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혁명가의 초상, 한 혁명의 풍경(트로츠키의 집과 팔라시오 나쇼날, 멕시코)
트로츠키, 삶의 마지막 장소
프리다 칼로의 화폭에는 트로츠키(Leon Trotsky)의 초상화가 그리다 만 상태로 남겨져 있다. 러시아혁명의 이 위대하고 불행한 혁명가를 프리다 칼로는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트로츠키 생애의 마지막 시기는 추방과 망명의 연속이었다. 그는 1929년 2월 소련에서 추방된 이래 이스탄불에서 4년, 프랑스에서 2년, 노르웨이에서 2년을 보냈다. 그리고 1937년 1월 당시 멕시코 대통령 라자로 카르데나스(Lazaro Cardenas)가 발급한 비자로 노르웨이를 떠나 이곳 코요아칸에 왔다. 이 이국땅이 트로츠키의 마지막 거처였다. 그리고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는 망명 온 트로츠키 부부에게 자기 집의 일부를 내어주었다.
트로츠키가 코요아칸에서 망명하고 있는 동안 그의 가족과 동지들은 한 명씩 스탈린의 손에 목숨을 잃고 있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1937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작재판에서 둘째 아들 세르게이와 조카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2월, 첫째 아들 세도바가 파리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위장한 스탈린의 첩자에 의해 독살당하고, 형 알렉산더 브론스타인은 모스크바에서 처형당했다. 이듬해 3월, 다시 조작재판이 열려 혁명의 동지 부하린, 류코프, 야고다가 처형당하고, 보르쿠타(Vorkuta)의 정치범 강제수용소에 유형되었던 트로츠키주의자 수천 명이 집단학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어를 선택해야 할까. 이 시기 트로츠키는 잠시 프리다 칼로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 프리다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영웅과 연애를 즐겼으며, 노정객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애정고백적인 자화상을 선물하기도 했다. 둘의 관계가 장난기와 바람기 섞인 것이었는지, 묵직한 혁명의 토론을 주고받던 사이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디에고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트로츠키는 1939년 그 집에서 나와 비에나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아마 프리다와 나눈 것이 사랑이었다면, 그것은 트로츠키 생애의 마지막 애정행각이었겠다.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 집에서 나온 이듬해 트로츠키는 살해당한다. 트로츠키의 집에 가보면 벽에 구멍들이 보인다. 1940년 5월 24일 스탈린의 비밀경찰(GPU)이 트로츠키 부부가 잠자고 있던 침실에 200발이 넘는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다행히 트로츠키 부부는 구석진 곳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석 달 후인 8월 20일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Ramon Mercader)가 밤중에 집으로 잠입해 서재에 있던 트로츠키의 머리를 등산용 도끼로 내리찍었고 트로츠키는 이튿날 사망했다. “머리를 짓뭉개 죽이라”는 스탈린의 지령에 충실한 결과였다.
트로츠키는 즉사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을 잃지 않고 암살자를 향해 총을 발사하는 경비원들을 제지했다. 배후를 알아내려면 암살자를 살려둬야 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다음날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사실 그는 암살을 예감하고 있었을 테며, 자신이 죽는다면 누구의 지령인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트로츠키의 책상에는 <스탈린의 생애(La vie de Staline)> 불어판이 놓여 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이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저작은 사후에 복수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프리다 칼로는 유언을 남길 수 있었지만, 갑자기 살해당한 트로츠키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트로츠키의 경우에는 그해 그가 써둔 일기가 유언장으로 알려져 있다.
