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매이와 함께 만화를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매이와 함께 만화를

드디어 나도 아내처럼 매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매이와 싸웠다.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국가대표 평가전이 있는 날 저녁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매이의 동태부터 살폈다. 또 TV를 끼고 ‘만화’를 보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아직 TV도 안 켠 채 엄마 젖을 문 채 막 잠이 들었다. 저 상태라면 족히 한 시간 반 정도는 잠을 잘 것이다. 조심스레 TV를 켰다. 마침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었다. 그런데, 환희는 곧 좌절로 돌아왔다. 환호성 소리에 매이가 눈을 번쩍 떴다. 두리번거리더니 TV에 눈길을 보냈다. 나는 모른 척하고 경기에 몰입했다.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온 몸으로 내뿜으면서.

안돼, 틀지마!!

손에 땀이 쥐어지는 긴장과 불안의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나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공격이 들이닥쳤다. “만화~, 만화~” 나는 안간힘을 쓰며 방어했다. “매이야, 부탁인데, 아빠 이거 조금만 보면 안 될까?” 상대방의 결의를 눈치 챈 듯 매이는 더 세게 나왔다. “저거, 싫어, 만화 틀어줘. 미키마우스. 미키마우스” 나는 더욱 결연한 의지를 내뿜으며, 무시전략으로, 대구도 않고 계속 TV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매이에게는 가 닿지 않고 아내에게만 감지되었다. “매이야, 아빠, 저거 좀 보게 하자. 응?” “저게 뭔데?” “응, 아빠 만화. 아빠가 무지 좋아하는 만화야. 아빠 저거 조금만 보게 하면 안 될까?” 아내의 지원사격에 나는 정말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입을 앙 다물고 오늘은 기필코 이걸 봐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이’의 적대적 욕망을 감지한 매이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더 버티면 나는 정말 어린애가 되고 만다.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흥, 아빠 삐졌어”라고 말하며, 신경질적으로 ‘만화’를 틀어주고 나는 공부방의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인터넷 연결이 자꾸 끊어져서 도저히 중개방송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탄식이 새어나왔다. 나의 삐짐을 감지한 아내는 매이에게 “매이야. 아빠 보고 싶은 거 보게 해주자.” “싫어!” 아내, “매이, 자꾸 이러면 엄마 젖 안 줄거야” 아무 대답이 없다. 그 순간 나는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어린아이로 되돌아갔다. 뭔지 모를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참만에 매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알았어요. 미안해요” 라고 했다. “아빠! 매이가 아빠 보고 싶은 거 봐도 된데요” 아내의 승전보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꼴인가? 헌데 경기는 이제 막 끝난 참이다. 나는 감정을 수습하고 짐짓 ‘어른’으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됐어. 경기 끝났어. 매이, 보고 싶은 만화 봐” “매이,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라는 아내의 말에 매이는 못이기는 척 “아빠, 미안해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약간 짠해져서 “아냐, 매이야. 매이, 아빠가 화난 줄 알고 속상했구나? 아빠, 화 안 났어” 라며 잽싸게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어른’의 가면을 꺼내 썼다.

