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동심을 일깨우는 詩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동심을 일깨우는 詩들
– <나무 속의 자동차> 오규원 동시집 / 오정택 그림 / 문학과지성사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동네엔 헌책방이 많았다. 가난했지만 정이 넘치던, 그 동네엔 유난히 책에 목숨 건 이들이 많았다. 동네 끝에 위치한 조그만 복지관에선 매주 독서 토론 모임이 열렸다. 노동자, 시인 지망생, 헌책방 주인, 앳된 직장 여성, 늙수레한 아저씨 등이 오래된 난로가 품어내는 온기에 의지해 머리를 맞대고 조잘거리곤 했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만난 곳도, 박노해를 깊이 읽게 된 것도 그 곳을 통해서였다.

내 기억 속의 그 곳은 궁핍했지만 늘 소란스러웠다. 모임이 끝나면 우르르 중국집으로 몰려가 짜장면으로 배를 채우고, 아주 가끔 동네 뒷산에 오르며 몸을 단련하고, 두 달에 한번 꼴로 가리방을 밀어 소식지를 만들고, 일 년에 한번쯤 회원들 작품을 묶어 동인지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지만……. 사람들이 품고 온 갖가지 사연과, 낡은 책에서 폴폴 떨어지던 먼지와, 낯익은 얼굴들이 있어 그 곳은 늘 다복했다. 식구처럼 지내던 지인들 중 몇몇은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작가로 데뷔를 했고, 몇몇은 아직도 문학청년과 문학소녀 흉내를 내며 서성이기도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그곳은 ‘책’을 향한 짝사랑을 키워준 고마운 등대요, 내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그리운 보금자리다.

그 무렵이었다. 어느 겨울 저녁 선배 손에 이끌려 간 헌 책방에서 오규원을 처음 만났다. 선배가 골라준 낡은 시집 속에서 유독 내 맘을 잡아끈 건 <한 잎의 여자>라는 시였다.

‘물푸레 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

그날 밤, 난 식물성의 이미지를 가진 순백의 그녀, ‘한 잎의 여자’에 홀딱 빠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빠졌던 건 내게 시집을 건네주던 선배였는지도 모르겠다. 곱슬머리, 멀대같은 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걸려오던 어눌하지만 따뜻하던 전화 속 목소리, 그가 붙여주던 애칭 seven. 그 후로도 오래도록 지치고 힘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 ‘한 잎의 여자’를 호명하곤 했으니까.

모처럼 도서관에 갔다가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를 만났다. 오규원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불현듯 ‘한 잎의 여자’가 떠올랐고, 그러자 또 왼쪽 갈비뼈가 있는 부분이 시큰거렸다. 아마도 내게 ‘오규원’이란 시인은, 아니 ‘한 잎의 여자’라는 시는 아련한 그리움 내지 따뜻한 슬픔으로 각인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나무 속의 자동차>를 읽는 내내 설레고 행복했다.

일요일 아침

감나무 잎과
잎 사이로
늦잠을 자는
들새의 가느다란 목이
지나가는 바람에
약간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다

댓돌에는
오른쪽 신발과
왼쪽 신발이
제멋대로
누워 있고

책상 위의
책갈피 속에서는
글자들이
반쯤 눈을 뜬 채
잠들어 있다

일요일 아침 풍경을 잘 그려낸 시다. 눈을 감으면 약간은 장난스러운 한 편의 그림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시인은 능청스럽게 그 안에 자기 목소리를 담아낸다. 일탈과 자유로움을 꿈꾸는 마음을 ‘삐딱하게. 제멋대로’라는 표현에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약간, 반쯤’이라는 어휘를 통해 온전한 일탈을 꿈꿀 수 없는 서글픔도 슬쩍 흘린다.

