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편집자의 말 – 엥겔스처럼 ‘좋은인연’ 만나려면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맑스의 여자관계는 어땠을까. 맑스가 무슨 면벽수행 하는 수도승도 아니고 학자에게 지고지순형 러브스토리를 기대할 이유는 없다. 그저 궁금증의 발로다. 알아봤더니 부인 외에 하녀에게 나은 자식이 한 명 있었다. 맑스의 공식인정은 아니고 여러 정황에 따른 추측이다. 맑스 혼외자식설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맑스가 죽은 후 그 아이를 엥겔스가 돌봐주었기 때문이란다. 이런 말들이 났으리라. “엥겔스가 돌봐주는 걸 보니 맑스의 자식이 틀림없군!”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의 깊은 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두 사람은 40년 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공유하며 우정의 궁극을 실현했다. 방직공장 사장 아들로 태어나 부유했던 엥겔스는 늘 빚에 허덕이는 맑스에게 매달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스폰서 역할을 자처했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은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면서 다양한 정치, 경제, 전략 전술 문제들을 토론하는 사상적 동지였다.

맑스가 죽은 후 엥겔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이끌었고, 맑스가 살아있을 때 완성하지 못한 <자본론> 2권과 3권을 정리해서 출간했다. 둘은 <공산당 선언> <독일이데올로기>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맑스의 임종도 엥겔스가 지켜보았다. 거기다가 ‘몰래한 사랑’의 자식까지 거둬주었으니, 엥겔스는 마치 친정엄마처럼 맑스의 평생AS를 담당한 셈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자본>강의 뒷풀이에서 나누는데 어떤 이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아… 나도 엥겔스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모든 이의 로망일 것이다. 고흐에게 테오가 있고, 맑스에게 엥겔스가 있고, <오래된 정원>에서 사회주의자 오현우에게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몸도 주는’ 한윤희가 있었듯이,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을 평생 곁에 두는 것 말이다. 방법이 아주 없진 않다. 강의를 맡았던 고추장의 정곡을 찌르는 말.

“먼저 엥겔스가 되어주세요. 그럼 엥겔스 같은 친구가 생길 걸요.”

정답이다. 이론적으로 생각해봐도 그렇다. 너도나도 자기가 맑스인줄 알고 엥겔스만 기다린다면 영혼의 짝을 만날 확률은 제로가 된다. 맑스는 김나지움 졸업논문에 이미 ‘인류의 해방과 행복에 기여할 것’임을 표명하고 치열한 자세로 살아왔다. 그런 사람을 알아보려면 같은 층위를 맴돌아야 한다. 같은 지평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길이 열리고 통하여 서로를 보듬고 키울 수 있다. 맑스는 엥겔스를 만들고, 엥겔스는 맑스를 만드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어제 후배의 고민을 듣고는 엥겔스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른을 갓 넘긴 그녀는 지난해 자궁내막암 수술 후 완치됐다.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닥친 발병에 힘들어했으나 잘 이겨냈고, 올해는 직장에도 복귀했다. 매일 아침 긴 생머리 찰랑거리며 출근 준비를 서두는 건강한 직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며칠 전 아플 때 동병상련의 위로를 많이 받았던 젊은이들 암투병 동호회 번개모임을 나갔는데 거기서 한 청년이 ‘좋아한다’며 고백을 해왔다는 것이다.

“니 미모 죽지 않았구나! 잘됐네.”
“나도 기분이 좀 좋긴 했는데… 언니, 나 이런 생각 웃기고 이기적인 거 아는데..아픈 사람 싫다.”
“음..그래. 너도 힘들었으니까. 아픈 사람 만나기 두렵겠지.. 위로 받고 싶은 마음 이해해.”

나라도 우선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일단 대한민국은 남자 품귀다. 괜찮은 사람은 이미 품절남이고 암 투병 병력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핏줄타령 안 하고 아이 입양해서 키우는데 동의할 따뜻한 대인배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엥겔스를 만날 확률처럼 말이다. 오직 한 길, 내가 엥겔스가 되는 수밖에 답이 없다. 즉 후배의 경우라면 ‘나를 감싸줄 영혼의 짝’을 만나기 위해선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마음 다해 감싸줘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말대로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그런데 차마 말 못했다. 고백남이 뇌종양이다. 드라마 찍으라고 하기엔 이제 막 몸 추스른 그녀에게 가혹한 일이다. 또 순애보가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것도 아니다. 끌리지도 않는 사람이랑 억지로 연애하라는 게 아니다. 다만 고백남 문제를 떠나서 사랑에 대처하는 자세를 전향적으로 사유할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서른 넘으면 ‘연애 현역’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가슴을 활짝 열어두어야 빛과 바람과 사람이 드나든다. 현실계에서 사랑의 감정을 작동하는 훈련은 중요하다. 감성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부지런히 펌푸질 해서 마음을 덥혀놓아야 마음의 온도가 맞고 파장이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실은 후배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먹은 카페라테 거품처럼 부드럽고 치즈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달달한 사랑을 기다리면, 사랑은 영원히 없다. 네가 누군가의 삶을 품고 응원해주는 방법으로 건강한 사랑을 창조해봐. 현실을 회피하고 관념으로 차단하면 기회는 점점 줄어들어. 이혼한 사람, 아픈 사람, 돈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 힘들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현실로 돌파해보면 그 안에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니체도 그랬거든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그런 곳에서 일어난다고.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나는 이 명제 열렬히 지지한다.”

커밍순 ‘부커진R’

이번 호는 맑스 버전 ‘우정사’입니다. 그 옛날, 맑스와 열애에 빠졌던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이 시대, 맑스라는 물음을 다시 던져보고자 했습니다. 10대, 20대, 30대는 자본을 왜 읽고 어떻게 읽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고병권, 박정수, 정정훈의 글은 6월 말에 나올 <부커진 R>(그린비)의 예고편입니다. 한 달 후 본방사수 부탁드립니다. ^^

참, 마감에 임박해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지난 14호 밍글라바코리아 ‘민주화 운동가를 탄압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소개된 얘밋씨가 석방됐다고 합니다. 마침 다음호가 ‘밍글라바코리아’ 특집이오니 기대해주세요. 밍글라바는 미얀마의 인사말로 “축복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밍글라바 코리아! 밍글라바 맑스!

– 은유

응답 1개

  1. 단단말하길

    은유님~^^
    글 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근데 엥겔스처럼 되는거 쉽지않아요~
    정말 되고픈 맘은 큰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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