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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코뮨주의적 인간학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맑스의 코뮨주의적 인간학

여기 사람이 있다

요즘 나는 ‘노들 장애인 야학’의 학생, 교사, 활동가들과 함께 푸코 세미나를 하고 있다. 지난주 야학 교사이면서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는 한 분이 푸코의 ‘인간주의’ 비판(‘인간’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면서 탄생한 근대의 지식체계와 통치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면서 “그럼 우리가 장애인의 인권을 주장하고 장애인도 인간이라고 외치는 것도 문제라는 거냐?” 라고 물어왔다.

어디 장애인뿐인가? 철거민들도 “여기 사람이 있다”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치고, 이주노동자도, 비정규직 노동자도 ‘인권’의 기치 하에 싸우고 있다.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보호는커녕 법에 의해 추방되어 폭력과 빈곤과 착취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인권’은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채 오직 날것의 생명체로 전락한 사람들이 호소하는 일반적 권리가 되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 인간적 존엄과 인간의 주체성을 향유할 권리를 향한 인간주의적 투쟁이 저항의 일반명사가 되고 있다.

인간주의가 지배와 착취의 이념(인간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차별적인 자연 착취와 제국주의 침략, 인간의 본질을 결핍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지배권력의 처벌과 훈육, 배제와 추방)에서 저항과 해방의 이념으로 뒤바뀐 데는 칼 맑스의 영향이 크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질인 노동이 가장 소외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체제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는 “노동자의 해방 속에는 보편적, 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다”(102)는 경제학 철학 초고의 유명한 구절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한다는 인간주의를 자본주의적 국가통치의 이념이 아니라 그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이념으로 되돌려 놓으며 모든 피압박 대중의 저항을 인간해방을 향한 보편적 싸움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맑스가 말한 인간해방과 요즘 유행하는 인권의 정치는 전적으로 다르다. 맑스가 말한 인간은 권리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맑스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철학적)인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경제학적)인간, 사지와 오장육부를 가진 유기체로서의 (생물학적)인간이나 표상을 생산하고 표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심리학적) 인간 등 이러저러한 종차에 따라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종적 실체로서의 인간 개념을 부정한다. 인권의 정치는 그런 종적 특성에 따라 인간으로 정의될 주체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이런 동일성의 사유는 반드시 구별과 차등과 배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인간의 평등을 외치더라도 인간 아닌 존재와의 구별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인간을 유적(gattungs, universal)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인간이 이러저러한 종적 특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은 선험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실천(노동)을 통해 생성되어 가는 개념이다. ‘유적’이라는 말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종의 상위 범주가 아니라 ‘능력’으로 정의되는 본질의 크기가 종적 범위를 넘어서 자연 전체를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유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적 활동(노동) 속에서 인간적 인식과 욕망, 즉 인간적 감성능력이 자연 전체로 확장되어 간다는 뜻이다.

맑스는 인간에 대한 추상적(관념론적) 정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다른 모든 자연존재와 마찬가지로 ‘감성적’(sinnlich)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감성을 포이어바흐처럼 인간 주체와 외부 대상 사이의 인식론적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다른 존재와의 활동적 관계를 통해 공동의 신체를 형성하는 존재론적(유물론적) 범주로 파악했다.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비유기체적 신체”(der unorganische Leib)인데, 우리는 감성 활동의 과정 속에서 감성적 대상을 우리 자신의 비유기체적 신체로 구성한다.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자신의 감성적 활동(노동) 과정에서 인식의 대상과 욕구(향유)의 대상을 자연 전제로까지 확장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구성하는 존재이다.

맑스는 인간적 감성 활동의 대상(인식, 욕구)과 수단(기계), 그리고 활동의 집합적 형식(사회적 기관) 일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신이 창조한 노동수단인 기계를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삼는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비유기적 신체를 자신의 유기체에 장착한 사이보그적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기계를 자신의 신체기관으로 사용하는 장애인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이 창조한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공동체야말로 인간의 비유기체적 신체로서, 우리는 개발주의에 의해 자신의 공동체를 빼앗긴 사람들이 느끼는 신체적 고통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인간과 인간의 감성적 관계를 소유의 관계로 재편한다. 그럴 때 인간의 감성 능력은 화폐를 매개로 한 소유의 능력으로 전환되어, 음악적 귀를 갖지 않고도 음악을 소유할 수 있고 회화적 눈을 갖지 않고도 미술품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현실화한다. 화폐는 무능한 사람을 유능하게 만들고 유능한 사람을 무능하게 만들며, 추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아름다운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맑스는 사랑은 사랑과만 교환될 수 있다고 했다. 사랑을 향유하려면 되돌아오는 사랑을 낳는 ‘사랑받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화폐는 그런 생성(되기)과 무관하게 사랑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화폐는 모든 생산물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재현하며 그 보편적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특정의 질, 특정의 사물, 특정한 인간적 본질력과 교환되지 않고, 인간적 자연적 대상적 세계 전체와 교환되기 때문에, 화폐는 모든 속성을 모든 속성 – 그 속성과 모순되는 속성 및 대상까지도 – 교환한다.”(361) 화폐를 통해 소유된 대상은 특이성이 상실된 대상으로, 그것은 소유자의 특이성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여기 코뮨이 있다

오늘날 법에 의해 추방된 자들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은 내게 “여기, 코뮨이 있다”는 외침처럼 들린다. 법이 추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코뮨’이다. 법은 ‘사람’ 하면 떠오르는 날것의 생명체(유기체)나 권리 주체로서의 개인을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감성적 자연과 인간 간의 ‘공동체’를 추방한다. 법은 인간이 이룬 공동체를 권리(소유)의 주체와 대상으로 해체한다. 그래서 권리가 없는 사람을 무제한적인 폭력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법적 권리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권리의 소유를 열망하도록 만든다. 날것의 생명체나 권리 주체로서의 개인은 법적 추방의 산물(결과)이지 법 이전에 존재하는 삶의 실재(전제)가 아니다. 법 바깥의 실재는 근대 휴머니즘의 ‘그 인간’이 아니라 맑스가 말한 인간의 ‘공동체적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 – 자연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된 호모사케르 – 을 넘어선 곳에서만, 즉 공동 신체를 획득한 곳에서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추방된 자들의 “여기 사람이 있다”는 인간적 외침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아무도 홀로 있지 않다는 것, 호모사케르는 없다는 것, 나아가 아무도 홀로 있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 박정수(수유너머R)

응답 1개

  1. 달타냥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인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한 글입니다.

    법이 추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코뮨’이다.
    법에 의해 추방된 자들의 ”여기 사람이 있다” 는 외침은 ”여기,코뮨이 있다”는 외침처럼 들린다.

    멋있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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