국화와 감나무와 탱자나무

국화와
감나무는
서로
무슨 약속을 했나

국화가
한 송이 방긋 하고
벌어지니

감나무의
감에서
뭉클 하고
단내가 난다

감나무와
탱자나무는

무슨 약속을 했나

감이 빨갛게
익으니
탱자는 노랗게
익는다

국화꽃이 피는 것, 감과 탱자가 익는 일상도 시인의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나 보다. 시인은 각기 다른 이 세 가지 상황을 ‘관계’라는 코드로 묶는다. ‘약속’이라는 단어를 통해,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개체의 삶이, 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속은 믿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지켜야한다는 의무가 뒤따르는 행위다. 그러니 이 시는 가을 한 풍경을 보여주되, 공동체의 윤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국화꽃이 피는 모습을 ‘방긋’이라고 시각적으로, 감이 익는 모습을 ‘뭉클’ 단내가 난다며 후각적으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방긋’은 웃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뭉클’은 감정이 복받치어 가슴이 꽉 차는 느낌을 준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전이’라는 용어를 쓴다. 전이는 결합, 라포르(rapport, 상호소통관계)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융은 전이의 핵심이 ‘이웃과의 관계 지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감응과 변용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이 부분은 이렇게 풀어볼 수도 있으리라.

누군가(국화꽃)의 웃음에 감응을 받아 내(감나무) 감정이 고양되고 촉발된다. 그 힘으로 빨갛게 변용된 나(감나무)는 또 누군가 다른 이(탱자나무)를 노랗게 변용시킨다.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촉발되고, 누군가를 촉발할 수 있는 생명력. 한 편의 시가 담고 있는 오묘한 생의 이치라니! “시인은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는 자”라는 장석주의 말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봄날의 산

철쭉의 몽우리가
톡 톡
터질 때마다
산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산 속의
골짝 물도
산에 사는
다람쥐의
볼도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구경 다니는
다람쥐 때문에
숲속에는
길이
자꾸 생기고

‘나비효과’라는 말을 많이 쓰는 데, 이 시가 딱 그렇다. 철쭉의 몽우리가 터지니 산이 조금씩 붉어진다. 산이 붉어지니, 골짝에 있는 물도 붉어지고, 산에 사는 다람쥐의 볼도 붉어진다. 산에 사는 온 식구가 변한다. 그런데‘산’만 변한 게 아니다. ‘길’까지 만들어낸다. 누군가 찾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

봄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꽁꽁 얼었던 땅을 녹이고,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고.

그런데 실은 봄이 그런 게 아니다. 툭툭 터지는 철쭉의 몽우리가 온 산에 봄을 불러낸 것이다. 작은 개체 하나 하나가 세상을 바꾼 것.

그러고 보면 전복적 상상력이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익숙한 시선을 뒤집는 것, 그게 바로 전복적 상상력이다. 그러니 이 시에‘전복적 상상력’이라는 용어를 붙인들 어떠하랴?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 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 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 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 가는 일이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가장 귀한 금이 무엇인지 아냐고? 어벙하게 웃었더니 순금도 아니고, 황금도 아니고. ‘지금’이란다. 바로 지금.

‘오늘’을 잘 사는 것이 내일을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어제를 잘 살았노라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오늘을 우리는 쉽게 지나친다. 너무 바빠서, 너무 지쳐서, 너무 슬퍼서 자꾸자꾸 흘려버린다.

이 시는 차근차근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이란 ‘씨앗을 씨방에 보관’하듯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바람’을 내려놓듯 붕 떠 있는 마음을 내려놓은 일이기도 하고, ‘밤에 볼 꿈을 새벽 2시에 놓아’ 두듯 내일 할 일을 채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을을 가을 텃밭에 묻어두’거나 ‘구름을 하늘 높이 올려놓는 것’처럼 무언가를 제 자리로 돌려보내는 일이기도 하고, ‘몇 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 놓는’ 것처럼 누군가, 무엇인가를 좌지우지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냥 관조하는 일이다.

그러니 급해도 참아야 한다. 다가올 시간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일일랑 오늘 할 일을 다 한 후에 해야 한다. 바쁘다고 성큼성큼 뛰어가는 게 아니라 ‘하루 한 걸음씩’ 가야 한다. 내 욕망에 의해 내달리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면서 조심조심 가야 한다.

읽다 보니 이 시는 생을 정리하는 단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를 정리하고, 오늘 할 일을 하면서, 조금씩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것.

