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파블로 네루다, 죽음의 장소(이슬라 네그라, 칠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파블로 네루다, 죽음의 장소(이슬라 네그라, 칠레)

죽음. 프리다와 디에고, 트로츠키는 모두 코요아칸에서 숨을 거뒀다. 하지만 내게 코요아칸은 생의 이미지로 충실하지 그다지 죽음을 떠올릴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고 할지라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죽음의 장소라는 말에는 차라리 이슬라 네그라라는 곳이 떠오른다. 그곳은 칠레에 있다.

이슬라 네그라 - 그는 이곳에서 사랑의 시를 쓰고, 피노체트가 중심이 된 쿠데타의 쓰라림 속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두 종류의 시를 썼다. 하나는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낭송하기 위한 혁명의 시. 다른 하나는 연인에게 속삭이기 위한 사랑의 시. 그는 시를 쓰는 공산당원이었으며, 1969년에는 칠레공산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에서는 좌파후보가 단일화하여, 네루다의 사상적 동반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아옌데가 당선되었다. 칠레에는 아주 짧게나마 선거를 통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이 등장했다.

칠레의 민중들은 네루다의 혁명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사랑시를 더 많이 짓기를 바랐다고 한다. 네루다는 시작에 몰두하려고 1939년부터 이슬라 네그라라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다. 당시는 네루다 말고 한 집밖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 그곳이 마을이 된 것은 네루다 때문이겠다. 그는 정치활동과 해외에 나갈 일 때문에 이곳을 자주 비워둬야 했지만, 좌파정부가 세워지고 나서 1972년에는 고즈넉한 말년을 보내고자 여기로 돌아왔다. 그는 파도에 실려 떠내려오는 나무를 보며 부인 마띨데에게 말한 적이 있다. “여보, 저기 내 책상이 오고 있소.” 그는 그 나무를 깎아 책상을 만들고 별채의 서재로 통하는 복도에 두고 거기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를 썼다. 내게는 생을 정리하는 장소가 바다이길 바라게 된 일화 가운데 한 가지이다.(네루다: “고통보다 넓은 공간은 없고 / 피 흘리는 그 고통에 견줄 만한 우주는 없다. <점點>)

하지만 네루다는 평온하게 죽지 못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대통령 관저인 모네나궁에는 폭격이 가해졌으며, 홀로 모네나궁을 사수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날 네루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평생의 꿈이 조국의 군인들에 의해 짓밟혀 더 이상 삶을 부여잡을 기력을 잃고 말았다. 지병이 있던 그는 몸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었다. 아옌데가 무너졌으니 다음은 살아있는 민중의 벗, 네루다 차례였다. 무장한 군인들이 이슬라 네그라의 집에 가택수색을 왔다. 자신의 침실로 들어온 장교에게 네루다가 말한다. “이 방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곤 단 한 가지밖에 없고.” 놀란 장교는 권총에 손을 가져가며 묻는다. “그게 무엇인가?” “시오.” 군인들은 집안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고 물러갔다.

그러나 며칠 뒤인 칠레 독립기념일의 날 9월 18일, 네루다의 병세는 위중해져 수도인 산티아고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9월 22일 병실에 찾아온 화가 네메시오 안뚜네스에게 네루다는 말했다. “이 군인이라는 자들은 지금 끔찍할 만큼 잔인하게 굴고 있지만, 조금 지나면 사람들 마음을 끌어보려고 애쓸 걸세. 착하디착한 보통사람인 양 행세하면서 말이야.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어린애들이며 노인들을 끌어안고 다독거리겠지. 집도 지어주고 과자상자도 건네주고, 훈장 같은 것도 달아주겠지. 여러 해 동안 사라지지 않고 버틸 거야. 그러는 사이 문화도 예술도 텔레비전도, 그 어느 영역에서건 범속함이 뼈 속까지 스며들겠지.” 그리고 다음 날 네루다는 혼수상태에 빠져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라는 말을 되뇌다가 눈을 감았다.

네루다와 아옌데: 피노체트의 기소를 처음 생각해낸 카스트레사나 검사는 자신에게 “왜 그런 귀찮은 일을 떠맡으려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독재를 피해 50만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무려 50만 명의 사람들이. 그때 칠레의 주스페인 영사가 배를 한 척 내주면서 ‘이 배에 태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습니다. 하지만 영사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칠레 당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죠. 그때 칠레의 보건장관이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였습니다.”

불과 2년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칠레국민을 열광시켰지만, 군부는 그의 죽음을 조상하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군인의 감시 속에서 몇몇 지인이 시신을 운반했다. 하지만 운구행렬은 점차 늘어났고, 누군가 단말마의 비장한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윽고 시립 공동묘지에 이르러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흐느낌 사이로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통곡이자 쿠데타 이후 최초의 저항의 몸짓이었다.

1992년 칠레에 민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네루다는 생전 그의 뜻대로 마띨데와 함께 이슬라 네그라의 집 앞으로 이장될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 바닷가에 갈 것이다. 아직은 몸,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덜 되어있다.

– 윤여일(수유너머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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