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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이주노동자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이상한 나라의 이주노동자

– 상상 속 이주노동자를 부수자!

저는 파트타임으로 중학생 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로 몇 번을 설명해도 머리를 갸우뚱하는 얘들을 상대하고 있죠. 하루는 중2 얘들에게 문제 풀이 숙제를 왕창 내줬습니다. 그랬더니 넉살좋은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그러시다가 나이 마흔에 스물여덟 필리핀 외국인 노동자랑 결혼하실거에요.” 마치 저주라도 내리는 표정으로 음흉하게 저를 쳐다보면서 말이죠. 저는 대뜸 “야, 나이 마흔에 스물여덟 영계를 만나면 나야 행운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헐~”당황해하는 아이에게 저는 물었습니다. “너 필리핀 외국인노동자를 만나본 적은 있니?” “아뇨!”

이 아이 말고도 외국인노동자 즉, 이주노동자라면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면 좋겠으나, 제가 만난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저마다 하나씩은 한국인 혹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자와 결혼하라는 말이 ‘저주’가 되는 사회니까요.

며칠 전 정부는 ‘G20 성공적 개최 = 외국인 범죄 소탕 = 불법체류자 단속 강화’라는 묘한 공식을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G20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생각이면 회의 안건이나 잘 작성할 요량이지 왜 범죄 소탕 그것도 외국인 범죄 소탕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G20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내국인 범죄율의 절반도 못 미치는 외국인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는 주장도 우습지만, 외국인 범죄 소탕이 불법체류자 즉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으로 이어지는 비약은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이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잠재적 범죄자(혹은 탈레반)이라는 등식 하나가 빠져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대부분 언론 또는 사회화된 이슈-의제를 통해서만 이주노동자를 만납니다. 위와 같은 공식이 가능한 이유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실제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상상 속의 이주노동자’니까요. 텔레비전이나 정부를 통해 상상된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은 처참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불쌍한 사람, 한국 법을 어기고 돈 버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는 불법체류자, 잠재적인 범죄자 그리고 테러리스트. 그리고 상상력의 효과는 잔인합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범죄자처럼 마구잡이로 단속·구금당합니다. 2003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 단속과정에서 다치고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은 일일이 다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2007년도에 발생한 여수외국인보호소(이주노동자들을 추방하기 전에 구금하는 곳)화재 사건이 증명했던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구금 환경도 그대로입니다. 일단 미등록이주노동자처럼 보이면 무조건 잡고 보는 단속 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이것을 모두 증명한 사건이 발생했죠. 몽골 출신 유학생이 단속반에 무조건 잡혀갔다가, 아무 설명 없이 풀려난 사건입니다.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간 후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직원들이 와서 어떤 문서를 설명도 없이 그냥 사인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사인했다. 그리고… 줄을 세워 남녀 구분해 양쪽으로 나뉘어 탈의실로 들어가게 했다. 거기서 하의 속옷만 남기도 옷을 다 벗으라고 했고 두꺼운 운동복 같은 것을 주었다. 여성들에게도 하의 속옷만 남기고 다 벗으라고 했다.… 여직원들은 “몽골은 가난한 나라인데 왜 이렇게 비싼 거 많이 가지고 있냐”고 말해 매우 기분 나빴다. 작은 방에 19명이 들어가게 했다. 그 안에는 공기도 없고 매우 더웠다. 저녁으로 밥이랑 국을 주었다. 그런데 밥도 밥 같지 않아서 안 먹었다. 3일 동안 거기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마 그 사람들은 이 형편없는 밥을 너무 배고파서 먹었을 것이다. …밤 11시 전에는 눕지도 못하게 하고 밤 11시 넘으면 앉아있지 못하게 했다.… 방의 불도 계속 켜 두었다. 그런데 작은 베개만 있고 바닥에 깔 이불도 없었다. 너무나 황당했다. …출입국 직원들은 나를 풀어줄 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다.”

쉰들러리스트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한국사회에서도 매일같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같아 보이면 잡고, ‘저주’의 대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둬놨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추방시켜버리고 있습니다. 정말 ‘너무나 황당’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에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상상 속 이주노동자들은 소위 한국인들과 평등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장은 대부분 2차 부문 노동시장에 속해있습니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소위 3D(Dirty Difficult Dangerous)노동을 해야 하는 중소영세사업장들이죠. 이 노동시장은 비교적 고용이 안정적인 1차 부문 노동시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1987년 이후 한국에도 노동시장이 1,2차 부문으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로는 실업률이 아무리 높아도 내국인들이 찾지 않는 2차 부문 노동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곳은 주로 등록/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주노동자들을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고마운’ 존재로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환율차에 따라 비교적 큰돈을 벌어서 출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이니까, 대우를 조금만 더 잘해준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특히 빈약한 삶의 질 속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단지 대우를 잘 받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은 “한국의 주변부 포디즘(고강도 노동, 건강과 안전에 대한 예방조치의 부재, 낮은 임금, 심한 권위적 관리체제, 높은 노동이동률 등)이 지니는 속성과 더불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정부 정책과 결합하고, 서로를 강화하는 것에서 기인”합니다.(그레이, 2004)