‘내려놓고, 놓아두고, 묻어두고, 섭섭하지 않도록’

새털처럼 가벼워져서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

한 그루 나무에서 들리는 소리

새벽
한 그루 나무에서 들리는 소리

가지에 앉아 잠들었던
새가
가만히 감았던 눈을 뜨는 소리

잎사귀가
몸을
앞과 옆으로 뒤치는 소리

그 나무의 하얀 뿌리가
뻗어 있는 땅굴 속에서

어린 들쥐가 한쪽 발을 핥으며
부시시 눈을 뜨는 소리
다시 눈을 감는 소리

그리고
겨우내 나뭇가지에 쌓였던
흰 눈이
돌아눕다가 미끄러져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

그렇게 오늘을 살다 보면 ‘나무’ 하나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까? 온갖 것을 내려놓았을 때, 외려 모든 감각이 열리지 않을까?

잎사귀로 대변되는 내 몸의 움직임은 물론, 나와 연결되어 있던 새와 흰 눈의 움직임, 나와는 동떨어진 땅굴 속 어린 들쥐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온 몸으로 느끼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 옆으로 뒤치는 복잡한 잎사귀의 심사며, 아차 하는 사이에 미끄러져 떨어진 흰 눈의 얄궂은 신세며, 어미를 기다리느라 쉬 잠들지 못하고 한쪽 발을 핥으며 눈을 감았다 뜨는 들쥐의 허전함까지 내 맘에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말할 줄 아는 이다. 같은 체험을 하고도, 다르게 드러낼 줄 아는 이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여기던 것들을 끌어와 홀라당 뒤집을 줄 아는 이다. 그래 놓고는 “너, 이거 몰랐지?”라면서 능청을 떠는 이다. 장석주는 해서 시인을 “은폐된 후경, 그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이라고 명명한다.

오규원의 시들이 딱 그렇다. 童詩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그는 童心을 노래하지 않는다. 자신의 詩性을 드러낸다.

그에게 “동시는 그냥 시다.”

동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를 가장 풍요롭게 하는 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동심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그의 진술조차 능청일지도 모르겠다. 오규원이야말로 동심을 적확히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다.

동심이 단순하게 어린 아이의 마음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私見이나 기존의 가치에 물들지 않은 근원적인 마음, 보다 높은 차원의 경지를 말한다는 걸.

동심이야말로 바로 老莊에서 말하는 도를 통한 자, 지인의 마음이라는 걸.

니체가 말하는 삶의 모든 모순을 조건 없이 긍정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삶을 놀이처럼 즐기는 자, ‘위버멘쉬(초인)’의 마음이라는 걸.

이지가 말했듯 지식과 허위, 편견을 경계하고, 성찰과 실천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마음이라는 걸 오규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심이야말로 자기 성찰과 실천을 포함한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며, 참된 인간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삶의 윤리라는 것을.

– 달맞이

응답 4개

  1. 뺑덕어멈말하길

    달맞이 님의 글, 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누구신지 궁금하고, 언제 기회가 되면 뵙고 싶네요.

    • 달맞이말하길

      뺑덕어멈님, 감사합니다.
      늘 주제가 강한 것만 잡는 것 같아 고민인데,
      ‘즐겁다’는 말에 용기가 생기네요.
      저도 누구실까? 궁금합니다.

  2. 둥근머리말하길

    “동시는 그냥 시다”라는 진술에서, 그리고 그 진술을 곡진하게 읽어내는 선생님 글귀에서 어슴푸레한 길찾기를 하고갑니다. 고맙습니다.

    • 달맞이말하길

      둥근머리 샘, 기운내길!
      어슴푸레한 길이 진짜 길일지 모르니까.
      확실하다고 단언하는 순간 삑사리 난다우.
      며칠 아프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
      내가 가고 있는 길, 내가 믿고 있는 길이 진짜인가.
      의심이 병인 듯도 싶지만, 때로는 의심이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기도 하는 걸 보면
      산다는 게 참 답이 없는 것 같으이.
      동시와 시 사이, 동심과 시심 사이, 어린이와 어른 사이, 교육과 문학 사이…
      요즘 그런 고민에 빠져 있다우.
      단언하려고 하는 건 내 고민을 덜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오독도 하나의 해석이라고 위안하면서.
      다시 한번 홧팅! 둥근머리.
      나야말로 고맙수. 기운 줘서.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