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손녀의 눈물

- 김융희

손녀의 눈물.

나이가 점점 들면서 함께 느는건 손자녀들 뿐이다. 자식들이 벌써
어버이가 되어 그들의 식구들도 십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도 전혀 가족이
늘었다는 실감이 잘 나질 않는다. 나보다는 자식 손자들이 훨씬 더 바쁜
것 같다. 언뜻 언뜻 생각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추위도 물러가고 싱그러운 계절이다. 가정의 달에 모처럼 가족이 모였다.
한적했던 집안이 갑자기 시글 시글 사람 사는 분위기이다. 집안 곳곳이
어질어져 어수선하고 산란하지만 조금도 귀찮치 않다. 오월의 신록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준 어린 것들이 오지기도 하고 좋았다.

열심히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놀아주고 있는데 큰 놈이 안 보인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나 혼자서 그놈들 모두를 감당하기가 벅차 함께 놀아
주려는 구원을 청하려는데 그가 안 보인다. 눈물을 글썽이며 서재에 있었다.
모처럼 할아버지집에 와서 “왠 일이지?” 걱정스러워 다가 갔더니, 손에 든
책을 내 보이며 금세 환한 얼굴로 “나 감동 먹었어”하며 방긋 웃는다.

조용한 할아버지 집에서 읽기 위해 준비해 온 책을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그만
눈물을 흘렸단다. 손에 든 책은 작가 “구리 료헤이”원작의 “우동 한그릇”이다.
“우동 한그릇”(최영혁 옮김, 창조사)은 30페이지도 않된 짧은, 그래서 다께모도
고노스께의 “마지막 손님”과 함께 묶인 책이다.
그러나 짧은 이야기가 너무 잘 알려진 화제작으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섣달 그믐날 “북해정” 작은 우동 전문점이다. 문을 막 닫으려 할 때 아주 남루한
차림새의 세 모자가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저.. 우동… 1인분만 시켜도 괜찮을까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어머니의 주문에,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년과 그의
동생인 듯한 소년의 걱정스러운 얼굴. 주인은 “네…네, 자, 이쪽으로.” 난로 곁의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1인분이요!”하고 주방에 소리친다.
주문을 받은 주인은 “예!”하면서 세 모자에 눈길을. 재빨리 1인분에 반을 더해
끓여 내온 김이 모락모락 먹음직스러운 우동 한 그릇, 맛있게 나눠 먹는 세 모자는,
150엔을 내며 고맙다는 공손한 인사이다. 주인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들에게 크게 인사를 한다.

다시 한 해가 흘러 섣달 그믐날이다. 문을 닫을 때쯤 작년에 모습 그데로
체크 무늬의 허름한 반코트 여인이 두 소년과 함께 들어왔다.
“저.. 저… 일인분만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여전 난로 옆
2번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한 안주인은, 부엌에 들려 낮은 소리로 “여보, 3인분을
넣읍시다“ ”아니야, 그럼 알아차리고 민망해 할 거야.“ 주인은 작년과 똑같이
1.5인분을 끓였다. 우동 한 그릇을 놓고 맛있게 먹는 모자들.
“올해도 “북해정” 우동을 먹게 되네요. 내년에도 먹을 수 있음 좋으련만…“
150엔을 지불하고 나선 그들에게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몇 번이고
되풀이 인사말로 전송한 “북해정” 주인이다.

