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칼 맑스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칼 맑스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

1. 삶의 한 유형으로서 맑스

맑스의 묘비(런던 하이게이트)

칼 맑스. 인류 역사상 이토록 많은 적과 동지를 동시에 가진 이가 있을까. 그가 죽은 지 1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한국에서 그를 읽는 것은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지만(국가보안법 위반자가 그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에게는 ‘이적표현물소지’라는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자본>이 출판되어 있고, 다른 책들도 간혹 교양필독서 목록에 오르곤 한다. 공안 검사들은 여전히 우리로부터 ‘불온한’ 맑스를 떼놓으려 하고, 교양인들은 맑스가 더 이상 ‘불온하지 않다’고, 즉 맑스로부터 ‘불온성’을 떼놓으려 한다. 우리 시대, ‘불온한 맑스’를 현재형으로 읽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일까.

나는 지금 이 글에서 맑스의 삶을, 그것도 ‘혁명적 삶의 유형’이라는 제목으로 조명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맑스의 삶을 ‘혁명가의 삶’으로 규정하려는 목적과는 관계가 없다. 아니 그보다 먼저 삶을 고르게 요약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맑스의 생애 동안 곳곳에서 출몰하는 어떤 형상들이다. 그 형상들을 나는 ‘혁명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독특한 형상들은 인생을 평균 내는 순간 사라지기 쉬운 것들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매우 독특해 보이는 삶의 어떤 형상들, 매우 혁명적이지만 통상의 혁명가 이미지와는 꽤 다른 그 형상들 몇 가지 소개해보려고 한다.

2. 귀족적인 맑스

맑스의 삶은 확실히 ‘귀족주의’라고 부를 만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를 비난한 자들이 떠올리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맑스가 귀족에 대한 선망 때문에 트리에르의 남작 딸과 결혼하려 했다든지, 런던에서 고급 주택가에 살았고, 딸들을 고급 사립학교에 보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맑스의 ‘귀족주의’를 고발하기 위해 이용되곤 했다. 비난자들은 맑스의 사상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한 도구로 그런 이야기들을 활용했다.

하지만 맑스의 귀족주의는 니체의 귀족주의가 그렇듯이 ‘권력이나 부를 향해 기어오르는 원숭이들’로부터 삶을 방어하려는 고상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아탈리는 맑스에 대한 전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맑스의 착취에 대한 고발 속에는 귀족에 대한 이상화가 나타나 있다. 돈에 대한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르주아처럼 돈을 버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며 귀족처럼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통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돈의 권력과 맞서 싸움으로써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방법. 부르주아가 택한 것은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통해 지배자가 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의 질서에 적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돈은 항상 말한다. ‘나의 노예가 되어라, 그러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게 해주겠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는 노예 중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노예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다. 맑스는 이러한 ‘노예적인’ 태도를 경멸했다.

윈의 전기에 따르면 “맑스는 집에 돈이 없으면 숨고 허세를 부리고 거짓말을 하며 버텨나갔다. 그러다 돈을 한 움큼 쥐면 내일은 생각지도 않고 무모하게 써버렸다.” 맑스가 가난의 고통을 몰라서 돈을 이렇게 함부로 썼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런던의 소호에 살던 시절 그는 스스로 ‘지옥’이라고 불렀던 상황을 겪었다. 집달리가 찾아와서 침대와 이불은 물론이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요람도 빼앗아갔다. 아이들은 눈앞에서 죽어갔고, 그는 죽은 아이의 장례비용이 없어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녀야했다.

