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멋진 여우 씨> 로알드 달 글 / 퀸틴 블레이크 그림 / 햇살과나무꾼 옮김

저자: 로알드 달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 책”을 쓴 작가. 로알드 달을 일컫는 찬사다. 그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뒤에는 현대인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 숨어 있다. 현대인의 비참하고 부조리한 일면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멋진 여우 씨>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과 여우의 한 판 승부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스스로를 엄청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란 족속과 그를 뛰어넘는 꾀쟁이 여우 씨의 대결이 유쾌하면서도 씁쓸하다.

골짜기 아래에는 농장이 세 개 있는데, 농장 주인들이 참 그렇다. 가진 것은 많으나 고약하고, 못되고, 치사하고, 비열하다. 닭을 키우는 보기스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닭을 한 마리씩 뚝딱 해치운 덕에 엄청나게 뚱뚱하고, 오리와 거위를 키우는 번스는 키가 너무 작아 배불뚝이 난쟁이 같고, 칠면조와 사과를 키우는 빈은 음식 대신 사과로 만든 독주만 마셔대 꼬챙이처럼 말랐다. 뚱뚱보, 땅딸보, 말라깽이.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다. 생각만 해도 웃기다. 지극히 우화적인 이 세 인물의 설정만으로도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감이 딱 온다.

골짜기 위에는 언덕이 있고, 숲이 하나 있다. 숲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아래 굴속에 세 농부의 적, 공공의 적이 산다. 인간의 표현을 빌자면 교활한 여우 씨가 산다. 밤마다 내려와 세 농부의 소유물을 훔쳐가니 좀도둑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기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세 농부는 의기투합해 여우를 잡기로 작정한다. 총들을 들고 지키지만 여우는 살살 그들을 피해 다닌다. 세 농부가 바람이 묻혀온 여우 냄새로 사냥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처럼, 여우 씨 또한 바람이 묻혀 온 세 농부의 냄새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박지원이 <호질>에서 도덕군자인 체 하는 북곽선생을 ‘여우같은 인간, 온 몸에 똥을 칠한 더러운 인간’이라고 질타하였듯이, 로알드 달 또한 여우 씨의 입을 빌어 세 농부를 ‘고약한 냄새를 독가스처럼 폴폴 풍기고’ 다닌다고 비아냥거린다.

세 농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번에는 여우의 주거지를 공략한다. 굴 앞에 숨어 있다가 여우가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총을 쏜다. 그 바람에 여우 씨는 동네에서 제일 근사한 꼬리를 잃고 만다. 여우를 놓친 세 농부는 바짝 약이 올라 여우 씨 일가족을 몽땅 잡을 계획을 세우고, 삽을 가져와 땅을 판다. 잠깐 목숨이 붙어있을 때 도망을 갈까 고민하기도 했던 여우 씨는 마음을 바꾸어 식구들과 함께 더 깊이 굴을 파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죽을힘을 다해 굴을 파 들어간다. 결국 여우 씨 가족은 세 농부의 공격을 막아낸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여우 씨는 회피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여우만큼 굴을 빨리 파지는 못할 것’이라는 여우 씨의 믿음은 결국 가족들을 구한다. 가족을 구해낸 가장에게 여우 씨 부인은 ‘멋진’ 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다.

이 책 제목이 왜 ‘멋진 여우 씨’인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로알드 달은 이 책을 일곱 살 때 홍역으로 죽은 첫 딸을 위해 썼다고 한다. ‘첫’이 얼마나 각별한 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혈육을, 그것도 처음 얻은 내 새끼를 일곱 살에 보내야 했던 부모 마음이 어땠을까? 이 책은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려는 자와 가족을 지키려는 자의 싸움이기도 하다.

굴착기가 동원된다. 무지막지하고 크고 험상궂은 괴물처럼 생긴 굴착기는 무서운 속도로 언덕을 파헤친다. 이제 굴착기와 여우 가족의 목숨을 건 끈질긴 경주가 시작된다. 언덕에 널따란 분화구가 생기자 사람들이 구경을 나온다. 사람들은 여우를 쫓느라 숲까지 파헤치는 세 농부를 비웃지만, 그들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쯤 되면 고집이 아니라 아집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아집. 처음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시작했으니 결과를 보아야만 한다. 자기 삶에 좌절이라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단지 그것 때문에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가는 세 농부. ‘공공의 적’을 잡겠다고 시작했던 그들의 행로는 이제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다. 엄밀히 따지면 여우 씨는 공공의 적이 아니라, 그들 세 사람의 적이었지만.

굴착기로도 여우 씨 가족을 잡을 수 없자, 그들은 전략을 바꾼다.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모아 언덕을 물샐 틈 없이 에워싼다. 자그마치 108명이나 되는 일꾼들이 막대기와 총과 손도끼와 권총 등의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한 채 보초를 선다. 마치 전쟁이라도 할 태세다. 세 농부는 굴 앞에서 총을 들고 여우 씨를 기다린다. 닭고기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배고픔에 지친 여우 씨 가족이 이제 그만 손을 털고 나오기를 바라면서. 사흘 밤, 사흘 낮이 계속되어도 포위작전은 끝나지 않고, 여우 씨 가족은 서서히 굶어죽어 간다.

