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어느 생쥐의 이야기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어느 생쥐의 이야기
– <꼬리 잘린 생쥐> 권영품 글 / 이광익 그림 / 창비

루소의 <에밀>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루소는 인간 유형을 자연인과 시민으로 나눈다. 자연인이란 ‘자기 자신이 전부인 사람, 그 사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전체’인 사람이다. 자신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그에 반해 시민은 사회라는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가치가 정해지는 상대적 존재이다.

루소는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으로부터 자연성을 빼앗아 절대적 존재인 자아를 상대적 존재로 축소시키는 것, 개인을 공동체의 일부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공동체의 일부로 전락했을 때, 개인은 공동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삶을 유지하려면 공동체의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가 원하는 순한 인간, 말 잘 듣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근대 국가에서 학교가 만들어진 배경과도 일치한다.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를 훈육해 교양인으로 길러낸다는 미명을 앞세우고 있지만, 근대 학교 교육의 목표는 각종 규칙을 통해 개인의 신체를 억압하고 훈육하는 것이다.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해 이성적 권위에 순응하는 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교 교육은 근대 국가가 원하는 착한 시민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이다. 성적이라는 코드로 학생들을 위계 지으며, 교사는 그러한 학생들을 통제하며 권력을 행사한다. 학교에 잘 적응하려면 학교의 규칙과 질서에 순응하는 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근대라는 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연인이기를 주장하는 순간 부적응자로 떠돌거나, 추방될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상적 존재인 자연인이기를 포기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곤 한다. 아니 기존 질서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자신 안에 자연인으로서의 본성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채 노예적 인간으로 살아간다.

<꼬리 잘린 생쥐>는 생쥐 ‘빠른발’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린 동화다.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생쥐들의 혈전, ‘잘난 쥐’와 ‘못난 쥐’라는 서열을 없애버리고 같이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 못난 쥐들의 활약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작가는 간결한 문장과 유머, 풍자를 통해 근대 사회를 조롱한다. 생쥐 ‘빠른 발’의 모험을 통해 시민과 자연인 사이의 경계를 잘 보여준다. 규율을 통한 억압과 제약이 난무하는 장 안에서, 시민으로의 안온함 대신 자연인으로 서고자 하는 ‘빠른 발’의 고투를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노예적인 삶과 자연인으로서의 삶 가운데,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규율화 된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다

세상은 작은 생쥐에게는 전쟁터다. 윤기 나는 갈색 털과 빠른 발을 가졌음에도 살아가기가 녹녹치 않다. 아파트 단지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던 빠른 발은 고양이에게 꼬리를 밟혀 잘리고 만다. 졸지에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고양이가 없는 자유로운 곳을 꿈꾸지만, 아파트 단지, 공원, 집. 어디에도 빠른 발에게 허락된 공간은 없다.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로부터 ‘학교’ 이야기를 들은 빠른 발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다. ‘아이들과 쥐들이 낮과 밤으로 나누어 살며, 고양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12쪽)’는 설명에 혹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학교는 빠른 발이 생각하는 것처럼 적이 없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학교 쥐 법’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저들만의 보금자리일 뿐이다. 잘난 쥐와 못난 쥐라는 철저한 서열에 따라 사는 곳과 먹는 것까지 정해진 계급사회이며, 실수를 하거나 다친 동료들은 냉정하게 추방해 버리는 냉혹한 곳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잘난 쥐라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빠른 발은 보초 쥐들의 경계를 뚫고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작가는 빠른 발의 말을 통해 ‘잘나고 못남’의 경계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날카롭게 꼬집는다. 잘난 쥐들에게는 잘린 꼬리가 ‘못남’을 결정짓는 확실한 근거이지만, 빠른 발에게는 ‘영광의 상처’ 내지 ‘용기의 상징’일 뿐이다. 그래서 빠른 발은 학교 쥐법 운운하며 잘난 쥐 타령을 하는 보초 쥐들에게 “그만, 그만! 잘난 쥐, 못난 쥐, 잘 못난 쥐 못 잘난 쥐…… 어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야말로 잘났다는 거지. 발 빠르지, 뭐든 잘 먹지! 노래도 잘 부른다고. 이 정도면 됐지?(18쪽)”라며 자신 있게 항변한다.

작가는 못난 쥐 회색 눈을 통해 ‘이빨이 튼튼하고 길고, 덩치가 커서 싸움을 잘하고 잘 먹어서 털이 미끈하고 윤기가 흐르는(48쪽)’ 쥐들이 잘난 쥐라고 정의해 놓고는, 슬그머니 또 그것을 비아냥거린다. 그들이 이빨이 튼튼하고 긴 것은 게을러서 이빨을 갈지 않았기 때문(63쪽)이고, 털이 미끈하고 윤기가 흐르는 것은 사람들이 남긴 음식을 실컷 먹었기 때문(48쪽)이며, 덩치가 큰 것은 욕심껏 먹었기 때문(68쪽)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잘난 쥐라는 우월감이 실은 게으름과 욕망의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잘남’의 위상을 통렬하게 깨버린다.