맑스와 예니(1863)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가난’이라는 ‘돈의 위협’에 굴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순간에도 명랑한 기분과 신념을 가진” 맑스의 성격에 예니가 감탄할 정도였다. 돈에 대한 이 ‘생각 없음’을 페리클레스가 말한 아테네 시민의 훌륭한 덕목으로 볼지, 중세 궁정귀족들의 어리석음으로 볼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맑스의 ‘생각 없는’ 씀씀이는 곧잘 ‘생각을 넘어선 씀씀이’와 연결되곤 했다. 그는 자신이 학수고대하던 아버지의 유산의 거의 전부를 무장봉기에 나선 친구들의 무기 값으로 써버렸고, 유렵혁명의 와중에 <신라인신문>을 내기 위해서도 재산을 다 내놓았다. 생각 없는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혁명은 확실히 ‘생각’이나 ‘계산’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맑스가 참을 수 없었던 인간형은 ‘부자’도 ‘빈자’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노예’였다. 그는 분명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갖는 착취적 성격을 가장 신랄하게 고발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가난’이 사람들에게 ‘노예근성’과 ‘굴종’, ‘타락’을 끌어온다는 점에서 증오했다. 부와 가난 밑에는 노예가 있다. 나는 노예적인 것, 노예화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의 거부를 ‘귀족주의’-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프롤레타리아 귀족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공산당선언>은 이 귀족주의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부르주아들은 자본, 국가, 민족, 가족을 가졌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거기서 어떤 유혹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들에 결핍감을 느끼는 순간 프롤레타리아트는 노예가 될 것이고 타락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결핍을 결핍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본, 국가, 민족, 가족을 갖지 못했지만, 또한 그것들을 차지하고 채우기보다 없애야 한다. 그 결핍감이 그들의 자유를 막는 사슬이기 때문이다. 그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그들을 강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이 강함, 이 귀족성이 나는 혁명과 혁명가를 정의해준다고 생각한다.

3. 공공연한 맑스

맑스는 음침한 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기관들은 혁명가의 사악함을 고발할 때 곧잘 그런 ‘음모가’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게다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서도 그런 이미지를 은근히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무력적 전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맑스의 이 천연덕스러운 공공연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청년기를 특징짓는 어떤 치기로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이 공공연함은 감정적 과잉에서 나온 게 아니라 냉철한 비전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당시 프랑스 지하분파들에서 유행하던 ‘신앙고백’ 형식의 입문 절차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왜 혁명가들의 자신의 의도와 견해를 감추어야 하는가. 그 점에서는 엥겔스도 같았다. <선언> 작성 당시 맑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자신들의 글이 내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공공연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말이 혁명의 언어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공연한 태도는 노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국가들이 영국 정부에 맑스와 인터내셔널을 조치하라고 요구할 때였다. 영국의 내무부장관은 비서에게 인터내셔널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는데, 맑스는 그 조사에 기꺼이 협력해서 인터내셔널의 ‘개회연설’, ‘임시규약’, ‘프랑스 내전에 대한 글’을 담은 문서 보따리를 넘겼다. 이 때문에 바쿠닌은 맑스를 ‘경찰첩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맑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혁명의 배후에 인터내셔널이 있고 그 뒤에 맑스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대꾸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밝혀낼 수수께끼도 없소. 우리 협회가 공적인 조직이고 의사록이 완전히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수수께끼가 있다면 사람이 어찌 그리 어리석을 수 있는지 하는 거요. 1페니만 내면 우리 규약을 구입할 수 있고, 1실링 내서 팜플렛을 구입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 잘 알 수 있소.”

물론 그가 인터내셔널 회원들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을 밀고하는 것과 다름없는 명단 공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혁명의 이념과 방법은 최소한 어떤 경우에도 대중에게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걱정했던 것은 조직의 음모가 발각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직이 음모를 통해서 운영되는 것이었다. 그의 삶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는 적어도 동지들과 음모를 꾸미는 자가 아니라, 자기 견해를 공공연하게 선언함으로써 혁명의 동지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무자비한 맑스

맑스는 종종 차갑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특히 비판 대상에 대해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을 때 사람들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이는 그를 ‘지적깡패’라고 불렀고, 또 어떤 이는 그의 스타일(style)이 본래의 어원, 즉 사람을 찌르는 ‘단검’을 닮았다고 했다. 하지만 맑스의 ‘무자비함’이 어떤 심리적 냉혹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많다. 가령 맑스의 막내 딸 엘레아노르는 ‘냉혹한 주피터’ 같은 맑스 형상은 ‘부르주아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한다. 그는 “노동자대의를 향한 헌신만큼이나 맑스와 예니를 강하게 묶어준 것은 대단한 유머감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주 심각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웃어대던” 맑스를 기억한다. 가족만이 아니라 그를 직접 만난 동지 중에도, 아니 심지어 정탐을 위해 그를 만난 영국 관료조차 그의 ‘웃음’에 매료되었다.

