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허트 로커> 전쟁, 광기, 영웅, 그리고 권력

- 서동욱(수유너머R)

<허트 로커>는 광기가 빚어내는 영웅성이 어떤 식으로 체제의 결함을 교묘히 가려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그리하여 영화가 현상 유지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권력과 얼마나 쉽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허트 로커>가 사상 최대 관객을 기록한 <아바타>를 누르고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각종 굵직굵직한 상들을 싹쓸이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권력과 쉽게 결합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트 로커>는 한편으로 이라크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에 투입된 미군들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체제를 유지하는 최고의 효과적인 수단으로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폭탄 해체를 임무로 하는 EOD반(폭탄 해체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의 긴장감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도시 전체를 이 잡듯 뒤지러 다닌다. 세 명인 한 조인 이들은 대장이 방호복을 입고 폭탄을 해체하면 나머지 둘은 엄호를 하는 식이다. 어느 날 폭탄을 해체하던 중 갑작스레 폭탄이 터지면서 대장이 죽게 되자 이에 새로운 대장 제임스 중사가 대신 투입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폭탄 해체 작업을 하던 이다. 그런데 새로운 대장은 첫 날부터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인다. 폭탄이 어느 쪽에 있냐고 묻더니, 로봇을 먼저 보내 주변 정황을 파악해보지도 않은 채 곧장 폭탄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둘은 깜짝 놀라 말리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이미 폭탄의 코앞까지 가 있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폭탄을 해체하고 유유히 돌아오는 제임스 중사를 보며 둘은 아연실색한다.

제임스 중사의 무모한 행동은 다음 번 작전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이번에도 그는 곧장 폭탄을 향해 돌진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전장을 빠져나온다. 계속되는 제임스 중사의 겁대가리 없는 행동에 둘은 서서히 놀라움을 넘어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허트 로커(Hurt locker)를 직역하면 ‘상처 입은 잠긴 것’ 쯤이 될 것이다. 이 은유적인 표현이 갖고 있는 상징성은 영화에서 매우 다층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상처 입은 잠긴 것’이 가리키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라는 땅일 수도 있고 이라크의 무고한 시민들일 수도 있다. 또는 전쟁의 참혹함 속으로 이끌려져 정신적 피폐함의 극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는 미군들 자신들일 수도 있다. 주목할 것은 상처 입은 여러 개의 자물쇠들이 서로를 향해 알 수 없는 시선을 내던질 때 전쟁이라는 이면 뒤에 은폐된 모종의 ‘상태’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미군들 자신이 이라크의 안전을 위한다는 정의감으로 폭탄을 해체할 때, 즉 정의로운 이들이 가엾은 이들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할 때 정작 피행위자들인 이라크인들이 주시하는 시선은 미군들에게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다가온다. 감사도 냉소도 아닌, 차도르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그 시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폭탄을 해체하고 있는 그들에게 멀리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이가 나타나자 미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든 자는 누구인가? 적인가, 민간인인가? 적과 민간인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에 놓이게 된 행위자는 갑작스레 주체와 객체의 구분점이 뒤틀려 버리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 순간,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애매성이 드러나면서 전쟁 속에 은폐됐던 한 가지 상태가 표출된다. ‘저들’로 묶여지던 정체성은 불분명해지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규정관계가 역전되면서 객체에게 규정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정의되지 않는 객체는 분명했던 자신들의 정체성도 모호해하게 만든다. 그 공포감이 미군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전쟁의 은폐된 상태를 보여주는 최고의 효과는 무엇보다 제임스 중사의 무모한 행동 속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제임스 중사의 무모함 이면에도 굳게 잠긴 자물쇠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873개나 되는 폭탄을 해체한 그는 외관상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폭탄 해체 전문가지만, 그가 폭탄을 향해 전진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내면을 걸어 잠그러 가는 일이자 더 이상 탈출구 따윈 없다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가 폭탄을 향해 뿌연 연기 속으로 아연히 사라져갈 때, 그때가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이 가장 두드러질 때이다. 어째서 그가 폭탄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공포감이 엄습해오는 것일까. 그는 참으로 당당하게도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보는 이는 ‘더는 안돼’라고 숨죽이게 되는 것일까. 마치 그가 들어가고 있는 곳이 세계의 비밀이 숨겨진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로 열어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관객은 제임스 중사의 무모함 속에는 어떤 절규 같은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어쩌면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폭탄의 진짜 출처가 아니었을까. 이라크의 안전이라는 허위에 가려진 자신의 오물 속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자기기만이었고, 허위에 가려진 오물을 뒤집어 쓴 자가 스스로 만든 구더기탕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임스 중사는 그 거대한 운동 앞에 던져진 개인이 어떤 식으로 추락해 가는지, 아니 어떤 식으로 그 운동을 체화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폭력에의 둔감함, 폭력에의 중독성이 체화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며, 썩은 내 나는 무언가가 신체에 습득되는 것을 자폭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제임스 중사의 이러한 행동에서 전쟁의 실제 성격도 드러난다. 한 번 발을 담군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그러나 명분은 여전히 정의구현이며 그것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광기로 무장한 영웅이 나타나야 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광기는 하나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립적인 묘사로 반쯤은 다큐멘터리라고 봐도 무방한 <허트 로커>가 아카데미의 보수적 논리에서 탁월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입맛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폭력에의 무감각으로부터 실현되는 광기와 그 광기가 빚어내는 영웅성이 희생정신과 정의구현이라는 명분과 결합하면서 매우 효과적으로 현행 유지를 시켜주는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엄청난 난관에도 불구하고’ 뛰어드는 제임스 중사의 이토록 공포스런 광경이 쉽게 반전에 대한 감각으로 도피하게끔 숨통을 트여주면서 보편적인 세계 평화에의 정신에도 적당히 부합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다.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됐어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제거하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글세, 나도 잘 모르겠어… 정말이야. 넌 내가 왜 그런지 알겠냐?” 완전한 판단 중지 상태. 제임스 중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아니, 갈 곳이 어딘가라는 질문조차 그에게는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묵묵히 쓰레기나 치우러 가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쓰레기를.

– 서동욱(수유너머 R)

응답 5개

  1. 박카스말하길

    ‘정의되지 않는 객체와의 마주침’
    그 이후의 주체의 선택을 ‘자폭’으로만 볼 수 있는지 궁금해요.
    저도 영화를 봐야겠네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 단단말하길

    동욱님….^^
    이 영화 꼭 볼게요~
    영화를 먼저 봤으면 좋았겠지만….
    동욱님의 해석을 벗삼아 꼭 봐야지~~~

  3. 탱탱볼말하길

    잘 읽었어요. 함 봐야겠네요. ^^ 다음 주말에 당직하는데 쉼터 식구들이랑 같이 봐야겠어요.

  4. 매이삼촌말하길

    좋게 보셨다니, 저도 감사드려요^^

  5. 매이엄마말하길

    저도 인상적으로 본 영화였지요. 영화속의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장면들에 대한 해석이 참 훌륭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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