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어린이날 무지개 축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어린이날 무지개 축제

“매이야!” “매이야, 아빠 왔다!”(선생님) “아빠~” 어린이집에서 매이를 데려올 때마다 반복되는 대사다. 그런데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금요일에는 매이의 대사에 다분히 작위적인 한 마디가 추가되었다. “아빠~ 따랑해요” 그리고,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종이컵으로 만든 카네이션이었다. ‘아빠 사랑해요’ 라고 말하면서 목에 걸어주라고 선생님이 시켰나보다. 핀으로 꽂는 게 어려워서 목에 걸게 만든 종이꽃을 높이 치켜든 매이 앞에서 나는 멈칫했다. 매이가 혼자 만든 건 아니지만, 매이의 손가락 도장이 꾹꾹 찍힌 카네이션을 받아든 나는 영 어색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늙은 내 부모의 자리에 앉은 느낌이랄까, 자식의 역할과 부담을 매이에게 넘겨준 것 같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의 역할 부여식 같은 그 의례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아내는 엄청 좋아하며 “자기도 내일 아침에 걸고 나가서 동네방네 자랑해. 빛나는 졸업장 아니야? 3년간 딴 일에 이만큼 시간을 쏟았으면 학위든 제대증이든 뭐든 탔을거 아냐? 특히 애기 어린 부모 앞에서 막 약올려”라고 했지만 나는 어색함을 털어낼 수 없었고, 물론 카네이션은 목에 걸지 않았다. (아내는 매이를 친정에 데려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목걸이 거는 퍼모먼스를 시킨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올해 ‘어버이’ 인증샷을 확실히 받았고, 매이는 ‘아기’가 아닌 ‘어린이’가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린이날은 그저 어린이집 휴무로 하는 수 없이 매이를 돌봐야 하는 ‘달갑지 않은 공휴일’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해당 ‘어린이’가 생긴 까닭에 ‘어린이날 행사’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게다가 아내의 원고 일정이 밀려있어서 나 혼자 ‘행사’를 치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섰다. 며칠 전부터 린이 아빠(하지메), 유나 아빠(고추장)와 상의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전에 이희경 선생님이 용인에 있는 이우학교가 주관하는 어린이날 마을축제에 매이를 데려 오라고 했지만 ‘에버랜드’가 있는 용인 길이 엄청 막힐 걸 생각하니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나 보다. 5월 4일 오후, 우연히 3층에 있는 ‘나눔의 집’을 운영하는 신부님을 만났다. 혹시 ‘나눔의 집’에서는 어린이날 행사가 없냐고 했더니, 한강공원에서 이주민 자녀와 함께 하는 어린이날 ‘무지개 축제’가 있다고 했다. 매이랑 유나도 낄 수 없냐고 했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다. 버스까지 대절했다니, 완벽했다.

‘나눔의 집’에서는 결혼 이주 가정, 이주 노동자 가정, 한국의 저소득계층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워낙 밝고 활달한 아이들이라 평소에도 인사를 나누곤 했다. 특히, 공부방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고운이와는 절친 사이다. 나만 친한 줄 알았는데 다른 연구실 식구들과도 친하고, 이 동네에서 고운이 모르면 간첩 소리 들을 정도로 발이 넓고 씩씩한 12살 여자 아이다. ‘나눔의 집’ 아이들이 왜 그렇게 활달한가 했더니 공부방 선생님을 만나 보니 알겠다. 그분은 버스에서 단 5분 만에 매이와 유나, 그리고 고추장과 나를 매료시켰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천변만화하는 표정과 유쾌한 말투,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재미나게 행사 일정을 소개하는 모습에 우리 모두는 넋이 나가버렸다. 행사 프로그램은 심플하면서도 사려 깊었다. 엄마 아빠의 참여를 이끈답시고 중산층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를 다지는 프로그램 대신 자원봉사 활동가들과 아이들을 짝 지워서 여러 개의 놀이 부스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놀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불법 이주민 노동자들의 의료 지원을 해 온 한국이주민건강협회가 주관해온 ‘이주민 어린이와 함께 하는 어린이날 무지개 축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 수가 늘어나 올해는 자원봉사자까지 합쳐서 천여 명이 함께 했다. 재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에서도 지원했는데, 작년에는 반정부 집회 참가 단체가 많다는 이유로 지원금을 끊어 버렸다. 부자 정권의 사람들은 돈이 곧 권력이고 돈줄을 끊으면 무조건 자기한테 복종할 거라 생각하나 보다. 하긴 자신들이 그런 삶을 살아 왔으니 남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다른 시민단체들처럼 갑자기 정부지원금이 끊겨 급히 후원사를 구하느라 작년에는 ‘강원 카지노랜드’의 후원으로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강원카지노랜드 입장에선 카지노사업의 ‘인간적’인 면모를 홍보할 기회라 여겼을 법하다. 덕분에 작년 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은 가슴에 ‘강원카니노랜드’라는 글자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원래, 어린이날은 5월 1일 ‘매이데이’와 같은 날이었다. 1923년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한 소파 방정환이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치르도록 서울에 연락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제 1회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진 것이 시발점이다. 동경에서 아동심리와 아동문학을 전공한 소파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의 어린이 존중 사상에 따라, 그리고 노동해방의 인터내셔널리즘에 감화를 받아 만국의 어린이를 빈곤과 노동, (부모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키자는 취지로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그런 취지로 보면 국적법과 민족주의에 의해 치외법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법 이주 노동자 자녀들과 함께 하는 축제야말로 어린이날의 취지에 걸맞는 행사라 할 것이다.