의식을 깨우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왔다.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러저러한 실수들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지만,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금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가로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으로 들어온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기를!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집에 걸려있는 여러 사진 가운데 한 장이 눈에 띠었다. 사진 속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은 체스를 두고 있고, 레닌은 하품을 하고 있다.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고 하품하는 존재이다. 스탈린의 압제에 맞서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한 위대한 정신은 이곳에서 한 여성과의 사랑에 빠졌다. 그 두 가지 사실은 모순이 아니며 흠도 아니다. 코요아칸에서 트로츠키가 봤던 그 푸른 하늘을 본다면, 그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디에고 리베라, 벽화와 역사
하지만 이런 줄거리는 배경으로 밀려난 한 남자에게 공평치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디에고 리베라다. 파란집에서 디에고는 프리다 칼로의 마음의 풍경을 헤아릴 때 하나의 진입로처럼 여겨졌다. 팔라시오 나쇼날에 가보고 나서야 그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북페어가 열린다는 말에 소칼로에 나갔다. 광장에 진열된 수많은 책들은 의미의 천국이었지만 까막눈인 내게는 거대한 안타까움이었다. 68년 40주년이 되는 해라서 68혁명과 관련된 특집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알 수 있었다. 읽지 못할 책이지만, 괜히 꺼내서 만지작거리며 종이 촉감도 느껴보고 책냄새도 맡아보았다. 맘에 드는 화보집과 사진첩이 있었지만 무거워서 가져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옥타비오 파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으니 사둘까 싶었지만, 한국에서 그의 어떤 저작이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지를 몰랐다. 그래서 결국 연구실과 알고 있는 출판사에 선물할 생각으로 사파티스타와 그들의 공동체 모습이 그려진 달력과 그림 두 점을 샀다(신기하게도 반년 지나 한국에서 만난 한 멕시코의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같은 그림을 선물 받았다). 북페어만이 소칼로에 나온 목적은 아니었다. 팔라시오 나쇼날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니? 누구들이었어? 아무도 아니었어. 다음날 아무도 없었네.
그 광장에는 동이 터 올랐다.
더렵혀진 채.
신문들은 첫 면은 기상예보로 채웠고,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의 프로그램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떤 보도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단 1분 동안의 묵념도 없었다.
그렇게 잔치는 계속 되었다.
팔라시오 나쇼날의 벽화에 관해서는 전부터 듣고 있었다. 벽화의 규모하며, 특히 벽화에 멕시코의 과거문명과 독립투쟁이 묘사되어 있다는 말에, 그런 벽화가 한국의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에 그려질 수 있을까라며 막연한 동경을 품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놓치고 있었다. 제작년 우남대학 도서관 외벽에 선인장처럼 건강하고 높게 솟구친 벽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디에고 리베라라는 존재는 의식하지 못했다.(사진: 우남대학)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팔라시오 나쇼날을 찾았지만, 벽화에 담긴 인물 군상이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어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벽화에는 빼곡하게 역사적 인물들이 새겨져 있지만, 멕시코 역사의 내력을 모르는 내게 그 벽화의 입체감이 잡힐 리 없었다. 어디를 응시해야 할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소박한 진실을 확인했다.



프리다의 그림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눈동자는 물감덩어리를 이겨 발랐을 뿐인데 슬픔과 행복을 함께 간직하여 무언가 긴 이야기가 걸어 나온다. 강렬한데도 고요하다. 디에고의 벽화는 그 규모가 역사의 무거움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를 감싸 안으며 압도하는 이 그림에 발길이 얼어붙는다. 그 그림으로 디에고라는 인간의 노력과 그 그림 안에 묘사된 인간들의 노력이 응축된 현장에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자세히 살펴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벽화는 세 면으로 구성되었다. 오른쪽 선주민의 패널에는 피라미드 정상에 황제가 앉아 있고, 그 위로 뒤집힌 태양이 떠있다. 가운데 벽에는 스페인의 침략과 멕시코의 독립, 그리고 혼혈의 역사가 묘사되어 있다. 왼쪽에는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와 선주민의 태양을 대신하여 낫과 망치가 역사의 정점을 알리고 있다. 가이드의 차분한 설명을 따라가자 뭉뚱그려 있던 벽화는 한 부분씩 돌출되어 나왔으며, 구체적인 역사적 장면과 함께 그간의 여행길에서 마음에 남아있던 인물들이 눈앞으로 한 명씩 등장했다.
아즈테카의 마지막 황제 목테수마, 정복자 코르테스, 메스티조의 어머니 말린체, 라스 카사스 신부, 초대 황제 이투르비데, “토지와 자유”라고 외친 혁명가 사파타, 개혁법안을 내놓은 베니토 후아레스 전대통령, 독립의 초석을 닦은 이달고 신부, 프리다 칼로와 여동생 크리스티나 칼로, 그리고 마르크스까지.
디에고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햄과 같다. 민중을 살찌우니까.” 디에고에게 벽화는 문맹률이 높은 멕시코 민중에게 가장 쉽게 멕시코의 역사를 전달할 수 있는 교육수단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116점의 벽화에 멕시코의 역사를 담았다. 그는 벽화작업에 나서기 전에 유럽 유학을 다녀왔고, 그의 벽화는 비잔틴 모자이크와 르네상스 프레스코화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평가이다. 하지만 벽화를 미술의 한 가지 장르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내게 디에고의 벽화는 차라리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벽화에서 연원하는 듯이 보였다.