TV 보는 매이

머쓱해진 나는 매이 옆에서 매이가 보는 만화를 비평하기 시작했다. TV에서는 IP TV에 저장되어 있는 <미키의 클럽하우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적어도 세 번은 봤을 거다. “근데, 구피도 개고, 플루토도 개인데 왜 구피는 의인화되고 플루토는 여전히 애완동물인 거야? 그리고 미키의 여자친구는 같은 생쥐인 미니이고, 도널드의 여자 친구도 같은 오리인 데이지인데, 왜 구피의 여자 친구 클라라는 개가 아니라 소야? 구피는 자기 발 냄새를 제일 좋아하고 맨날 정신줄 놓고 사는 놈으로 그려지는데, 다른 (인)종과 연애하는 건 똘아이나 하는 짓이라는 건가?” 아내가 거들었다. “<선물공용 디보>에서는 디보의 선물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성격적 결함이나 습속의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미키의 클럽하우스>에선 ‘마우스캡 툴’이 캐릭터와는 무관하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느닷없이 위기의 인간을 도와주는 신의 도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무슨 페티시즘도 아니고. 또 <뽀롱뽀롱 뽀로로>, <선물공룡 디보>, <냉장고 나라 코코몽> 등에서는 친구집단 중에 꼭 요리사와 발명가가 한명씩 있는데 이 프로에서는 ‘만능손’이라는 기계장치가 요리를 비롯해서 모든 가사노동을 대신해주고, 그 시스템을 책임지는 발명가는 무슨 박사님이라고 따로 있어. 갈등을 일으키는 반동인물도 친구집단 외부에 존재해. 걔는 덩치 큰 블루칼라 노동자같은 차림인데, 캐릭터나 욕망의 일관성도 없고, 서사의 편의에 의해 일회적으로 등장해선 단편적인 행위만 하고 사라져. 주로 악당처럼 행동하는데, 어떨 땐 자신을 이들의 친구라고 말하기도 해. 정말 기능적이야. 그런데 진짜 갈등은 집단 내부의 캐릭터 차이에 의해 생기는 거잖아. 그걸 화합해나가는 게 의미 있는 일이구” 나도 맞장구를 치며 덧붙였다. “맞아. 철저하게 미국식이야. 쟤네들의 놀이는 노동이나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어. 무슨 도박-하우스도 아니고, 왜 꼭 미키 소유의 클럽하우스에서 노는 거야?” 이렇게 엄마 아빠가 주거니 받거니 불평을 늘어놓자, TV를 보고 있던 매이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뭐라구? 엄마, 뭐라고 하는 거야?” “아, 미키의 클럽하우스가 재미 없다고” “왜? 왜? 매이는 재미있는데” 하더니, 곧 자기도 실망했는지 “그러엄~코코몽 틀어주라~”

왼쪽부터 “냉장고나라 코코몽”, “미키의 클럽하우스”, “선물공룡디보”

<냉장고 나라 코코몽>은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냉장고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지, 달걀, 당근, 오이, 파, 콩, 무, 버섯에 생명을 불어 넣은 프로다. 냉장고 나라의 ‘얼음물고기’가 이 음식 재료들에 혼을 불어 넣었더니 소시지는 장난꾸러기 원숭이 ‘코코몽’으로, 삶은 달걀은 새침한 토끼 ‘아로미’로, 당근은 춤짱 노래짱 당나귀 ‘캐로’로, 오이는 요리왕 악어 ‘아글이’로, 파는 사고뭉치 닭 ‘파닥이’으로, 콩 세 개는 돼지 삼형제 ‘두콩’, ‘세콩’, ‘네콩’으로, 무와 버섯은 몸통과 머리로 결합되어 이해심 많은 하마 ‘두리’로 변신한다. 냉장고 나라에서는 얼음 물고기가 사는 강물이 공중에 떠 있다거나 생명 에너지가 태양열이 아니라 ‘냉기’라는 설정도 참신하다. 또 각기 다른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현실감 있고 그 해결 과정도 지혜로워서 나도 재미있어 한다.

