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트랙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트랙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느린걸음

누군가 거대한 탑에서 돌멩이 하나를 빼낸다. 탑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너무 나대는 것 같아요.”

1학년 남학생반 수업시간이었다. 국어시간에 대안교육 잡지 <민들레>에 실린 김예슬 선언을 읽어주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묻는 질문에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아이의 표정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해 보였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자신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유는 대학 진학을 위해서이다. 그 길을 향해 아이는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김예슬은 그 아이가 가고자 하는 곳에 이미 도달한 사람이다. 그것도 남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곳에 이미 도달한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들만이 누리는 여유가 아닐까? 내가 보기에 이 아이의 표정에는 이런 감정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작년 겨울, 울산에서 김규항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풍경’ 아이들을 데리고 강연회에 참석했다. 김규항 선생은 그 자리에 참석한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조차도 ‘의식있는 명문대생’을 키우려고 하는 게 아니냐고 날카롭게 비판하셨다. 기존의 교육관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 스스로가 새로운 교육에 대한 상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뜻있는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강연을 듣던 ‘풍경’ 아이들 중 학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책을 가슴으로 읽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은, 실천하는 지식인이 될 것 같다는 칭찬을 듣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의 표정이 강연 시간 내내 불편해 보였다. 강연이 끝난 후 이 아이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강연은 사실 집중이 안 되었어요. 다른 강연보다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강연을 듣는 시간동안 느낀 것은 ‘불편함’이었다. 김규항 선생의 날카로운 언어들이 내리친 것은 이 아이 자신의 머리 위였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학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자신이 그리는 앞으로의 모습은 부모님의 기대, 선생님들의 기대, 아이들 대부분의 기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갖고……. 그래서 김규항 선생이 비판하는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강연 듣는 내내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집중이 안 되었다고 하더니 너, 이번 강연 제대로 들었구나.”

몇 년 전 졸업한 한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자기가 원하던 학교보다 성적이 조금 낮은 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을 했다. 3월 어느 날, 이 아이가 갑자기 전화를 했다. 재수를 하기 위해 자퇴를 했단다. 휴학하려다가 절차가 복잡해서 자퇴를 했다고 했다. 엉뚱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바로 학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길래 그날 밤에 만났다. 갑자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었다.

“저는 대학에 학문을 하러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공부를 안 해요. 오로지 공무원 시험 이야기만 하고 도서실에 가도 공무원 시험 관련 책들만 놓여있어요. 뒷풀이 모임에서 선배도, 후배도 공무원 시험 이야기만 해요. 숨이 너무 막혔어요. 혹시 제가 원하는 학교에 가면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학문을 하고 싶어요.”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20대를 ‘88만원 세대’로 이름 붙이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을 향해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자고 당당하게 소리친다. 그녀는 대학과 국가와 시장이라는 거대한 적들을 향해 과감하게 문제 제기하며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적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거짓 희망에 맞서 진실을 밝혀 나갈 것이고 더 이상 놀이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지 않겠다는 인간 선언을 한다.

처음 김예슬 선언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선언문을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 교사인 ‘나’ 자신은 김예슬이 이야기하고 있는 트랙 바깥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문학의 중요성을 조금씩 깨닫고 있고, 아이들에게 대학입시를 위해 달려가는 길 바깥에 다양한 길이 있음을 가끔씩 들려주는 교사였다. 그리고 내신 성적, 모의고사 성적이라는 잣대로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는 교사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예슬의 글을 읽으면서 서서히 내가 서있는 자리가 ‘아프게’ 보였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트랙을 열심히 달리는 아이를 향해, 트랙 밖으로 달려 나가는 아이들을 향해……. 그런데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고 서있는 자리는 ‘트랙 위’였다. 트랙의 한가운데는 아닐지라도 결국 ‘트랙 위’였다. 아이들이 다양한 책을 읽으며 좀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랐지만 이를 통해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를 함께 바랐다. 수업시간에 다른 가치, 다른 삶을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끼며 자기 검열을 하곤 했다. 김규항 선생의 날카로운 언어들도, 김예슬의 눈물어린 선언도 결국 거대한 탑을 아래서부터 지탱하고 있는 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 발을 내닫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예슬 선언 중에서>

얼마 전 서울에 다녀왔다. 독서교육 자료집을 만들기 위한 회의가 있었고 그 회의를 하는 장소가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하신 집이었다. 그래서 최근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제자에게 연락을 해서 함께 갔다. 이 아이는 졸업한 후 해마다 연말이면 나를 만나러 왔다.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러워서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서로 한 해 동안 열심히 생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아이는 얼마 전 전역을 했고, 다니던 대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실내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 힘들게 재수를 해서 진학한 학교였고 디자인 분야에서 누구나 높이 평가하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실내 디자인보다 건축분야에 관심이 갔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이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퇴를 했고 그 후 혼자 철학 책을 읽으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아이도 자퇴를 결정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부모님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부모님을 설득했다고 했다. 그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문자를 보냈었다.

‘너에게는 세상이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라는 좁은 틀에 너를 가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잘 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 아이가 6월 중순이 되면 울산으로 내려와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철학 동영상 강의도 듣고 여러 책도 읽으며 공부를 계속 할 거라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모임을 소개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으면 모임하는 날 오라고 했다. 아이는 무척 기뻐했다. 울산으로 내려가면 공부할 길이 없을 것 같았는데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글도 쓰고 싶다며 자신이 쓴 글을 봐 달라는 부탁도 했다.

누군가 거대한 탑에서 돌멩이 하나를 빼낸다. 탑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된다. 그 모습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트랙 위에서…….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뼈아프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했으니 이제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 시험 성적 때문에 우울해 하는 아이를 보며 시험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위로해 주는 교사가 아니라 시험 성적과는 무관한,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트랙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아이에게 안쓰러움에서 나오는 따뜻한 위로를 보내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는 용기에 진정으로 박수를 칠 수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풍경지기 박혜숙

응답 2개

  1. 조르바말하길

    트랙 바깥..왠지 이 단어가 입에 걸립니다. 예슬씨 글을 읽고 있으면 트랙 바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절실해져도 저 바깥에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참 먹먹했었어요. 어쩌면 너무 힘주고 주눅드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2. sros23말하길

    깨달음의 말씀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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