이주노동자들에게 대우를 좀 더 잘해주자는 마음가짐으로 넘어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에서 겪는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력 등의 문제는 한국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국민국가 틀을 넘어서 형성되는 중심(1차 부문)/주변부(2차 부문) 노동시장 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이주노동자에게는 넘어서기 힘든 현실이 한 가지 더 있죠. 바로 이주노동자들 위에 그어지는 국민/비국민이라는 분할선입니다. 사실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 인권 혹은 시민권이란 결국 국민의 권리에 다름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해도, 세계노동기구(ILO)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명시해도 대부분의 국민국가는 이를 ‘국민’에 한정하곤 합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죠.

요새 지하철/버스 정류장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묻지마 단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누군가를 환영할 능력이 있기는 한가요?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살고 있지만 국민(nation)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는 한 동네에 살지만 한국인과 동등한 시민(citizen)도 아닙니다. 잘나가는 전문직 고학력 이주노동자들이나 시민권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있지요. 3D업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과 추방을 결정하는 출입국관리법과 고용허가제의 통제와 감시 하에 놓여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로부터도, 한국 땅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의 권리로부터도 배제당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배제는 한국인들이 위기와 불안을 느낄 때 다시 한 번 요긴하게 작동합니다.

경제 위기가 언급될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은 1순위로 해고되어 실제로 한국인 노동자들의 해고 바람막이가 될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쏟아낼 증오의 대상도 됩니다.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한국 사회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불온한 이주노동자들 몰아내면 마치 모든 문제가 잘 풀릴 거 같은 망상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게 되는 것이죠. 경제위기 때나 테러 위협에 관한 뉴스가 자주 보도 될 때, 그리고 G20과 같은 대외적인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을 때 이주노동자=범죄자가 함께 회자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논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이 전지구적 자본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면서 한국 노동시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과는 다른 지위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인 노동자와 다르게 3D 업종에 필요할 때 고용하고, 필요한 만큼 일시키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노동력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노동조합 운동 진영에서도 섣불리 이주노동자 운동에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한국 노동조합의 구성원이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임을 상기해봤을 때 당연한 일이죠. 이주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은 조합원들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거나, 아니면 조합원들의 이해에 반한다는 상상이 만연했으니까요. 어째든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시장과 국경이라는 분할선에 의해 이중적으로 배제당하는 동안, 한국 사회는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고 상상력만 키우고 있었습니다. 불쌍하고 위험한 이주노동자라는! 그리고 이 상상, 아니 망상을 걷어내는 작업은 이주노동자들 자신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현실 속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제하는 한국 사회를 향해 ‘나도 같은 노동자고 인간이다’라고 외치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자로서도 또한 시민으로서도 배제당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땅에서 노동 이외의 활동을 벌인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심지어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니요?! 하지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합원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해줄 거대 노조도 없고, 이주노동자 문제 해결이 임금인상과 해고 금지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울의 이주노동자노동조합(MTU)과 대구의 성서공단노동조합(STU)에서 직접 자신들의 운동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을 형성하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법제도 개선을 싸움을 벌여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몇 차례에 걸쳐 그들과 대화하면서 발견한 공통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왜 한국인들은 이주노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가, 한국사회는 이주노동자를 정시(正視)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경험한 한국인·한국 사회는 옆에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보지 않고, 상상 속 이주노동자들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바로 쳐다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이주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 한국 노동시장과 이주노동자를 통제·감시하는 한국의 법제도를 바라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나라한 한국 사회의 한계를 정시하고 넘어설 능력의 부족을요. 그럴 때 가장 간편한 방법이 상상 속으로 도망가거나,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한국 사회 안에서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의 존재는 그들이 “단지 욕구·불평·항의의 존재들이 아니라 근거와 담론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자, 그들이 근거와 근거를 대립시키고,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의 증명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의 활동은 한국 사회가 당연한 듯 전제로 하는 이주노동자를 깨고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노동자에게는 노동 3권이 있다’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 안에서 동등하게 대결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긍정하고, 그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주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 문제 역시도 해결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권리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주노동자 문제도 보장해야 해요. 아니면 한국 사회 문제 해결되기 힘들어요.”

이주노동자 문제 즉, 한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은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갈 것인지는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항상 이후가 중요한 법이니까요. 우선 막연한 상상과 증오를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주노동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주노동자와의 만남이 저주가 되는 이상한 사회를 문제 삼는 모험이 시작될 수 있겠지요!

– 죠스(수유너머 R)

응답 1개

  1. 연초록말하길

    왜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가 라는 말이 마음을 울리는군요.

    사실 국민이라고 한 마디로 규정해도 국민안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존재하듯이

    이주노동자라고 카테고리화하면 사람들 각자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단일 집단처럼

    느껴지기 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직접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고 ,그런 기회가 없어서 제겐 아직 구체성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수유 위클리에서 글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창을 만난 기분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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