나는 맑스의 무자비함, 혁명가의 무자비함을 다른 곳에서 찾고 싶다. 나는 무자비함이 어떤 급진적이고 발본적인 성격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1843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맑스는 무자비함을 나름대로 정의한 바 있다. “무자비하다는 것은 비판이 도달할 결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그는 말한다. 비판이 토대나 근거에 입각하지 않고, 토대를 파헤치고 근거를 무너뜨릴 때까지 나아가는 것.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근거의 근거없음’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한 ‘심연(Abgrund)’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연은 근거 아래 영역으로, 여기서 모든 것들은 ‘근거없이’ 존재한다. <자본>에서 맑스가 사용한 용어를 빌자면, 이곳은 ‘권리 대 권리’, ‘올바름 대 올바름’이 충돌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맑스가 바로 덧붙인 말처럼 여기서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과학이 토대의 영역, 근거의 영역이라면, 심연은 힘의 영역이고 원초적 계급투쟁이 정의되는 영역이다. 무자비한 비판은 그런 점에서 과학 아래 힘의 영역까지 도달하는 비판이고, 모든 과학의 ‘입장’ 즉 ‘계급성’을 묻는 실천이다.

혁명가의 세 번째 형상이 여기서 발견된다. 혁명가란 토대(Grund)나 근거를 문제 삼으며 그 아래까지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투쟁의 장에서, 토대 아래서 작업하는 , 한마디로 ‘언더그라운드’의 사상가이다.

5. 국적없는 맑스

엥겔스는 맑스에 대한 추도사에서 “인터내셔널 없는 무어의 삶은 다이아몬드가 깨진 다이아 반지와 같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맑스는 국제노동조합협회, 즉 ‘인터내셔널’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하지만 나는 ‘인터내셔널’의 의미를 국제노동조합협회라는 특정 단체를 넘어서, 맑스의 삶을 특징짓는 하나의 이념 내지 원리로서 이해하고 싶다. 유럽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말에 압도된 19세기, 맑스는 감히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만큼 그의 삶을 잘 묘사하는 단어도 없을 것 같다.

브뤼셀에서 연행되는 맑스(1843) -N Khukov 1930s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맑스의 존재를 불온시했다. 영토(territory)를 허락한 나라가 없었기에 그는 항상 영토 바깥, 즉 치외법권지대(extra-territory)에서 살아갔다. 그는 한마디로 추방된 자였고 잠입한 자였다. 체류기간이 길든 짧든 삶은 항상 임시적이었다. 1843년 프로이센을 떠나 파리에 갔고, 2년 뒤 다시 파리에서 브뤼셀로 추방된 뒤, 혁명기에 잠시 파리로 왔고, 다시 독일 혁명을 위해 쾰른에 갔다가 다시 파리로, 그리고는 곧이어 런던으로 가야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한 후 그에게는 평생 국적이 없었다. 코뮨주의자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는 잠입과 추방, 탈주로 이어진 삶을 살아가야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어디서나 살아갔다. 사위 라파르그의 기억에 따르면 맑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는 세계 시민이다. 나는 어디든 내가 있는 곳에서 활동한다.” 국적과 관련해서는 말년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있다. 1874년 건강이 좋지 않던 맑스에게 의사는 카를스바트에서 요양할 것을 처방했는데, 거기에 가려면 독일 영토를 통과해야했다. 체포를 우려한 맑스는 영국 귀화를 생각했다. 영국 시민권이 있다면 독일 정부가 함부로 체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귀화는 거부되었다. 맑스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밝혀진 런던 경시청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칼 맑스 귀화건에 대하여. … 그는 공산주의 원칙의 옹호자이며, … 왕과 국가에 충성한 적이 없습니다.”

1843년 청년 맑스는 ‘조국에 대한 부끄러움’이야말로 독일 애국주의에 대한 혁명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썼다. 1856년 장년 맑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미래를 내다볼 적에 ‘조국에 대한 배신’ 같은 것을 본다”고 썼다. 1870년 노년 맑스는 애국적 송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오랜 친구였던 시인 프라일리그라트와 의절해버렸다. 한마디로 맑스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배신이나 부끄러움을 특정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인터내셔널은 특정 조국이 아닌 ‘조국 일반’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투쟁 구호 ‘모든 인간은 형제다’를 그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로 바꾼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회합을 촉구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상실한 자들, 조국과 민족을 적극적으로 해체한 자들의 연대를 촉구했다. 인터내셔널은 동질적 신체의 상상이 아니라, 그런 상상의 해체를 통해 가능한 이질적 공동체다. 인종이나 지역, 민족, 성 등의 동질적 토대 없이 공동 행동을 구축할 수 있을까. 토대 없이, 근거 없이 삶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맑스의 삶에서 발견하는 혁명가의 네 번째 형상이 이것이다. 그는 소속을 공유한 자들, 자격을 공유한 자들이 품는 내밀한 감정, 가령 친선이나 동정, 박애, 애국심 같은 것에는 서툴렀다. 그에게는 소위 ‘이웃사랑’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먼 이웃’을 사랑했다. 그의 삶이 소속, 소유, 자격으로부터의 탈주였듯이, 그의 연대 역시 그런 것들을 넘어서 이루어졌다. 시베리아 광산에서 캘리포니아,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이 기꺼이 그의 동료를 자처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혁명가의 삶이란 그 자체로 소속없는 것들, 통약불가능한 차이들, 무엇보다 억압받는 모든 형상들의 회합이자 연대이다.

