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아버지가 늙는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아버지가 늙는다.

사람은 누구나 늙기 마련이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그저 세월에 몸을 맡긴다는 것 외에도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음을 뜻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늙어도 나의 부모는 늙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늙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는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내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아버지가 늙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또래 친구들의 아버지들과는 좀 다른 구석이 많았다. 단 한 번도 나에게 ‘공부하라!’ 는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에 ‘네가 공부한 만큼 딱 그 만큼의 남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니 알아서 하라’고만 하셨다. 그때부터 서서히 내가 공부한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나보다.

또 하나는 ‘여자도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는 것을 강조하셨다. 세상에는 치사한 남자들이 많다면서 운이 없게도 내가 그런 남자를 만난다면 당장 이혼할 수 있도록 스스로 능력을 키우고, 경제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일을 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어 왔다.

나는 여전히 창창한 27살 같은데, 어느 덧 마흔하고도 다섯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W-ing 친구들에게 주도적인 여성, 내면의 힘, 경제적 독립 등을 외치고 있으니 매 순간 순간 마다 아버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어주시고, 묵묵히 뒤에서 응원해주셨던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가 늙어가고 있다.

아버지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4~5년 전부터 이다. 했던 말씀을 또 하고, 또 하시더니 언어의 사용 폭이 대폭 줄어들 정도로 한정 된 주제의 대화만 나누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점점 더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말씀만 주장하시곤 하였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변화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이전에 ‘왜 하필 우리 아버지인가?’ 라는 생각에 빠져들어 아버지를 미워하고, 모든 것을 나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나의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렇게 마음속 감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내게 해주는 말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오로지 자기 앞가림도 잘 하지 못하는 아버지, 너무 일찍 총기를 잃으신 아버지만 원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졸이기를 반복하다가,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아버지를 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주위의 노인전문요양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물론 노인전문요양원은 종류도 많고, 수도 많다. 어디가 좋은 곳인지 판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지인의 소개로 몇 군데를 둘러봤지만 그 때에는 당장의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 되서 그랬는지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할까도 생각해 내기 어려웠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강화도를 참 좋아하셨다. 강화도에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서 좋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라 무조건 강화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역을 정해놓고 보니, 다른 기준이 생각났다. ‘시설’같지 않은 아담하고 예쁜 집! 그것이 두 번째 기준이 되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요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제 아버지가 머물 곳은 집이 아니라, 요양원이라는 것을 알려드렸다. 이번 겨울이 너무 추울 테니, 겨울만 지내고 나오자고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 곳에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함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알았다고 대답을 하시고는 줄곧 창밖만 쳐다보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셨고, 나의 마음은 여전히 흔들거리기만 했다. 그 곳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친절하다는 것’ 조차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긴장해 있었고, 날이 서 있었다.

‘원장님 저도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버지에게 너무 잘해주려고 하지 마시고, 저에게 과장해서 이야기 하지 말아주세요, 그저 있는 그대로만 전해주세요.’

그 곳에서는 조금만 지내면 아버지가 금방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자주 오니까 아버지가 그 곳 생활에 ‘적응’을 하기에 방해가 된다면서, 당분간 찾아오는 것을 멈추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3주 정도를 안 가고 있으려니 나는 아버지의 생활이 궁금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건강하신지? 다른 일은 없는 것 인지? 그러나 나 또한 사회복지사이기에 그 곳 사회복지사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3주 만에 만난 아버지는 그 곳 생활에 ‘적응’을 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하고 있었다.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자신의 의지를 쉽게 접기 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응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되돌아보니 나 또한 이 말을 자주 사용했었다. ‘우리 쉼터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고, ‘적응하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 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쉽게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적응’이라는 것은 삶의 의지가 꺾였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요양원에서 그토록 말했던 ‘적응’은 바로 아버지에게 삶의 의지를 꺾고 일정 부분 ‘포기’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무섭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적응’하지 못하고 계시다. 적당히 타협해서 ‘적응’하지 않고, 당신 방식대로 고집하고, 당신 방식대로 삶의 의지를 가꾸어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곳에서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것이고, 아직까지도 관심 영역 안에서 돌봄을 받고 계시는 중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자신의 삶의 의지를 놓지 않는 한, 계속해서 ‘적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가 삶의 의지를 포기할까봐, 그 곳에 쉽게 ‘적응’해 버릴까봐,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아버지와 영영 이별을 해야 할 시점이 도래할 테니까 말이다.

– 최정은(W-ing)

응답 1개

  1. 오징어말하길

    ‘적응’ 이란 ‘포기’의 다른 말이다.
    매 삶에, 매 관계에 적응하지 않고 사는 법을 익혀가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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