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소모품이 아닌 삶을 위하여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소모품이 아닌 삶을 위하여

이를테면 f(x+y)=f(x)+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왜, 너는 무엇을 입었고 너는 어디를 나왔고 너는 어디를 다니고 있는가를 그토록 추궁하는가.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왜 그토록 못을 박는가. 그토록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왜이며, 그 조항들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中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의 파반느>에는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한탄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백화점 마트 일을 하는 주인공에게 세상이란 인간다움을 가르쳐주는 이 없고 경쟁만을 종용하면서 등수를 매겨 성공 아니면 실패로 사람을 판단하는 곳이다. 진보적이라고 자신의 성향을 밝히는 사람 중에서도 이러한 성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상대방을 평가할 때 무엇을 입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어느 회사를 다니는가를 따지는 게 본능처럼 몸에 배어 있지 않은가(그게 진정 자신의 욕구인지는 점검조차 하지 않는다). “부러워할수록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누구이며 보이지 않는 선두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무엇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강제할까. 많은 이들이 이 머리 아픈 질문에 답하기를 그만두고 세상에 순응하는 길을 택할 때,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삶을 향한 거대한 물음을 제기하며 대학을 그만두었다. 고려대 경영과 3학년 김예슬의 자퇴 선언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글은 인터넷에서 빠르게 확산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언론과 각종 포털에서는 그녀의 선언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생각 없이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어 고맙다”는 의견부터 “조용히 자퇴하면 그만이지 혼자 튀기 위해 자퇴하는가” 라는 식의 냉소, 심지어는 “나는 당신이 그만둔 그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까지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큰 배움 없는 대학, 진리와 우정과 정의가 사라진 대학, 나아가 대학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비판하는 김예슬의 자퇴 선언이 대자보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나왔다. 자퇴 결정을 하기까지의 망설임과 절박함,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저항의 몸짓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대학에 젊음을 바치는 사람들

열심히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열공하는 사람이건 게임으로 현실 도피를 하면서 스펙 쌓기에 소홀한 사람이건, 오늘날 사회인으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을 상품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시험 기간에는 자리 경쟁이 치열하고 자기 소개서에 경력 사항 한 줄을 넣기 위해 자원봉사를 지원하며 토익 토플은 국민 시험이 된지 오래다. 자격증, 대학 졸업장, 포트폴리오, 토익점수, 어학연수, 유학, 인턴, 자원봉사, 프로젝트, 자기 소개서 등등, 고스펙으로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기들을 나열하기에도 숨차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냐는 물음에 대학은 자신의 몸값을 올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하나의 길만을 제시한다. 대학의 주문대로 아이언맨마냥 무한정 자본을 투자해 스펙을 업그레이드한 결과는 졸업 후에도 자신의 밥그릇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자의 길이다. 부모가 아무리 돈을 투자해도 투자 대비 성능은 발휘되지 않는 이상한 젊음. 사람들은 더 고성능 인재가 되기 위해 휴학과 어학연수를 반복하며 취업 공부를 하다가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한 지식에 잡아먹힌다. 나는 누구인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있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가슴 깊숙이 삶에 대해 어떤 물음을 품고 있는지,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한 진짜 물음은 취직 때까지 가슴 한켠에 무한정 유보해둔다. 입시에 성공할 때까지, 취직에 성공할 때까지!

덕분에 대학은 이제 무기력한 젊음들이 세상에 나가기를 유예하는 장소이자 자신에 대해 성찰할 능력이 결여된 ‘초대딩’이 우글거리는 공간이 되었다. 졸업장과 자격증으로 적당히 포장된 인재를 뽑아가려는 기업의 인력 저장소가 오늘날 대학이 처한 현실이다. 도대체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진짜 삶은, 행복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진짜 배움은 무엇인가? 김예슬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악순환은 끝이 있을까? 삶을 위해 돈이 필요하지 돈을 위해 삶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삶’이 아닌 ‘생존’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미 자본에 오염된 꿈을 꾸며 산다. 자신이 되고 싶은 삶의 모습,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돈과 명문대를 통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삶의 방식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직장에 가서 월급을 받고 사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려 한다. 가끔 한 방에 인생 역전 가능하다는 로또를 꿈꾸기도 하지만(로또 만세!) 그 꿈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는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자유’가 아닌 ‘이미 주어져 있는 재화를 다양하게 구매할 수 있는 자유’일 뿐이다.

