성의 구성요소이지 제거 대상이 아니다. 안보 메커니즘은 주권적 안보(영토와 인민의 총체적 안보)가 아니라 보험(security)의 안보를 지향한다. 보험 제도가 사망, 질병, 사고를 근절하거나 예방하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성도 커지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안보 메커니즘은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요소를 정상적 순환의 구성요소로 취급한다.

훈육 없는 감시장치

훈육이 아니라 안보가 전략적 목표가 되는 순간 훈육에 따르는 책임은 방기되고, 훈육 없는 감시장치는 통계적 정상성의 위험요소를 감시하는 통제장치로 바뀐다. 안보 메커니즘의 ‘내버려 두기’는 말이 좋아 ‘자유화’이지 실제로는 ‘추방’의 형태로 이뤄진다. 개별적 정상화의 포기는 무수한 대중들을 빈곤과 불안과 폭력의 위험지대로 내몬다. 오늘날 사법 장치는 법이 지닌 추방의 힘을 통해 이런 대중적 추방에 기여한다. 법은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역을 한정함으로써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예외지대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오늘날 사법의 처벌 권력은 명시적으로 정해진 금지 행위보다는 제한된 정상분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 일반을 겨냥한다. 대표적인 주권기관인 군대와 경찰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공동의 목표 하에 시장의 정상적 순환을 위협하는 일체의 위험한 흐름들을 박멸하는 포괄적 안보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영화 <크레이지>가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 국가는 (자기가 생산한) ‘테러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개별적인 정상성은 고려치 않고 통계적인 리스크 계산에 따라 광역적 소개(폭격)를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용산참사에서 개발자본의 순환을 위협하는 세입자들의 저항을 도심 테러로 규정하고 대테러 작전을 수행한 것은 그것이 영화만의 일이 아님을 증명한다.

푸코가 안보사회(society of security)라고 불렀던 것을 들뢰즈는 ‘통제사회’라고 부른다. 훈육사회를 대체해가고 있는 통제사회는 ‘빅브라더’나 ‘판옵티콘’처럼 폐쇄된 공간에서의 규범적 통제가 이뤄지는 사회가 아니다. 오늘날의 통제(control) 장치는 공간적 폐쇄성과 규범적 폐쇄성을 해체하면서 작동한다. 마치 지표면을 미끄러지는 뱀과 같이 그것은 개방된 공간으로 유출된 흐름들을 사냥한다. 그 흐름은 사람의 흐름이기도 하고 상품의 흐름이기도 하며 정보의 흐름이기도 하고 여론의 흐름이기도 하다. 뱀이 지표면을 기어 다니듯이 오늘날의 통제 권력은 삶의 심층이 아니라 표면에서의 흐름을 관리한다. 그 표면을 형성하는 것이 컴퓨터와 정보기기, 대중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기계들이다. 통제장치는 그런 전자 통신 기계를 통해 정보화되고, 데이터화되고 이미지화된 흐름들을 식별하고 통제하고 처벌한다. 하이패스 통행 장치가 잘 보여주듯이 오늘날의 통제장치들은 등록된 흐름과 미등록된 흐름을 감시, 식별하여 등록된 흐름은 차단하고 등록된 흐름은 가속시킨다. 이런 통제장치는 등록된 소통 망에 대해서는 대단한 식별, 통제 능력을 발휘하지만 등록 표면의 지하에서 돌아다니다가 지표면으로 뚫고 나오는 두더지에 대해서는 무능하다. 사회체제의 실재적 위험은 바로 이런 두더지 같은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통제사회에 구멍을 내는 두더지

들뢰즈는 진행 중인 통제사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희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저 새로운 무기를 찾을 일이다. 대중적 추방과 대중적 감시, 통제에 저항하는 방법은 새로워야 한다. 주권사회의 권위기제에 대한 ‘투명한 소통’이나 훈육사회의 역학기계에 대한 태업과 같은 형태는 효력이 없다. 들뢰즈는 통제장치의 위험은 전파장애나 해적행위, 혹은 바이러스 유입과 같은 형태로 발생한다고 한다. <예스맨 프로젝트>처럼 식별(identification) 장치를 역이용하여 지배 권력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것도 수동적인 위험이 될 것이다. 식별, 추방, 상품화가 일어나는 소통 회로를 교란하는 바이러스와 노이즈의 유포가 어떤 것이 될지 생각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 자신이 안보-통제장치의 확산 속에서 갈수록 탈-실체화되어가는 삶의 심층을 탐사하는 두더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발찌를 비롯한 일체의 식별, 감시, 통제장치를 반대한다. 그것은 두더지를 지표면으로 끌어내어 뱀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 미끼이기 때문이다.

– 박정수 (수유너머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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