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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꽃이 피어나는 동네 “해방촌”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과꽃이 피어나는 동네 “해방촌”

다양한 믿음이 함께 있는 곳

남산 중턱에서 해방촌을 바라보았다. 즐비한 교회의 첨탑들이 마치 중세 이탈리아의 한 도시를 연상시키는 듯했다. 조그만 동네를 압도하는 커다란 해방교회에서부터 “멸공”을 부르짖는 반공교회, 그 외에도 집 한 켠 세워진 조그마한 교회들까지. 정말 많은 교회들이 해방촌에 세워져 있었다.

해방촌은 해방 직후 갈 곳 없는 실향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전쟁이후 200만명에 달하는 월남민들이 서울로 밀려들었고 당국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산 산비탈, 하천변의 공유지마다 판잣집 동네를 만들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서북출신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했고 그들의 대다수가 해방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들은 해방 교회를 세우고 공산치하에서 문을 닫아야 했던 고향의 기독교 명문 보성여중고교와 숭실중고교를 해방촌에 세우며 커다란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폐건물로 남아있는 멸공교회가 그들의 지난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남산 자락을 내려와 동네를 한 바퀴 휘이 걸었다. 해방촌은 더 이상 서북사람들의 동네가 아니었다. 다양한 믿음이 존재했다. 커다란 부처상을 들여놓은 건물에서부터 성당도 눈에 보였다. 신에 대한 믿음 말고도 옛 모습을 추억하며 사는 해병대 전우회라든가 아마도 평화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것만 같은 인류평화 연구회, 그리고 앎과 삶이 일치하는 공부를 함께 해나가고 있는 수유연구실까지 지금의 해방촌에는 다양한 믿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개발로 변화하고 있는 해방촌

나의 아버지 세대때나 볼 수 있었을 법한 재래시장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재래시장의 신기한 광경을 보고 나와 200M 정도 걸으면 골목 한 편에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호화주택과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재래시장과 호화주택이 불과 200M 거리를 두고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곳. 해방촌은 더 이상 가난한 동네라고 지칭하기에 어색했다. 아니 오히려 ‘개발 완공지역이라고 부르기 찜찜한 몇몇 미개발 판잣집과 상점들이 남아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70년대 이르러 해방촌은 재개발계획으로 구상된다. 동네 위쪽으로는 소월길이 뚫리고 아래로는 반포대로가 열렸다. 동네 안에 큰길들은 정비되었고 무허가로 깔고 앉았던 땅도 불하돼 어엿한 지번을 부여받았다. 환경개선사업으로 많은 판잣집들도 새 건물로 지어졌다.

그리고 이곳 역시 이태원 등지처럼 고층 아파트를 지으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발표직후, 이 곳 영세민들은 자신들의 주거권을 지키고자 끝까지 저항하였고 정부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정부는 이곳을 자율적인 환경개선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해방촌 영세민들은 언덕 위의 달동네를 유지해나갔다. 그렇게 이 곳 사람들은 가파른 골목길, 108개나 되는 높은 계단들, 허물어질 것만 같은 판잣집에서 그들의 삶의 권리를 지켜나갔다.

하지만 개발론자의 눈에 해방촌은 여전히 수술해야 마땅한 도시의 종양이자 불량촌이다.

현재에도 해방촌은 끊임없이 개발과 저항사이에 놓여있다. 이곳 해방촌은 남산의 다람쥐가 한강에 내려가 물을 먹게 하겠다는 취지로 정부의 녹지축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동네 곳곳에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갈아엎어지고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의지가 살아있는 동네

전쟁이후 이곳을 찾은 영세민들이 해왔던 일은 담배말이와 군복염색이었다. 그것이 스웨터짜기 등의 가내수공업 형태로 발전하였다. 해방촌에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공장과 기업이 아닌 자신의 가정집을 공장처럼 바꿔서 스웨터를 짜고 염색을 하며 삶을 꾸려갔다. 이후 교통이 발달하고 동대문의 옷감시장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은 해방촌을 떠났다. 초기정착자들 중 대부분은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진출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빈곤층이 이 자리를 대물림했다. 많은 사람들이 해방촌을 떠나고 집들은 버려졌다. 또 오래된 건물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다시 짓기도 했다. 멀리는 거대한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해방촌을 둘러싸고 위, 아래로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해방촌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몇몇 가구들에서 옷감 수선 과정에서 생기는 증기를 빼내는 커다란 연통들이 집 밖으로 나와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얼핏 창문너머로 옷 수선 중 인 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열심히 옷감을 자르고 보풀을 제거하고 있었다. 문 밖에는 오토바이로 한 무더기의 옷감들이 또 실어져오고 있었다.

연구실 옆 빨래방 아저씨에게 여쭈어 보니 이 곳 가내수공업은 공장에서 하기 힘든 수선작업을 맡아서 한다고 한다. 공장에서 처음 나온 거친 옷감들을 빨래 기계를 통해서 부드럽게 만드는 일이 많고 공장에서 나온 옷감들을 납품 받아 옷 수선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 동네가 거의 이러한 옷 수선 집으로 넘쳐났지만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가내수공업으로 수선된 옷감들은 대부분 동대문평화시장으로 싼 가격에 납품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방촌의 남은 몇몇 사람들은 옷가지들의 수선과 염색을 계속해나가며 여전히 이곳에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가내수공업의 활성화” 다른 어느 ‘시’에서 보기 힘든 해방촌에 출마한 한 후보의 선거 공약이다. 이 선거 공약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촌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의 삶이 아닌 여기 이곳에서 삶을 여전히 원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고자 한다. 누군가에겐 불량촌인 이곳은 다른 한편으론 ‘범죄없는 마을’이었으며 누군가에겐 도시의 종양이라 불리는 이곳은 스스로 각자 집 앞에 내놓은 화분들로 자연스런 친환경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건강한 의지가 마을전체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해방촌의 건물들이 물리적으로 낙후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낙후되지 않았다. 가파른 계단길, 구불구불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 초라한 해방촌에서 여전히 묵묵히 그들의 화분을 손보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누군가가 말하는 도시의 종양 속에 여전히 과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 사진: 윤여일, 단단, 박카스 / 글 : 박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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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3개

  1. 단단말하길

    부끄럽습니다~^^
    열심히 사진 공부 좀 해야지….
    박카스님의 글을 보면서 왠지 두 주먹 불끈 줘지는 이유는 뭘까요~~~^________^

  2. 여이루말하길

    사진을 끝까지 보시면 그림 그리는 미남 헌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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