심지어 국가와 시장은 이상적인 삶의 모습까지 소비 가능한 하나의 상품처럼 제시한다. 집과 학교, 직장을 감옥처럼 오가는 모습, 더 좋은 집을 얻고 회사에서 승진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처럼 낭만적인 여행을 소비하는 모습이 소위 ‘간지 나는 삶’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 행복한 삶의 이미지가 가짜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인공 냄새가 나는 꿈을 향해 전력질주 한다. 김예슬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게 삶을 있는 대로 쥐어짠다면 결국 스스로 호화로운 감옥의 수인이 될 뿐이라고. 진정 꿈꾸기 위해서는 자본으로 오염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해체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학(學)이 아니라 삶이다

이러한 삶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연대를 통해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자’는 기존의 사회과학적 진보 담론은 분명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국가의 부를 통해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받는 프랑스와 핀란드처럼, 미래를 위해 투자해온 비용대로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는 요구는 노동 기본권과 인권 보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김예슬은 ‘고르게 부자인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보 담론이 경제 성장과 국익추구를 위한 부당한 방법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잘 사는 것’에 대한 근본 물음 없이 ‘고르게 잘 살자’는 주장에 치우친 나머지, 오히려 재벌총수를 풀어주고 CEO 대통령에게 투표하는 상황을 이론적으로 변호하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지식이 사회 부조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역설. 이는 사회의 지적 천박함을 질타하며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진보 언론과 교수들이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오류다. 지식의 위계만을 따지면서 삶을 통해 문제의식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정당한 이론조차 무용지물이다. 고전과 사회과학서적으로 단단하게 앎을 쌓아도, 결국 진정한 앎은 삶을 함께 꾸려나가자는 의지이자 행위의 문제다. 김예슬의 말처럼,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에서 불안과 실존의 문제를 발견해도 정작 현실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무시한다면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지 못한다. ‘타자’나 ‘신자유주의’, ‘연대’ 등을 실컷 외쳐봤자 삶 속에서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동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공허한 울림에 그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실천적 문제를 대면하면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이와의 관계를 통해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앎’을 지향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의 모습이다.

삶을 통해 저항하기

김예슬이 꿈꾸는 세상은 마치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언급했던 이상 사회와 비슷하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과 관심사로 장인성과 인격을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 자급자립 기반과 공동체를 통해 살아나는 세상, 소박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농부로 살면 되고 목수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서 박사가 될 필요가 없고 사람을 돕기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자신의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그녀의 말과 행동은 지식만 꿰뚫는 식자의 말처럼 겉돌지 않는다. 선언의 말과 행위가 일치할 때, 선언이 갖는 말에는 진실한 힘이 실린다. 자신의 삶을 걸고 하는 말은 듣는 이에게 단지 공허한 외침으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책에 실린 그녀의 글 속에는 깊은 울림이 담겨 있다.

그녀와 고민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는 무작정 그녀처럼 대학과 회사의 울타리를 탈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사실 앞뒤 맥락 없이 김예슬을 벤치마킹한다는 구실로 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자본과 학교, 정치의 트라이앵글이 삶을 옥죄는 모순을 직시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살아내야 한다. 삶의 모순을 직시할 때 진정한 고민은 시작된다. 현실을 비켜가지 않으면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 곧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김예슬은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삶을 돌파하기 위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수많은 스승들처럼 “함께 살지 않겠냐”고 묻는다. 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자세가 아닌 함께 고민을 나누어보자는 제안이다.

그녀의 고민을 나누며 살고 싶다면 인간다운 삶의 연대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자격증과 돈만이 나 자신을 설명하는 빈궁한 삶을 해쳐나가려면 말이다. 김예슬은 우리에게 응답해야 할 질문을 던져주었다. 아직까지 돈과 직장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데 익숙한 우리는 그녀가 던진 질문을 직시해야 할 시점에 있다.

– 조르바(수유너머R 루니 학인)

응답 3개

  1. 연초록말하길

    조르바님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라, 그것이 제게 요즘 가장 절실한 화두였는데

    꼭 찝어서 보라,이것이 네게 필요한 일이야 라고 주목하게 만드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림을 수집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좋아하는 대상으로 즐겨 보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는

    말이 이상하기도 하고 (제 주변엔 수집하는 사람은 없고 함께 즐기는 사람뿐이라서요)

    재미있기도 했어요.그런 즐거움을 함께 누릴 생각이 있다면 (그런데 지금의 조르바님은

    너무 바빠 보여서 권하기 어렵지만) 인터넷 상으로라도 서로 좋아하는 화가,보고 싶은 화가

    좋은 전시회 소식 그런 것을 나누도록 할까요?

  2. 북극곰말하길

    잘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당.^_^

  3. 여이루말하길

    잘 읽었습니다. 메세지가 차분하게 전해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으로 종종 위클리에서 조르바님 글을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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