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내가 읽은 <자본> – 김해완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콩나물 버스, 이상한 사회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운이 좋지 않은 날에는 노동자 파업현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도로를 점거한 경찰차와 노동자들 때문에 버스는 그야말로 굼벵이 걸음을 기고, 확성기를 통해 전 시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구호 때문에 머리까지 다 아프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고 어떤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나도 배웠다. 또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한다. 그러나 요구를 할 때는 ‘대화’라는 아름답고 다분히 평화적인 방법도 있지 않은가? 왜 이들은 요구를 할 때마다 매번 거리로 나오는 걸까? 당장 버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 최근, 버스를 이용하면서 또 다른 불편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파업현장에서 노동자의 반대편에 있던 버스회사가 야기한 것이었다. 상황은 이렇다. 나는 우리 집에서 연구실을 갈 때 A 좌석버스를 이용한다. 어느 날 B버스가 새롭게 등장했다. B버스는 A버스와 그 노선이 완전히 똑같았지만 ‘입석금지’ 버스라는 점이 달랐다. 의자개수에 맞춰 딱 39명의 승객만 태우는 것이다. B버스의 등장 이후, A버스의 차 대수는 반으로 줄었지만 B노선을 타지 못한 사람들까지 태우느라 언제나 차 안이 미어터지게 되었다. A버스는 접촉사고라도 한 번 나면 압사해서 죽을 것 같은 인구밀도를 하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더 적은 버스로 더 많은 승객을 태우는 A노선도 좋고, 일반 좌석버스요금보다 더 비싸게 받는 고급 B노선도 좋고. 그 사이에서 죽어나는 것은 매일 콩나물처럼 찌부러져서 지옥의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본주의는 나와 관계없는 곳에서 제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자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생활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느꼈다. 만약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래서 나의 이 분노를 전달한다면 버스회사가 내 말을 들어줄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버스회사의 행동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것이 아니다. 원래 회사의 목표는 이윤창출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자선가가 아니고, 이 사회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평등,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이런 단어로 구성된 나라다 – 이 말을 수도 없이 듣고 배웠다. 정말? 그러나 우리는 실제 경제생활에서 전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들의 필요와 욕구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의 이윤 획득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잘 보호하는 체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의 성격이다. 아마 버스회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버스를 안타는 건 네 자유야. 택시를 타던지 차를 몰던지 해.” 아니면 돈을 열심히 모아서 자본가로 계급상승을 하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 뒤에는 그에 대한 모든 책임도 개인에게 돌리겠다는 말이 숨어있다. 버스를 가로막고 파업을 하던 노동자의 심정은 내가 버스회사 앞에서 느꼈던 무기력 그 이상일 것이다. 노동자의 요구에 귀를 막고 툭하면 해고해버리는 회사. 회사는 노동자에게도 똑같은 논리로 대응할 것이다. 애초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서로 자유롭게 계약을 맺지 않았냐고. 싫으면 다른 데 가서 취직하라고. 그건 네 자유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참 이상한 일이다. 큰소리쳐야할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여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자본가를 먹여 살리는 것은 노동자다.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본가의 몫을 위해 잉여노동을 한다. 그러면 자본가는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를 주워 담는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자본가는 자리에 앉아서 노동자에게 더 빨리 일해라, 더 많이 일해라, 명령을 하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감히 자본가에게 대항할 수가 없다. 자본가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이윤을 얻을 수 있지만 노동자는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생계가 완전히 끊기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돈과 맞바꿈 하는 노동력이 주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인 이런 경제구조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애초부터 불평등하다. “자본 그 자체는 처음부터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평등하지도 않으며, 노동자는 이런 착취관계를 피할 수 있는 자유도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사회교과서에서 본 사진이 생각난다. 노동조합 대표와 회사 대표가 서로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이었다. 그 밑에는 ‘평화로운 노사관계’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설명문에는 한국이 노사관계가 안 좋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파업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외국 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기를 꺼려한다고, 따라서 평화로운 노사관계를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와 자본가가 평등한 관계인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면서, 권리를 침해할 때는 언제든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고 언제든지 화해할 수 있는 것처럼.

노사관계의 악화, 외국의 투자 감소, 이런 걸 신경 쓰는 것은 자본가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는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대화를 시도했다간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그 결과는 십중팔구 자본가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 뻔하다. 그런데 자본가가 이익을 위해 회사를 굴리는 것은 상식이지만, 노동자가 그 관계 속에서 완벽하게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 것 같다. 노사관계가 악화된 것을 노동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부터가 그렇다. “왜 자꾸 파업을 일으키는 거야!” 나도 그랬다. 언제까지 임금을 올려야 저들은 만족할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마치 노동자가 끝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불쌍한 자본가에게 더 더 더 높은 임금을 바라며 자기 친구들을 아무도 해고시키지 못하게 협박하는 것처럼 말이다. 합리화된 자본가의 상식이 마치 전체에 대한 상식인 것처럼 내 안에 있다.

실업자가 된다고 해서 이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실업자가 반드시 존재한다. 한 대의 기계가 몇 십 명의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기계의 기술도 점점 발전하므로, 결과적으로 실업자는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자본주의는 점점 자본규모를 증대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계속 취직이 이뤄진다. 자본가는 자신의 편의에 따라 실업자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실업자가 있기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인구의 자연적인 증가에 신경 쓰지 않고 자본을 축적할 수 있”으며, “임금상승을 억제 하고 자본가의 독재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실업자는 사회의 낙오자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결국 실업자든 노동자든 모두 자본가를 위해 존재한다. 심지어 버스마저도 자본가를 위해 굴러간다. 사람들을 편리하게 하려고 발명된 버스인데, 이제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 정말 이상한 사회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했다. 인간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자본주의는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그러나 잘 모르겠다. <자본론>이 이 세상에 나온 지 150년이 되었고 그 150년 사이에 사회주의 혁명, 소비에트 연합국 등 다양한 실험들이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는 누가, 무엇이 자본주의를 흔들 수 있을까? 그것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걸까? 무식한 내 눈에는 자본주의가 영영 존속할 것처럼 보인다. 나는 44만원 세대라는 웃기지도 않는 딱지를 붙이고 하루하루 이 사회에 편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창문너머로 보았던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몇 년 뒤의 내 모습이 될지 모를 일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버스의 행로를 막은 채 이제는 별 소용도 없는 파업을 하고, 나는 별 소용도 없는 항의를 중얼거리며 콩나물버스 속에 구겨진 채 괴롭게 아침저녁을 보내는 것이다.

– 김해완

응답 1개

  1. Q.Q말하길

    하루의 시작과 끝을 ‘지옥버스’, ‘지옥철’로 마무리 하는 일상에
    대해 교통시설 확충이 과연 해결이 될 수 있을 지 생각하게끔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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