다양한 놀이와 넓은 잔디밭, 다양한 피부색과 연령의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매이와 유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 놀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시원한 그늘에서 이국의 엄마들과 수다를 떨며 쉴 수 있었다. 연구실 4층 카페에서 싸 간 쿠키를 내놓으니, 모두 맛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엄마는 안 오고 아빠들만 왔냐?”는 필리핀 결혼 이주 여성의 질문에 나는 “애기 엄마는 집에서 쉬고 있다”고 대답했다. 은근히 한국가정의 가부장적 이미지를 깨 주고 싶어서, 약간 신기해하는 그 이주 여성에게 나는 나의 가사노동 경력과 양육 체험을 약간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그 이주여성이 자신의 한국인 남편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길 기대하면서. (마초 한국남성 입장에서 보면 난 역적인가? 콜!)

공식행사 마지막에 ‘무지개어린이선언문’ 이 낭독되었다. 차별금지와, 건강권, 교육권 등을 담은 6개항의 선언문이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기본사항을 축약하여 만든 듯 하였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대한민국은 1991년에 가입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녀야 함에도 아직 완전히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유엔 아동권리 위원회에서 한국내의 외국인 아동에게 한국인과 동등한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받고나서도 한참 후인 2008년에야 겨우 초중등 교육부시행령 19조에 의해 불법체류자의 자녀라도 거주가 확인되면 ‘학교장의 재량’으로 초등학교에 입학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학교가 이들의 입학을 꺼리고, 학력이 인정이 되지 않으며, 학교가 출입국사무소에 통보를 해야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나마의 혜택도 중학교 진학에는 해당되지 않아서, 미등록 미주아동의 교육권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발표에 의하면 약 7만명의 체류이주아동 중 8천 3백명이 미등록 이주아동이라 한다. 그러나 민간 발표로는 18세 미만의 불법체류자의 자녀가 2만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들 중 학교에 다니는 인구는 1,270명에 불과하며, 강제출국의 두려움 때문에 집 밖 출입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지개어린이선언문의 제 2항은 “모든 어린이는 이름과 국적을 갖고 부모로부터 양육받아야 합니다” 라고 되어 있다. 출생 신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어떠한 법적 사회적 보호조치도 받지 못하고 방임되고 착취당하고 매매되는 아동을 줄이고자 하는 문구인 줄은 알겠지만, 저 조항은 나아가 “모든 어린이는 국적과 상관없이 양육 받아야 하며, 부모가 있건 없건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로 고쳐져야 하는 게 아닐까?

한가지 더. 왜 행사 이름을 ‘무지개’ 축제로 했을까? 피부색이 달라도 차별받지 않고 어우러진 다인종 사회의 상징으로 무지개를 택한 건 이해 되지만, 그동안 성소수자들이 힘들게 일궈온 무지개의 상징성을 뺏은 것 같아서 씁쓸하다. (그래서 성소수자들은 요즘 ‘핑크’ 를 자주 내세우는 모양이다. 그런데 ‘핑크’는 한동안 여성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성소수자들의 무지개에는 어떤 (성적) 강렬함과 긴장이 있었지만, 정부에서도 적극 독려하는 다문화주의의 ‘무지개’에는 그런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지개 색이 엷어진 듯 하다.

– 매이 아빠

응답 1개

  1. 레인보우말하길

    “모든 어린이는 국적과 상관없이 양육 받아야 하며, 부모가 있건 없건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

    아! 이런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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