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부정의 쾌락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부정의 쾌락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안 가느냐, 깡충깡충 안 뛰어서~” 취침 전 침대 쇼에서 매이가 이상하게 노래를 부른다. 노래 가사를 ‘안 부정문’으로 바꿔서 부르는 것이다. ‘안’자를 여기 저기 넣어보면서 까르르 웃는다. “곰 세 마리가 안 한 집에 있어, 안 아빠곰~ 아빠곰은 안 뚱뚱해~” “매이야, 왜 그래? 이상해!” 하니까, 매이는 “안 이상해” 하며 또 까르르.

‘안 부정문’은 누구한테 배운 걸까? 요즘 매이의 언어습득은 거의 폭발적이다.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혼자서 터득한 것일 게다. 텔레비전과 일상생활에서 접한 말들을 마치 레고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맞춰보면서 거의 완벽한 성인 언어를 조립해 낸다. 어느 순간 ‘안 부정문’의 용법을 발견했을 것이고 다른 어떤 구문보다 활용도가 높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게다가 이 ‘안’의 ‘부정’ 용법은 주어진 상황을 일거에 뒤집어 반대되는 상황을 창조하는 놀라운 매력이 있지 않은가.

단지 문장 가운데 ‘안’자만 넣는 게 아니다. 미운 네 살을 맞아 요즘 매이는 ‘부정의 정신’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목욕할 때 욕조에 들어오기 전에 ‘쉬’ 하라고 하면, 안 마렵다면서 그냥 들어와서는 보란 듯이 오줌을 눈다. “욕조에 쉬하면 안 돼!” 하면, 매이는 응기양양하게 “욕조에 쉬하면 됩니다~ 딩동댕~” 하며 손을 입에 대고 깔깔깔 웃는다. 국수를 좋아해서 자주 끓여 주는데, 요즘은 몇 젓가락 먹다가 곧 장난을 친다. 손으로 건져 먹어서, 내가 “손으로 먹으면 안 되는데” 하면, “손으로 먹으면 되는데~” 하면서 국수발을 조물락거리며 옷에 칠갑을 한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나도 욱한다. 그래서 윽박지르듯이 “안 된다고 했지!” 하면, 예전 같으면 ‘으앙~’ 하고 울다가 “아빠, 미안해요” 라고 했을 텐데, 요즘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알몸에 국수칠갑을 하며 지금은 매이 옷장으로 쓰는 아기용 침대에 올라가서 “매이 잡으면 안 하지~” 한다.

하루는 아내가 목욕을 하면서 ‘청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줬다. “옛날에 엄마가 하는 말에 반대로만 하는 청개구리가 살았어요. (…..) 그래서 엄마가 죽으면서 시냇가에 묻어 주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 말대로 시냇가에 묻었대요.” 하지만, 죽음의 비극성과 참회의 역학관계를 알지 못하는 매이는 멀뚱멀뚱 듣더니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청개구리? 꺄르르. 청개구리래. 재밌다. 엄마 또 해줘” 한다. 다 씻고 나서 내가 큰 타월로 매이를 감싸고 건져 올리며 “어이구, 이 청개구리야!” 했더니 매이는 청개구리처럼 내 어깨를 밟고 올라와 양발로 내 목을 감싸며 짝 달라붙는다. 그것도 모자라 내 어깨에 발을 딛고 벌떡 일어서서 거실 천정에 머리를 부비며 행여 떨어질까 손으로 붙잡고 안절부절 못하는 내 위에서 재밌다고 난리다. (아내는 “뭐야? 서커스야?” 하며 위험하다고 경악한다.)

관심이 부족했나? 자기 행동에 대해 피드백을 잘 안 해주는 엄마 아빠에게 섭섭했나? ‘반대로’ 하면 엄마 아빠가 크게 반응한다는 걸 알고는 장난치려고 이렇게 도발을 하는 걸까? 그래서 심심해하는 것 같다 싶으면 “매이야, 책 읽어줄까? 아빠 청소할 건데, 청소기 위에 올라탈래? 걸레질할 건데, 등에 올라탈래?” 하며 ‘반대로’ 놀이를 원천 봉쇄하려고 해 봤다. 자칫 하다가는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하라는 건 안 하는 청개구리 습속이 굳어질까봐 걱정되어서. 그래도 ‘안 부정문’의 매력과 ‘반대로 하기’의 흥미는 떨칠 수 없나 보다. “안 잘못 했습니다~” “치카치카 안 해도 됩니다. 딩동댕~” 엄마젖 물고 잡아 늘이며 “찍~뽁” 소리내기, ‘치카치카’ 안 하려고 도망 다니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알몸으로 술래잡기 ….등등. 괜한 힘만 쓴 것 같아 억울하다.

그냥 인생에 처음으로 맛보는 ‘부정의 쾌락’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앞으로 매이의 인생에 부정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반대로 해야 할 명령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특히 부모의 생각과 명령이야말로 한 인간의 삶에서 부정과 억압의 대상으로서 가장 은밀한 쾌감을 주지 않는가. 예전에 어떤 광고에서 곰 인형을 쓴 사람이 춤을 추며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고 노래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며 한편으로는 ‘한국의 가족주의도 발전하긴 했구나. 아버지의 명령이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금언이 되다니, 게다가 “즐겨라” 라는 소비자본주의의 명령을 발하는 아버지라….’며 놀라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곰의 탈을 뒤집어 쓴 저 사람은 곰처럼 두 발로 서서 외설스런 쾌락을 즐기는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아버지(곰)와의 동일시로 은폐하는 편집증 환자가 아닐까’ 라며 어설픈 정신분석을 해보기도 했다.

매이가 앞으로 어떤 세계관을 가질까 아내와 얘기를 나눌 때가 종종 있다. 아내는 ‘부정을 거쳐 결국 큰 틀에서는 같아질 것’이라며, 엄마 아빠의 세계관과 비슷하리라 낙관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자식은 부모의 욕망과 명령을 부정(혹은, 억압)하기 마련이며, 매이가 꼭 우리처럼 소위 ‘정치적 올바름’ 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설사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계관을 드러낸다 해도 그것은 반대의 욕망을 억압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그럼 매이가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하고 묻는다. 글쎄…아니길 바랄 뿐, 우리의 세계관이 매이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우리 자신이 좋은 삶을 사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매이에게 부정의 쾌락을 주는 명령어로 작용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앞으로 매이에게 “하지 마”라든가, “해야 돼!”라는 말은 삼가고 더 많이 놀아줘야겠다.(애고, 서커스 하느라 어깨가 빠진다!)

– 매이아빠

응답 2개

  1. 달맞이말하길

    매번 느끼지만 정말 실감나요.
    메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날로 야물어가는 메이도 보기 좋고,
    참 현명하게 대응하는 엄마와 아빠도 보기 좋아요.
    어깨가 빠져도 열심히 봉사(?)하셔요.
    낭중에는 것도 그리워질 지 모르니.

  2. 모모말하길

    매이는 정말 좋겠어요.
    완벽한 부모를 두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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