특히, 식재료와 동물, 그리고 고유명사라는 세 ‘계열’간의 비물질적 ‘변용’ 관계가 무척 흥미롭다. “매이야, 코코몽은 뭐지?” 혹시 알까 해서 매이한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응? 응~ 원숭이” 한다. “그 전에, 원래는 뭐였는데? 뭐가 뭐로 변했지?” “응~ 소시지” 라고 정확히 대답한다. 우와~내친 김에 다른 것도 물었다. “파닥이는 뭐지?” “응, 파” “그래, 그 파가 뭐로 변한 거지?” “응, 파닥이, 닭” 이런 식으로 나는 식재료들의 계열과 동물들의 계열, 그리고 고유명사들의 계열을 구분하고, 첫 번째 계열과 두 번째 계열 사이의 접속을 가능케 한 ‘사건’(변신)과 두 번째와 세 번째 계열 간의 접속 사건(명명)을 확인했다. 매이가 좀 더 컸다면 왜 그 접속 사건에 작용한 감응(affect. 왜 소세지는 왜 하필 장난꾸러기 원숭이로 변한 걸까? 소시지에서 받는 감응의 성격이 왜 장난꾸러기 원숭이일까?)과 의미(왜 닭으로 변한 파의 이름이 ‘파닥이’일까? 왜 무와 버섯이 합체된 하마의 이름이 ‘두리’일까?)에 대해서도 물어볼 텐데, 모를 것 같아서 안 물어봤다.(이미 알려나?) 혹시 매이가 나중에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읽을 기회가 있으면 ‘옛날에 본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기억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가 즐기고 있는 만화를 옆에서 요상한 개념으로 분석해대는 아빠가 짜증났나 보다. 매이가 “조용히 해. 시끄럽잖아. 아빠, 쉬~” 하며 내 입술에 자기 손가락을 들이댄다. “매이야, 이제 지겹다. 다른 거 보자. 인어공주 볼래?” “응. 매이, 인어공주 좋아해” 그동안에는 디즈니사에서 만든 맥 빠진 ‘인어공주’ 시리즈물만 보았는데, 지난주에 안데르센 원작에 충실한 진짜 ‘인어공주’ 만화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꼭 그걸 찾아서 본다. 사랑의 비밀, 특히 이제 막 성에 눈뜬 청소년의 사랑을 이것만큼 진실하게 표현한 문학작품이 또 있을까? 인어공주가 지느러미 대신 가랑이가 찢어진 인간의 다리를 갖게 된다는 것은 비로소 ‘여자의 성기’를 갖게 된다는 것일 게다. 그것도 가랑이를 얻는 대가로 말(로고스)를 버렸고, 그로 인해 왕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니! 인간의 발로 땅을 디딜 때마다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옛날에는 뭔지 모르면서도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제는 뭔지 알겠다. 매이도 조금(?) 지나면 알게 될 여성의 실존적 아픔을. “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너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서 물거품이 되고 말것이다”는 바다마녀의 예언은 또 얼마나 적실한지. 첫사랑에 목숨을 거는 무모한 용기, 말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안타까움, 사랑하는 이에겐 끝내 알려지지 못한 채 희생된 사랑의 그 절대적 고독, 매이 역시 겪어야 할 그 사랑의 고통을 액기스로 뽑아낸 인어공주를 보며 나와 아내는 안데르센의 광기 어린 문학적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갈 즈음, 매이는 이미 깊은 꿈나라로 빠지고 있었다.

아내는 인어공주의 16살 생일에 할머니가 머리를 빗겨주며 한 대사 “성장이란 때로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배울점이 있단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라, 얘야. 우리 인어는 삼백년을 살잖니?” 을 고즈넉히 되뇌더니 “아…미친년! 사랑을 통해 교훈을 얻으랬지, 누가 죽으래? 우리 매이도 저러면 안 되는데, 인어공주를 반면교사로 삼아, 절대 저러지 못하게 가르쳐야지” 말하며 매이를 침대에 눕혔다.

다음날 집에 들어오니 욕조에서 아내가 매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화창한 봄날에~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적에~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에게 첫눈에 반해 스리살짝 윙크했대요~ 당신은 육지 멋쟁이, 나는 바다 이쁜이, 천생연분 결혼합시다~어머 어머 어머 어머~ 예식장은 용궁 예식장, 주례는 문어 박사, 피아노는 오징어, 예물은 조개 껍대기” 그러더니, “매이야, 결혼은 이렇게 하는거야. 혼자 몸뚱이로 지나가던 남자를 꼬셔서 내 판에 데려와 내 식대로 하는 거야, 육지의 왕자를 사랑해서 네가 그 판에 가는게 아니구….” 어릴 때 듣고 비유의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며 좋아했던 노래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있을 줄이야….하며 놀라워 하고 있는데 “그래야 행복해져. 엄마처럼. 알았지?” 하는 게 아닌가? 나, 지나가다 코 꿴 코끼리였어? 그런데 이어지는 더욱 놀라운 가르침.

“그리고 인어공주처럼 부모 몰래 빚내서 성형수술 한다고 왕자가 널 좋아하지 않는단다. 왕자는 자연미인과 결혼하고, 인어공주는 성형부작용과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대요” 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문학이로다!

– 매이아빠

응답 1개

  1. 단단말하길

    이런 반전이…….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밤중에 시끄럽다고 엄마한테 한 대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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