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가장 먼저, 가장 아프게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가장 먼저, 가장 아프게
– <울보 바보 이야기> 윤구병 글 / 홍영우 그림 / 휴먼人 어린이

1.

‘문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은 적이 있었다. 미련퉁이 같은 여자. 사랑도 고행처럼 하는 여자.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여자. 서영은이 그려내고 있는 <먼 그대> 속 그녀, 문자는 내가 읽었던 여느 소설 속 주인공과는 너무도 달랐다. 너무 어수룩하고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건 불현듯 마주칠 것만 같았고, 그럼 단박에 척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너무나 평범해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쉽사리 찾아낼 수 없을 것도 같았다. 있으되 표시나지 않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분명히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여자. 내게 문자는 그런 이미지로 다가왔다. 물과 같은 여자. 낮게 더 낮게 자신을 수그리는 여자.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여자.
그 여자에 대한 흠모는 그 여자를 낳은 작가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져서, “작가는 가장 뜨겁게 가장 나중까지 우는 자”라는 그녀의 말은 오래도록 나를 달구었다.

요즘처럼 울어야 할 일이 많을 때면, 울고 싶은 일이 많은 때면 자주 그 말이 생각난다.

‘가장 뜨겁게 가장 나중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가장 나중까지 울 자신은 없다. 아니다. 뜨겁게 우는 시늉은 할지언정, 가장 뜨겁게 울 수 있는 자신도 없다. 가장 먼저 울 자신도 없고, 가장 아프게 울 자신도 없다. 가장 뜨겁게 가장 나중까지 울 수 있는 사람이란 지독한 미련퉁이거나 바보일 게 뻔 한데 그런 바보로 살아가기엔 난 지나치게 영악하기 때문이다. 아니, 바보로 살아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더 바보 같은 그 여자, 문자가 그리운 지도 모르겠다.

2.

<울보 바보 이야기>는 농사짓는 철학자 윤구병이 쓴 그림동화다. 작가는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구수하게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풀어낸다. 능청스럽게 ‘옛날 어느 마을’에서 일어났던 것 인양 이야기 한 자락을 펼쳐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려내는 모습은 가장 문명적이고 현대적인 요즘 우리네 풍경이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소통하지 않는다. 나누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하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누가 곁에 오기만 해도 싫어서 몸서리를 친다. 작가는 그게 모두 다 병에 걸린 탓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슴이 얼음덩이처럼 꽁꽁 얼어붙는 돌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림 속 제각기 떨어져서 다른 곳을 보거나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 표정이 압권이다. ‘돌림병’에 걸렸으면서도 자신이 그런 못된 돌림병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현대인들처럼, 그림 속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고통을 이겨낼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

그러자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나선다. 기운이 다 떨어져 잘 걷지도 못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방법을 모색한다. 마을 한가운데 섶을 쌓아 불을 피워서 사람들을 끌어내려고 애써 보기도 하고, 해님에게 빌어 가뭄이 들고 곡식이 타들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연출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더 충격적인 건 한번 얼어붙은 마음은 그 옛날 즐거웠던 기억도 되살려내지 못하며,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척박한 현실 조건에도 눈을 감게 하는 무기력증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결국 할아버지가 길을 나선다. 다리를 몹시 절름거리는, 할아버지를 닮은 늙은 노새와 꽁무니에 매단 불이 희미하다고 동무들에게 놀림감이 된 반딧불이와 같이. 늙은이와 절름발이와 외톨이. 세 길손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돌림병을 물리칠 약을 찾지만, 쉽지가 않다. 돌림병이 이미 온 나라를 휩쓴 상태라, 사람들은 손님을 반길 줄 모른다. ‘말을 붙이면 말없이 노려보거나, 획 고개를 돌려 버리거나, 땅에 침까지 퉤 뱉어’버린다. 손님에 대해 예의를 차리기는커녕, 손님을 적으로 돌릴 지경이다. 이 부분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환대하기는커녕, 반목하고 질시하고 핍박하며 범법자 취급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의 부끄러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길을 간다. 그러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아이를 만난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여지껏 만났던 사람들과 좀 다르다. 노새를 보자마자 노새의 아픔을 알아본다. 노새의 절름거리는 다리를 꼭 붙들고 “불쌍해, 불쌍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요, 연민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연민이란 강한 자가 약한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너와 내가 같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생기는 마음이다. 동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의 마음, 그것이 진정한 연민이다. 작가는 아이를 통해 연민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아이의 뜨거운 눈물은 노새의 절름거리던 다리를 치유하는 기적을 낳는다. 아이는 반딧불이의 고통 또한 알아챈다. 동무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외로웠을 반딧불이의 마음을 쓰다듬으며 운다. 아이의 눈물은 반딧불이 꽁무니에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불빛을 되살려준다.

기적을 일으키는 건 아이만이 아니다. 세상 떠날 날이 오늘내일하면서도 할머니는 꽃 같은 웃음으로 할아버지를 맞고, 할아버지의 고민을 알아챈다. ‘다 잘 될 거라면서’ 위로까지 한다.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다. 할머니의 말 한 마디가 ‘하도 오래돼서 어떻게 울어야 할지도 잊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눈물샘을 건드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울자 노새도 울고 반딧불이도 울고 그 자리가 온통 눈물바다가 된다.

이제 기적은 기적을 낳는다. 눈물이 시냇물이 되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빨래하던 아줌마들 마음을 녹이고, 고기를 잡던 남자들 눈빛을 순하게 하며, 서로 어울리게 한다.

울보 바보 아이가 지나는 마을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아이는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을 만나면 영락없이 “불쌍해, 불쌍해”라면서 먼저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울음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울음을 되찾아 주며,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온갖 생명들을 되살린다.

작가는 ‘자기’라는 벽에 갇혀서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연민’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다. 울보 바보가 보여준 연민은 얼어붙었던 사람들 마음을 녹이는 치유제이며, 동무를 부르는 손짓이며,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그건 바보가 그랬듯이 나와 타자를 가르는 분별을 없앴을 때, 내가 곧 타자임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타자의 아픔과 고통이 바로 내 아픔과 고통이 되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자크 아탈리는 ‘형제애’를 강조한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으니 나 혼자 행복해서는 행복을 만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이기적인 합리주의가 모든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이타주의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데, 그것이 바로 형제애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형제애란 “과거에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거나 미래에 살게 될 모든 존재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같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울보 바보 아이가 이루어내는 기적의 공동체이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의 모습일 게다.

그러기 위해 우리 스스로 울보 바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꽁꽁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녹일 울보 바보의 눈물을 마냥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떠나가 버린 울보 바보들을 애도하느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가장 아프게 우는 울보 바보들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 달맞이

응답 4개

  1. 둥근머리말하길

    예전엔 몰랐는데요, 제대로 잘 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ㅜㅜ 눈물의 힘을 생각하게 하는 글, 고맙습니다.

    • 달맞이말하길

      둥근머리 샘, 나두 정말 제대로 잘 울고 싶어요. 지난 번에 자기가 말해준 이계삼 샘 책 읽어요.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요. ‘영혼 없는 사회’라는 말이 가슴에 팍팍 와 닿고, 권정생 선생님도 생각나고, 여러 가지 두루두루 생각이 나요. 고마워요.

  2. 말하길

    아프게, 길게 울지도 못하면서, 울고 싶은 날, 글 잘 읽었습니다.

    • 달맞이말하길

      샘, 감사합니다! 감상이 아니라, 눈물이 가져오는 치유의 힘, 눈물이 가져오는 소통과 연대의 힘…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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