엉터리 법으로 장악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잘난 쥐들은 보초를 세우고, 못난 쥐들을 감시하며, 다치거나 실수를 한 동료들을 가차 없이 추방한다. 그들이 그렇게 규율과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그들 또한 진정한 강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교실에 독가스를 뿌린다는 이야기들 듣고 회의를 여는 잘난 쥐들의 모습을 통해 잘난 쥐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두머리인 큰 이빨의 눈치나 보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82쪽)임을 드러낸다. 독가스 파동을 겪은 잘난 쥐들은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 빠른 발을 추방하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저들이 못난 쥐로 치부했던 빠른 발이 강력하고 견고했던 규율사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잘난 쥐들은 이제 큰 이빨의 권위에 조금씩 도전을 하기 시작한다. 빠른 발을 쫓는데 앞장서라는 말에 침묵하는가 하면, 순서대로 줄을 서라는 말에 “무슨 순서냐고?” 항변을 하고, 서로 앞에 서지 않으려고 다투기까지 한다(88쪽). 잘난 쥐들 내부에서 서서히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완강해서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잘난 쥐들의 세계는 이렇게 꼬리 잘린 생쥐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영위하려는 빠른 발의 행동은 다른 못난 쥐들을 촉발시킨다. 잘난 쥐들이 만든 법속에서, 잘난 쥐들이 규정해 놓은 ‘못남’이라는 정체성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못난 쥐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회색눈이 못난 쥐로 살아갔던 것은 학교 밖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살려면 잘난 쥐와 못난 쥐로 나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지금껏 내가 못난 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지. 그런데 빠른 발을 만나고 나서 못난 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역시 난 못난 쥐야, 용기 없고 피하려고만 하지. 이제 더는 못난 쥐가 되고 싶지 않아. 누가 뭐래도 난 빠른 발과 함께 싸울 거야.(98쪽)”

그러나 회색눈은 빠른 발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갖게 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살아갈 결심을 한다. 한때 친구였던 빠른 발을 잘난 쥐들에게 넘기고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친구들의 비굴한 모습을 통해, 용기 없고 비겁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게 되자 빠른 발과 같이 싸움에 나선다.

스스로를 못난 쥐로 규정하고 화장실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못난 쥐들은 화장실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쉽게 노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그동안 수집한 물건을 바쳐서 안위를 도모하거나, 빠른 발을 희생양 삼아 살아날 방도를 궁리한다. 하지만 ‘못난 쥐는 절대로 잘난 쥐를 이길 수 없다던’ 그들의 뿌리 깊은 신념(95쪽)은 화장실에 찾아온 잘난 쥐들의 숫자를 파악한 순간 안개처럼 스물스물 사라진다. 도대체 우리가 왜 못났느냐며(112쪽) 따지고, 작다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잘난 쥐들의 비 논리성을 공격(112쪽)한다. 너희가 나가라며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말하더니(113쪽), “우리는 못난 쥐가 아니야(116쪽).”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말은 곧 행동으로 이어져 못난 쥐들은 잘난 쥐들을 화장실에서 추방하고, 잘난 쥐들을 공격해 빠른 발을 구해낸다. 급기야 잘난 쥐들의 항복까지 받아낸다. 자신들을 규정했던 ‘못난 쥐’라는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가치를 되찾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빼앗겼던 자신들의 영역을 되찾고, 새로운 질서까지 만들어낸다.

회색눈은 쥐들을 가르던 악법(학교 쥐법)을 없애고, 잘난 쥐, 못난 쥐라는 위계질서를 폐지하며, 모두 친구가 되어 같이 살 것을 제안한다. 이제 교실은 규율과 억압이 난무하는 장이 아니라, 학생과 쥐들이 공존하는 세상, 각기 다른 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으로 탈바꿈한다. 물론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빠른 발 덕이다. 노예적 삶, 순응적인 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 빠른 발의 선택과 행동이 다른 쥐들을 감응시키고 변용시켰기 때문이다.

당장 화장실로 가라는 감시쥐들의 으름장에 빠른 발은 자신은 못난 쥐가 아니라고 대응한다. 한술 더 떠서 너희들은 뭐가 잘났는지 대라고 공박한다(63쪽). 그뿐이 아니다. 감시 쥐들의 공격을 받자 자신은 ‘잘난 쥐도 못난 쥐도 아니라며(64쪽)’ 그들의 논리체계를 부순다. 스스로를 못난 쥐가 아니라고 항변하거나, 잘난 쥐라는 근거가 뭐냐고 묻는 것은 그들의 질서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빠른 발은 ‘나는 빠른 발, 꼬리 잘린 생쥐’라면서 그들이 부여하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 자신이 규정한 정체성을 드러내 그들에게 응수한다.

