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미자에게 다가가기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미자에게 다가가기
– <빛깔이 있는 현대시교실>, 김상욱, 창작과 비평사

예순 여섯의 할머니인 미자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무를 잘 보기 위해 나무를 보고, 또 본다. 그리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눈다. 지나가던 이웃 할머니가 미자의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할머니가 뭐하냐고 묻자 미자는 나무를 보고 있으며, 나무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한다. 말을 건 할머니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간다. 정신 나간 사람을 만났다는 표정이다.

시간이 흐른다. 다시 화면에 그 나무가 담긴다. 미자가 앉아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 미자 대신, 말을 걸었던 할머니가 앉아있다. 미자의 모습 그대로다. 할머니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본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에게 시인이란 이런 존재 아닐까 생각했다. 시인은 ‘그’가 아니라 ‘너’를 만나는 존재이다. 마르틴 부버는 1인칭 ‘나’가 3인칭인 ‘그’와 관계를 맺을 때 ‘그대’라는 2인칭이 탄생한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물들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읽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를 변화시킨다. 아주 서서히…….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는 미자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던 할머니가 어느 새 미자의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시를 읽고 ‘시인은 특이한 존재군. 이 시는 황당하군. 이런 게 어딨어.’ 하던 마음이 어느 순간 ‘아, 이걸 노래한 거구나.’라고 느끼며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얼마 전 김선우 시인의 <단단한 고요>라는 시를 만났다. 도마 위에 놓인 도토리묵을 보면서 마른 잎사귀에 달려있던 도토리 한 알이 떨어져 가을을 만난 후 멧돌에 갈려 도토리묵이 되는 과정을 소리로 섬세하게 담아낸다. 시인은 도토리묵을 통해 도토리묵이 되기까지의 시간, 인연을 보는 것이다. 며칠 전 바닷가에 갔었다. 관광객에게 해산물을 판매하는 곳에서 김을 샀다. 김을 먹는데 갑자기 이 김이 바닷물 속에 흔들리며 바다와 이야기 나누던 광경이며, 김을 따서 햇볕 좋은 바닷가에서 말리는 시간동안 바람과 햇볕과 만나 이야기 나누던 광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예전 읽었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시인이 느낀 감정이 이것이었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 그 이후 김은 예전 밥상 위에 그저 반찬으로 올라오던 김이 아니었다. 온 우주가 담긴 존재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는 아직도 멀리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미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웃 할머니의 시선이 곧 우리의 시선이다. 미자를 마음에 담고 그녀의 자리에서 그녀의 느낌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없이 미자의 마음을, 미자의 시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럴 때 누군가가 미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그녀를 바라본 자신의 느낌을 들려준다면 이웃 할머니는 조금 더 편안하게 미자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김상욱 선생의 <빛깔이 있는 현대시 교실>(창비)은 그런 역할을 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김상욱 선생은 시인의 마음에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진실하게 가 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자였다. 이 책을 처음 구입했을 때는 어렵기만 한 현대시를 쉽게 설명해주는, 국어수업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 정도로 생각했다. 제목에서 받은 인상이 그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책 제목이 책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매를 고려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이 이 책이 가진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책은 저자가 만났던 시를 들려준다. 그러나 시에 매어있지 않다. 시를 이야기하되,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작정하고 시를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장면에서 만났던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있는 책인 것이다. 그래서 시의 무게와 저자가 쓴 글의 무게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나란히 가고 있다. 저자가 만난 시 이야기를 들으며 독자는 시에 담긴 시인의 고민과 저자의 고민을 접하게 된다.

몇 년 전 보충수업 시간에 이 책에 담긴 <자화상,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고 수업을 했다.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으로 풀어나가는 글이었다. 저자는 고3인 딸에게 ‘자화상’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고흐라고 간단히 대답하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좀더 깊은 생각을 요구한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이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요. 10년 후를 생각하면.”이라고 대답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윤동주의 <자화상>과 서정주의 <자화상>을 들려준다. 보통 사람들보다 민감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시인들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길어올린 감정에는 자신에 대한 미움, 연민, 그리움, 모멸감, 자긍심이 뒤섞여있다. 자신에 대한 이런 복합적 감정은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다. 세상일에 능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상반된 감정들을 잘 섞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섞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임을, 이 모순이야말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겪는 감정임을 아버지는 시를 통해 딸에게 들려준다.

처음 이 글을 읽은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은 힘들어 했다. 윤동주와 서정주 시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필자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를 묻는 나의 질문에 아이들은 막막해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 김상욱 선생은 이 시들을 누구에게 들려주고 있니?”

“자기 딸에게요.”

“그럼, 딸에게 이 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얼까?”

나의 말을 들은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났다. 그리고 이윽고 눈빛이 무거워졌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게 된 기쁨이 아이들의 표정을 살아나게 했다. 저자는 자신의 딸을 위로하고 싶었구나. 그런데 그 딸은 지금 자신의 앞날이 참 막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막막해하고 힘겨워하는 딸의 마음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 마음이 전해지면서 아이들 눈빛이 무거워진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다시 윤동주의 시와 서정주의 시를 읽게 했다. 그리고 시에 담긴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 연민, 그리움, 모멸감, 자긍심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누구나 가지는 감정임을 이야기했다. 멀게만 느껴지던 시가 아이들 마음에 가까이 다가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국어교사이다. 수업시간에 수많은 시를 만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은 문제집이나 교과서 속에 갇혀있다. 특히 문제집에 갇혀있는 현대시들은 어렵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게 그 시들은 문제를 풀기 위한 지문 정도의 인연이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이 가닿질 못하니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좋은 시들, 시인들이 절절하게 세상과 만난 시들을 흘려보냈다.

그런 나에게, 아이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흘려보냈던 시들을 진심으로 만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미자가 앉았던 나무 아래 이웃 할머니가 앉아 어느 순간 미자의 마음이 되듯이 나에게도, 우리 아이에게도 미자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었다.

시를 쓰는 일도 중요하다. 그리고 시를 읽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저 멀리 창 밖에서, 아무런 느낌 없이 반짝이는 세상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 창에 문을 내어주는 일, 그 문을 열어주는 일을 이 책이 하고 있다.

– 풍경지기 박혜숙

응답 1개

  1. 말하길

    저도 에서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근데, 사물의 속살을 ‘보는 것’에는 ‘사람’, 특히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면을 보는 것이 시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정말이지 타인의 삶을 깊이 관조하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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