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교를 아십니까
지금도 간혹 그런 꿈을 꾼다. 시험 보는 꿈. 꿈속에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시험을 본다. 꿈에서 자주 치르게 되는 시험 과목은 물론(?) 수학이다. 시험지를 보니, 모르는 문제가 절반 이상이다. 정신없이 풀다 보니, 답안지를 하나씩 밀려 썼다. 시험 종료 종이 쳤는데, 등에서 진땀이 난다. 악몽이다. 휴,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철없이 시험 보는 꿈을 꾸다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험에 대한 강박 관념이 내 무의식 속에 이렇게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남아 있었구나 하는 씁쓸함과 동시에 시험이 주는 중압감이라는 게 얼마나 큰지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차라리, 시험이라는 거 너무 의식하지 말고 살았더라면, 좀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해 보기도 한다. 내가 아들 녀석에게 시험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최대한 자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에게 나의 이 말은 언감생심, 얼토당토 없는,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한 말로 치부될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소위 중간고사 기간에 참으로 황당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했다.
지난 4월 중순 무렵이었다. 내가 자주 다니는 도서관 현관문에(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책을 빌리기도 하고, 열람실에 앉아 책을 읽고, 매점 가서 밥 먹고, 컴퓨터 작업을 하며 소일한다.) 커다란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4월 30일까지는 시험 기간이니, 도서관에서 정숙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학원 다니기도 바쁠 텐데, 굳이 도서관에 올까 하는 나의 의구심은 곧 거짓임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시험 기간 막바지에 도서관으로 몰려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4월 둘째주 토요일은 절정에 달했다. 그 날도 역시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자기도 같이 도서관에 가겠단다. 평소에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던 녀석이 시험을 본다고 하니, 걱정이 되긴 됐나 보다. 도서관에 가겠다는 소리를 다 하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도 길러 줄 겸 아침을 일찍 먹고 도서관으로 갔다. 그러나 8시쯤에 가도 자리가 많겠거니 하고 안심했던 내가 잘못이었다(도서관 열람실은 7시에 문을 연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기다리는 건 도서관 현관과 계단 아래까지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의 줄과 대기하고 있는 사람 수만 해도 240명이라는 통보였다. 더욱 놀란 건, 사람들이 새벽 5시부터 와서 줄을 섰단다. 평소에 그다지 붐비지 않던 도서관에 익숙해 있던 나였던지라,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였다.
결국 망설임 없이 우리는 되돌아서야 했다. 공부 한번 해 보겠다는 아들 녀석의 꿈(?)도 물거품이 돼 버렸고, 우리는 감탄사를 내두르면서 동네 청소년 독서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다행히 그곳에서는 빈 강의실까지 열람실로 임시 제공하고 있어, 겨우 교실 같은 자습실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서부터다. 그렇게 힘들게 애써서 열람실에 들어온 학생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옆 사람과 잡담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몸을 흔드는가 하면, 과자를 사 들고 들어와 먹거나, 심지어 고무줄을 손가락에 끼우고 장난을 친다. 매점에 갔더니 더욱 가관이다. 교과서를 펴 놓고 동전 뒤집기 놀이를 하는가 하면, 큰 소리로 장난을 치고 놀고 있는 학생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혹 학부모가 열람실에 들어와 공부하는 아들 녀석의 등을 토닥거려 주거나 간식을 가지고 와서 먹이고 가는 부모도 있다. 오랜만에 공부하러 도서관에 온 아들 녀석의 눈치를 보니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음부터는 집에서 혼자 공부하겠단다. 도서관에 좀 길들여 보겠다는 나의 의도도 무색해져 버렸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그날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러 학교에 갔으니, 이제 도서관도 좀 여유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그런데 직원이 나를 쳐다보더니, “공부하러 온 거 맞아요?”한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네, 맞는데요.”하며 어깨에 메고 온 가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직원이 하는 말, “자리 잡으러 오는 엄마들이 많아서요.”한다. 이 무슨 황당한 얘기란 말인가. 알고 보니, 엄마들이 자녀들이 시험 보러 간 사이에 도서관에 와서 자리를 잡아 놓고, 책 한 권만 덩그러니 놓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 우리나라는 시험에 살고 시험에 죽는 나라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 정도면 시험이 단순히 앎을 평가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처럼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이 시험에만 매달리고 있는 이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시험과 입시, 취직이라는 목표에서 한눈도 떼지 말아야 하는 이 현실이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까? 시험에 갖다 바친 그 어마어마한 시간과 열정과 노력이 그만큼의 보상을 우리에게 해 줄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안겨줄 것만 같은데, 혹 이런 제도로 누군가가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혹시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등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중간고사 기간(?)에 마치 시험을 앞둔 수험생마냥 읽은 책이 바로 조지오웰의 <1984>와 김진경의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 두 책은 배경, 인물, 주제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매우 많다. 우선 이 두 책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까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보다 더 암울할 순 없는 상황이 그려진다. <1984>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빅 브라더의 끊임없는 감시 하에 생각과 기억, 상상력마저도 조작당하며 살아야 하고,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에 나오는 아이들 역시 시계모자라는 이상한 모자(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념을 사라지게 하고, 오로지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지식을 암기하기 위한 용도로 쓰는 모자로, 시험과 관련되지 않은 기억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를 쓴 채로 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지배하는 권위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고통스러운 곳으로 끌려간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작품에는 모두 그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게 아닌데’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심을 하고 바꿔 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인물들이다. <1984>의 경우에는 그 저항의 과정이 너무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워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며(조지 오웰이 대단한 작가라는 경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함께 힘을 합쳐 작은 저항을 시작한다.(판타지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겠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그래도 <1984>보다는 덜 암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두 책을 읽으며, 가장 유사하다고 느낀 점은 불행하게도, 지금 이 시대와 계속 겹쳐서 읽힌다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섬뜩할 정도로 지금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작품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함께 엮어가며 읽게 된다는 점에서 읽는 속도를 더디게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책들이어서,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한번쯤 의심해 보자. 이 시험이라는 어마어마한 종교 같은 제도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 김대경(고등학교 교사)
마흔이 넘은 저도 시험에 대한 악몽을 자주 꿉니다. 대학 때 F를 맞는 공포로 눈 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으로 봤던 시험지가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다른 버전으로는 대학입시를 또 치러야 한다면서 어느 대학 어느 과를 가야 하나 고민하는 꿈, 의사시험을 또 봐야 한다고 공부하는 꿈 등등.
남자들은 군대 다시 가는 꿈을 자주 꾼다는데, 저는 반복해서 시험을 치르거나 레지던트를 또해야 한다는 식의 악몽을 서너달에 한번은 꼭 꾸거든요. 빡빡한 조직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탓에, 중간중간 직장왕따 관련된 꿈도 꾸고.
깨고 나면 5분간 멍하다가 현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어요. 악몽의 효능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