새로운 세상이 왔지만 빠른 발은 마루 밑으로 가자는 회색눈의 제안을 거절하고 교실에 남는다. “아니, 난 좀 더 햄스터로 살고 싶어. 저기가 마음에 들거든(122쪽).”이라면서 아이들이 만들어 준 보금자리에 안착한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온 빠른 발다운 선택이기도 하고, 인간과 동물이 함께 하는 세상에 대한 은유로 느껴지기도 한다. 꼬리 잘린 생쥐와 햄스터 사이를 오가는 빠른 발의 자유로운 행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잘난 쥐와 못난 쥐라는 구분을 무화시켰듯이, 빠른 발은 이제 생쥐와 햄스터라는 경계마저 무화시킨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정체성이란 우리 존재의 본질이며 나와 남을 구별시켜 주는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잔뜩 젖어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나를 나답게 하는 그 정체성이 오히려 나를 가두는 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본질이란 사실 딱히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배치 하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본질은 다르게 드러난다. 못난 쥐들과 같이 있을 때의 빠른 발은 먹을 것을 나누는 다정한 친구이지만, 잘난 쥐들과 맞설 때의 빠른 발은 자신의 영역을 사수하기 위해 애쓰는 강인한 전사이지 않은가!

자연인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하나의 본질엔 국한시키지 않는 이가 아닐까? 끊임없이 경계와 경계를 넘나들며, 경계를 허무는 자가 아닐까?

꼬리 잘린 생쥐, 빠른 발의 이야기는 우리를 옥죄고 있는 근대라는 그물을 되돌아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에 손과 발이 묶인 줄도 모르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잘 읽히고 재미있기까지 하니, 읽으면 읽을수록 참 멋진 책이다.

– 달맞이

응답 4개

  1. 연초록말하길

    정체성을 하나가 아니다,어디와 접속하는 가에 따라 달라진다

    맞는 말입니다. 정말로

    제가 작년 11월부터 수유너머 남산과 R에 공부하러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처음에는 공부만,그 다음에 일본어회화도 하자고 꼬득여서 한 반, 한참 있다가 탁구치자고

    말을 걸고 베드민턴합시다 그래서 배드민턴도 함께 하는 멤버가 생겼지요,

    음악을 좋아하는 저는 혼자 듣기 아까운 음반이 많아서 그것을 빌려주고 다른 사람에게

    제게 없는 음반도 빌리기도 하고, 그림에 관한 좋은 동영상을 나누기 시작하기도 했지요.

    작농반에 직접 참여할 시간은 없지만 그래도 씨앗값을 조금 보태고 회원이 되어서

    매 주 월요일 눈마주치기 하러 가기도 하고 해방촌 주변을 찍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제게 아킬레스건이었던 음식만들기.루니와 함께 하려면 공동취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에 고민고민하다가 이것이 아마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작을 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물어 드디어 아들이 엄마,맛있어 라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네요. (평생을 도망쳐온 일에서 열등감이나 공포심을 벗고 말하고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정말 놀라운 변화거든요)

    그렇게 달라진 행보가 다른 일상에 역시 반영이 되는 모양입니다.

    제게 루니교도(저랑 자주 만나는 분이 제게 붙여준 이상한 명칭인데요 )가 된 느낌이라고

    종교가 없는 제가 마치 종교를 갖게 된 초심자의 느낌을 받았던 모양입니다,화요일마다 만나면

    월요일 하루의 즐거움에 대해 노래해서 그럴까요?

    한 주일의 월요일이 지나면 한 주일 내내 가벼운 마음으로 (가벼워지기가 제겐 참 필요한 일이라서요) 살아갈 힘이 생긴다는 것, 참 신기하다,신기해 하면서 살고 있는 날들입니다.

    • 달맞이말하길

      루니 게시판에서 왕성하게 접속하시고 소통하시는 연초록님 모습을 뵙곤 합니다. 제게도 수유는 놀라움의 공간이었습니다. 감격에 겨워서 한동안 들떠 다녔더니, 제게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같다고. 크크. 가끔 지인들을 만나면 든든한 친정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글을 쓰면서도 글에 영 자신이 없던 제게 용기를 준 것도 이곳이었고, 공부는 영 젬병이라고 생각했던 저에게 공부도 재미있다는 것을 알려준 곳도 이곳이었고, 살아갈 배짱을 준 것도 이곳입니다. 여기서 얻은 감응들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곳이 주는 잔치같은 매력에 흠뻑 빠지시길, 그리하여 날로 가벼워지시길, 체감하신 경이로움을 널리 퍼뜨려주시길!

  2. 둥근머리말하길

    이 쥐가 그 쥐군요ㅎㅎ. 덕분에, 이 책을 펼치고, 친구일 수도 전사일 수도 있는 나를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비타민 같아요.ㅎㅎ

    • 달맞이말하길

      크크 재밌더라구요. 근데 써 놓고 보니까 비약이 심해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꼬리 잘린 생쥐의 성장기 이야기야 남들이 다 말할 것 같아 생략해 버렸더니, 아동문학에서 너무 나간 것 같고, 뭐랄까 미학적 측면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아요. 표면과 심층 두 주제를 어떻게 어우러지게 했는지를 밝혀야 했던 게 아닐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동심의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이었을 텐데, 그 부분이 좀 약해요. 헛점이 드러나네 자꾸. 근데 이 작품 읽으면서 되게 반가웠다우. 크크. 난 이런 게 너무 좋아. 둥근머리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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