한 혁명의 풍경
벽화는 거리로 나온 그림이다. 그림이 거리로 나와야 하는 까닭은 캠퍼스가 없어서 일수도 있고, 사람들의 눈에 쉽게 밟히는 장소에 있어야 그 그림은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벽은 원래 단절이다. 이곳으로 넘어올 수 없다는 공간적인 금을 뜻한다. 하지만 벽화는 벽들에 들러붙어 스멀스멀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거리의 벽화들은 디에고의 것 마냥 규모와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저마다 소소한 역사를 수놓고 있었다.
디에고는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프리다 역시 공산당에 입당한 적이 있다. 그들의 작품 중 극히 일부만을 엿보았을 뿐이지만, 그들이 파란집에서 혁명을 두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아마도 그들에게 혁명이란 도식이 아니며, 미래에 있을 어떤 사회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림에 원시적인 그래서 민중적인 영감과 색감을 담았다. 그들에게 혁명은 현실을 극복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실감만으로는 회고조의 정서만을 가지고서는 혁명을 낳지 못한다. 혁명은 과거와 현재를,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시켜 새로운 것을 낳는다.
디에고의 벽화에서 현대성은 원시성과, 프리다의 자화상에서 정상성은 광기와 만난다. 그들의 혁명은 변덕스럽고 하지만 성기며, 고통과 사랑과 다툼과 다정함이 거기에는 한데 머문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은 생활인 채로도 혁명을 머금고 있었을 것이다.

프리다와 디에고 - “정복자가 피정복민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강요할 때 강요된 종교적·정치적 개념을 피정복자들이 진실로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정복국가의 문화는 피정복민의 문화 위에 이질적으로 포개져 있을 뿐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대중이 공유하는 믿음과 공통의 언어로 변하지 않는 한, 사회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는 예술이나 시는 탄생하지 않는다.”(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디에고는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에 죽었다. 프리다의 죽음은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디에고는 재로나마 프리다와 영원히 결합하기 위해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멕시코 현대미술에 1,000여 점의 걸작을 남긴 공로로 시민공원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 윤여일(수유너머 R)
트로츠키의 유언적 일기 마지막 문장들 너무 좋은걸요.
혁명과 연애와 암살이라 모든 극적인 요소를 마다하지 않는 영웅적 면모랄까.
그저 대단하게만 여겨지네요.
인생은 아름다워!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기를!
오타 신고. ‘갈려있는’ -> ‘걸려있는’, 그리고 ‘선주민’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혹 ‘원주민’?
오타 신고 감사합니다^ ^)
(하지만 제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반영될지는 모르겠네요. 위클리의 웹디자이너가 지금 일이 생겨서요 – -);
선주민이라는 말, 적을 때는 항상 어렵네요.
인디오, 인디헤나 등의 표현도 있지만 둘 다 정치적 어감이 부담스럽고
원주민이란 말은 마치 땅에 매여있다는 느낌의 수동성이 강해서 선주민이라고 썼습니다.
‘원’주민은 유럽 식민자들이 오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들을 지칭하는데
‘원’이란 표현은 마치 유럽 식민자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그 지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16세기 전에 있었을 복잡한 역사과정을 생각한다면,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인가를 ‘원주민’이라고 부르기는 꺼려집니다.
‘선주민’은 먼저 살았다는 뜻인데, 이것도 문제가 많은 표현이네요.
자리를 내어주고는 역사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네요.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과테말라에서 스스로를 ‘마야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제가 알고 있던 역사의 시간이 구겨진 느낌이었습니다.
어렵네요..
아… 아이디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트위터에서 보았네요~ ^^
잘 보고 있습니다~ ^0^
“걸려있는” 오타는 수정했답니다.
ㅠ.ㅠ 어젯 밤에 이미지 편집하고 나니 2시던데…
오후 1시에 일어났어요.
그렇게 잤는데도 머리가 아프고…
인터넷을 쓰기 불편한 상황이지만 주시하고 있답니다.
수정할 것 있으면 알려주셔요~
너무 고생하세요.
바쁜 사정 알아서 연락 안했는데 알아서 고쳐주시다니.
간호 잘 하세요.
동네 주민 되었는데 한 번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