6. 공부하는 맑스

담배와 레모네이드를 들고 새벽까지 연구에 몰입하던 맑스(1857-8) -Lithograph by V Lapin, 1957

맑스는 1852년에서 64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공적 무대에서 서재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자. 그는 서재로 물러났는가, 서재로 나아갔는가. 그의 서재는 혁명으로부터 퇴각한 곳인가, 혁명이 일어난 곳인가.

서재의 맑스, 대영박물관의 맑스, 늦은 새벽까지 레모네이드 한 잔을 들고 밤을 하얗게 태우곤 하던 맑스. 그의 삶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익숙한 혁명가의 이미지를 정정케 한다. 혁명적 사상가는 연구를 중단하고 혁명에 뛰어든 자라기보다, 그 누구보다 삶과 세계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은 자이다. 리프크네히트는 회고록에서, 맑스 때문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쓰잘 데 없는 인물들조차 날마다 대영박물관 열람실 책상에 온순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고 적었다. 맑스는 혁명과 공부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맑스는 서재에서 여느 전장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느꼈다. 특히 혁명이 임박했다고 느낄 때, 엥겔스가 말을 몰고 사냥터로 갔듯이, 맑스는 서재 안에서 바삐 움직였다. 윈은 당시 맑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맑스의 침착하지 못한 태도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늘 증거 한 조각을 찾기 위해 하던 일을 중단했고, 논증을 개선할 방도를 골똘히 생각하며 서재를 어슬렁거렸다. 이 어슬렁거림 때문에 문과 창문 사이에 카펫이 한 줄로 닳아 마치 초원에 오솔길이 난 것처럼 보였다.” 카펫에 난 오솔길, <자본>은 그 길에서 탄생했다.

1857-8년 혁명의 도래를 확신했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용할 ‘비판의 무기’를 벼리기 위해, 개념의 대장장이로서 혁명의 납기를 맞추기 위해 한층 더 바삐 움직였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밤새워 일했다.” 하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차례 산발적 봉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는 ‘보통 새벽4시까지 일한다’고 썼다. 새벽 4시. 그가 ‘이미’ 잠이 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맑스의 원고들은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혁명가의 다섯 번째 초상을 발견한다. 혁명가란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혁명을 준비한다는 것은 혁명을 점치거나 혁명을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보다 앞서 혁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맑스가 서재에서 느낀 초조와 긴장은 혁명에 쫓기는 자의 감정이라기보다 혁명보다 먼저 뛰어나가려는 자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공부한다는 것은 이처럼 계속해서 먼저 달려가는 행위이다. 혁명 앞에서 혁명하는 것, 그것이 공부이다. 그것은 맑스가 19세기 혁명에 명했던 일, 즉 ‘미래에서 자신의 영감을 가져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래를 당겨오는 일은 미래의 일을 마치 확정된 것처럼 알아맞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재가 배태하고 있는 미래, 현재와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현재에서 읽어내는 일이다. 현재가 품을 수밖에 없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공부이며, 그런 공부가 우리에게 가져다는 주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혁명가란 현 시대로 환수되지 않는 ‘다른 시대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연구를 통해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 고병권(수유너머 R)
*자세한 내용은 곧 발간될 부커진R 3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응답 1개

  1. 말테말하길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부커진도 기대가 되네요. 아주아주 예전에 맑스를 읽었던 때가 생각이 나고, 새롭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혁명가의 다섯 번째 초상을 읽자니, 기독교의 ‘선지자’가 떠올라요.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예언하고, 실천하는….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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