하지만 우리의 멋진 여우 씨,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새끼 여우들을 데리고 굴을 판다. 목적지는 닭 몇 천 마리가 우글거리는 보기스 네 1호 닭장. 통통한 암탉 세 마리를 포획한 여우 씨는 자신들이 들어왔던 흔적을 없애 완전 범죄를 노린다. 굴을 지키는 부인에게 닭을 보내 잔치 준비를 하라고 이른 뒤, 여우 씨는 다시 굴을 파 들어간다. 계속 굴을 파지만 힘들지가 않다. 배도 고프지 않다. 조금 있으면 맛있는 닭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노동이 마냥 즐겁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굴 앞에 앉아 여우 씨 가족이 굶어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세 농부를 생각하자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굴을 파 내려가던 그들은 오소리 가족을 만난다. 오소리는 여우 씨 때문에 동물들이 모두 굶어죽게 되었다고 하소연을 한다. 여우 씨는 그들을 자신의 굴에서 열리는 잔치에 기꺼이 초대한다. 오소리 새끼가 나머지 동물들을 데리러 간 사이, 오소리까지 합세한 여우 씨 일행은 배불뚝이 난쟁이 번스의 창고에 들러 오리와 거위, 햄과 베이컨을 슬쩍하고 빈의 비밀 사과주 창고에 들러 사과주까지 가져온다.

여우 씨 가족이 머물던 굴에서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놀랍고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잔치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을 파서 만든 넓은 식당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탁자에 무려 29마리나 되는 동물들이 빙 둘러 앉아 음식을 먹고 있다. 여우, 오소리, 두더지, 토끼, 족제비. 하나가 된 그들은 건배를 외친다. 한때 자신들을 죽을 뻔한 위험에 빠뜨렸으나, 이제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멋진 여우 씨를 위해서. 여우 씨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식량 창고 세 군데가 확보되었으니 굳이 바깥에 나가지 말고 이곳에서 자신과 영원히 같이 살자고 동물들에게 제안한다. 동물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들은 땅 속에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여우 씨에게 식구가 는 것이다. 여우 씨는 장을 보는 일은 기꺼이 자기가 담당하겠다고 말한다.

세 부자의 총에, 꼬리가 잘려 나가는 아픔에, 굴착기의 위협에, 보금자리를 잃고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맞서 싸웠던 포기할 줄 모르는 여우 씨 덕에 동물들은 집과 마을을 얻었고, 음식을 얻었고, 평화를 얻었고, 식구를 얻었다. 포기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는 세 부자나 여우 씨나 다를 바 없었으나, 그 결과는 참으로 다르다.

여우 굴 바깥에는 여전히 세 농부가 지키고 있다. 비가 내려 온 몸이 젖어도 그들은 여우들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해서 여우네 가족이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잡기 위해 총을 겨누고 있다. 자리를 뜰 수도 없고, 피곤해도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오, 불쌍한 농부들이여.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오소리는 여우 씨가 세 부자네 창고에서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훔치는 게 걱정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 말을 들은 여우 씨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한다.

“이보게 털북숭이 친구, 자식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닭 몇 마리 훔치지 않을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도적질을 변명하는 것 같은가? 여우 씨가 너무나 비도덕적으로 보이는가? 내겐 이 말이 참으로 절절하게 들린다. 여우의 도적질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친 일도 해야 하는 여우 씨의 삶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여우 씨를 그렇게 하도록 내 몬,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세 부자의 아집이 더 답답하다.

여우 씨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세 부자 이야기를 꺼낸다.

“우린 그 사람들처럼 비열해지진 않을 거야. 그 사람들을 죽이고 싶진 않아. 그런 일은 꿈도 꾸지 않아. 그냥 여기저기서 먹을 것 좀 가져다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 충분해.”

부자들도 물론 자신의 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몇 천 마리의 동물과 거대한 창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닭 몇 마리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거침없이 생명을 죽이겠다는 발상을 하는 저들의 무모함은 참을 수 없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들의 이기주의도 참을 수 없다.

다시 <호질>로 돌아가 보자. 박지원은 일갈한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盜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다가 목숨까지 빼앗는 자를 賊’이라고 한다고.

우리는 흔히 盜와 賊을 붙여 쓴다. 그리고선 도둑이라고 말한다. 여우 씨나 세 부자도 도둑이긴 마찬가지다. 여우 씨는 세 부자의 물건을 훔쳤으니 盜요,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았으나 남을 못살게 굴어 거의 그 지경까지 가게 했으니 세 부자도 賊’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멋진 여우 씨>는 도적들의 이야기다. 누구는 생존을 위해 도적이 되고, 누구는 탐욕 때문에 도적이 되기도 하지만, 암튼 이 책은 도적들이 판치는 세상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세상엔 아직도, 너무나, 盜賊들이 많다.

– 달맞이

응답 2개

  1. 둥근머리말하길

    멋진 여우씨를 선생님 덕분에 호질과 줄긋기를 해볼 수 있게 됐어요. 줄긋기… 들뜨게 만드는 독서법이에요.. 새로운 눈, 고맙습니다.

    • 익명말하길

      크크. 아주 가끔 로얼드 달은 맘에 안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이야. 박지원도 그렇고. 고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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