다시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이다. 10시경 주인은 메뉴판을 고친다.
그동안 오른 우동값 200엔을 150엔으로 다시 바꾸고 2번 테이블엔 “예약석”이란
푯말을 올려 놓았다. 예상했던 대로 세 모자가 들어왔다. 그동안 두 아이는커서
큰 소년은 중학교 교복을 입었고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었던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색바랜 체크 반코트, “저.. 우동… 이인분만 시켜도 될까요?”
“물론이죠, 자 이리 오세요.” 슬적 푯말을 치우고 2번 탁자로 안내하며,
“우동 2인분이요! 부인이 주방에 대고 외치자 주인은 재빨리 우동 세 덩어리를
끓인다. 맛있게 먹는 세 모자.
“형아야, 그리고 준아… 그동안 너희들 고맙구나.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후
우리집의 빚을 이제 다 갚았구나.
형아는 신문배달로 도와주고 준이는 살림을 맡아준 너희들 때문이야. 고맙다.“
“너무 다행이예요. 저도 엄마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지난 주 준이가 글짖기 상을
받았어요. 제목은 우동 한그릇이예요. 여기서 섣달 그믐날 우리들이 먹는 이 우동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우동이라며, 저 친절한 “북해정”주인들처럼 그런 우동집을
자기도 하겠데요.“
주방에서 세 모자의 말을 듣고 있는 주인 부부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다음 해에도 “북해정”은 예약석 푯말과 함께 기다린 세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 또 다음 해, 변함없이 초조하게 기다렸으나 다시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동안 북해정은 계속 번창해 새롭게 단장하며 테이블도 바꿨으나 낡은 2번만은
그데로 두었다. 그리고 의아해 하는 손님들에게 사연을 설명하면서 그 세 모자가
다시 오면 같은 테이블에서 전처럼 우동을 먹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탁자는 이
후에 계속 “행운의 탁자”로 불리며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가 되었다.

십수 년이 흐르고 다시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2번 테이블은 그데로 빈 채, 이웃
상가의 상인들이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10시 30분 경, 손님이 들어 왔다.
“죄송합니다만…” 주인이 막 거절을 할려는데, 따라 들어온 나이든 아주머니가
허리 굽혀 인사를 하며 “우동 3인분을 시킬 수 있을까요?” 주인장은 순간 숨이 그만
멈추었다. 오래 전 남루한 차림인 세 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청년이 나서며
“10년도 전에 우리는 여기를 들려 1인분의 우동을 시켜 맛있게 먹었고, 그 우동 한
그릇은 우리 가족에게 큰 희망과 행복이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외갓집 동네로
이사를 가서 한동안 못 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의사가 되었고 동생은 은행 직원으로
근무합니다. 올해 섣달 그믐의 년말을 저희는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갖고자 왔습니다.
북해정에서 우동3인분을 시켜 먹는 일입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주인과 아주머니, “어서 오세요, 우동 3인분이요!”
아주머니가 소리치자 “우동 3인분이요!” 답하며 주인이 주방으로 향했다.
망년회의 상인들도 2번 테이블은 이 분들의 예약석이라며 자리를 비우고 그들을
안내한다.“

이처럼 슬픈 이야기 같지만 결코 슬프지 않는 감동의 해피 엔딩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손녀가 말한다. “할아버지, 우리 우동집 가요. 맛있는 우동 사주세요.”
“그래, 우동이 먹고 싶구나. 실컨 사줄게 가자구나.” “그러나, 할아버지, 북해정
주인들처럼 친절한 우동집이 있을까요? 맛이 덜해도 친절한 주인이면 좋겠는데…“
갑자기 그의 말 끝이 흐릿하다.

그의 태도로 보아 우동이 먹고 싶은게 아니라, 북해정 같은 식당 분위기가
그립나 보다. 손녀의 의도를 알게된 나는 자신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녀의
기대를 체워줄 친절한 우동집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세 모자가 아니라 북해정의 주인 내외가
아닐까? 생각했다. 손녀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나 보다. 내 손녀가 기특했다.

좋은 식당에 가서 우동을 꼭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글쎄, 나는
자신이 없다. 착한 내 손녀의 작은 꿈을 이루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에 이처럼 손님을 배려하며 마음씨 고운 주인의 식당이 있을까?
여러분의 협조를 구합니다.
알고 있는 좋은 집 있음, 좀 알려 주시길 간곡히 바람니다.

– 김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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