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어느 편인가?

- 김융희

어느 편인가?

전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법 혼잡한 여섯 번째 쯤 칸에 탔다.
어지간히 혼잡한데도 앞 칸에서 계속 승객들이 건너오고 있다.
문이 열리면 아주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지독한 악취가
찬 공기와 함께 몰려와 숨쉬기 조차 고통스럽다. 그 때마다 빨리
문을 닫으라고 여기 저기서 고함이다. 영문 모른 나는 어리둥절이다.

앞 칸의 홈리스 같은 남루한 차림의 옷에서 오줌, 땀에 찌린 냄새가
지독하여 승객들이 악취를 피해 계속 건너오고 있는 것이다.
잠깐 문이 열릴 때마다 여기 저기서 불평의 소리가 소란스럽다.

갑자기 큰 목소리가 장내를 제압한다. 어딘가에 빨리 조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전화의 목소리이다. 계속 전철은 달리고, 새로운 손님들이
건너온 것도 여전하다. 다시 전화를 했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번엔
요청이 아니라 아주 강경한 목소리로 고객 보호를 외면한다며 호통이다.

어데다 요청한지는 모르겠으나 곧 열차가 멈추고 앞 칸에 범인은
쫒겨 내릴 것 같은 숨막히는 긴장이 흐르는 순간이다.
조용한 장내에 또 새로운 상황이 연출된다. 항의하며 다그친 전화소리에
불평의 소리이다. 이런 것쯤은 참아 넘길 일이지, 손님을 끌어 내리기 위해
달리는 전철을 멈추게 하는 것은, 옳치 않는 일이요, 지나침이라는 것이다.
불우 이웃에 대한 사회적 배려도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금방이라도 멈추어야 할 전철은 계속 달리고 있으며, 양 편의 설전은 계속된다.
참으며 옹호해야 할 일이 따로 있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도 그러려니와,
외국인도 타고 있는 수도 서울의 전철이 수치라는 애국론까지 펼치며 결코
굽히지 않는 통화자와, 불우한 이웃도 함께 어우르며 살아야 한다는 동정론의
시비는 점점 대중속으로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멈춰서 해결해야 한다,
아니,바쁜 사람을 생각해 그냥 빨리 가야 한다. 여기 저기서 한 마디씩이다.

물론 모두가 의사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편의 엇갈린 의견의
차이에 대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행히 아무런 일 없이 전철은 달렸고, 나는
목적지에 무사히 내렸다. 약속시간이 임박해, 나는 행여 그 불우 승객을 끌어
내리기 위해 전철이 멈출까 안달이며, 마음은 제발 동정론의 승리를 기원했었다.

양쪽의 의견에 다 함께 일리는 있다. 잘못은 시정돼야 하고 악취는 없어야
한다. 불우한 이웃도 이해하며 함께 해야 한다. 내 이웃 모두 향기가 진동하며
좋은 이웃이었음 좋겠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어찌 좋은 일만 있길 바라겠는가.
우리 삶의 일상은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면서 살아야 한다.

두 의견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 진다. 분명한 것은, 의견들에 대한 관심 보다는
나의 약속 시간이 절실했고, 그래서 빨리 가는 것만을 나는 바랬던 것이다.
“상황에 대한 대처의식”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지 안았을까 생각된다.
자기가 좋으면 옳다 하고 싫으면 그르다고 하는 자기 본위의 님비의식.
공정한 판단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이기적 선택이 우리의 대세가 아닐까?
오늘 전철에서 있었던 일, 내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남을 배려하며 참는 미덕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오래전 60년대 일이 문득 떠오른다. 남대문 시장 식당집 가정교사로 있던
때이다. 주인집 생일 잔치로 삼사십 명이 초대되어 한창 회식중이었다.
그 장소에 걸인이 나타났다. 대소사 잔치집을 꼭 찿는 시장을 무대로 기거하는
낯 익은 걸인이다. 재빨리 누군가 돈을 꺼내며 제발 정신 차려 일하며 살라고
훈계를 한다. 월남인들의 체면도 생각하라는 책망이다. 얼마의 돈을 주면서
쫏아 보내 체면을 모면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결코 지나치지 않는 말로써
정신 차리라는 덕담 정도였다. 몇 사람은 동조하는 기색도 느껴젔었다.

당시 시장 상권을 월남 피난민이 쥐고 있었으며 그 거지도 월남인이었다.
생일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도 대부분이 이북이 고향인 월남인 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못 마땅한 듯 일어서서 언성을 높인다.
무슨 체면은 체면인가! 고생하며 월남해 함께 살면서, 누가 저 어려운 친구를
관심을 갖고 보살펴 돌봐 준 사람이 그동안 우리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이 자리에서 따뜻한 밥이라도 함께하면서, 체면 보다는 더 반성하며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갖고 보살피자는 내용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실향민으로
밥 먹고 사는 많은 우리가 저 불우한 동료 하나를 못 거둔다면 도리가 아니라는
그 상인의 말이, 나의 마음에 감동으로 받아 들여졌고, 역경을 살아온 월남인의
의리와 단결력을 부러워 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렇다.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래가 있던가?
높고 유리한 자, 더 여유가 있고 할 수 있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웃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의무이며 인간으로써의 도리이다. 흔히들 거지를 도우면 거지를 지키는
일이라며 도와주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배품은 마음의 울림으로
따지고 셈하는 의지와 구별되야 할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내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악취를 풍기며 전철을 타고 있는 저 승객도 인간으로써
대할려는 배려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 불우 승객을 끄러 내려야
하는가, 악취를 참고 견디며 함께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인가?

– 김융희

응답 1개

  1. 쿠카라차말하길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 승객이 불우해서, 나보다 약한 자라서 동정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냥 꾹 참아야 한다는 쪽입니다.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도 나랑 똑같은 지하철 승객이고, 나도 그처럼 누군가에겐 참지못할 냄새와 취향과 이념을 풍기고 있을 테니까 말이죠. 적어도 그 승객에게는 ‘촛불시위에 대해 아직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누군가처럼 도덕적 부패의 냄새는 안 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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