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배다리, 옛 정취 간직한 역사문화마을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배다리, 옛 정취 간직한 역사문화마을

이름은 주문이다. ‘이르다’는 뜻의 이름에는 저마다 타고난 사명이 담겨있다. 땅이름도 그렇다. 인천(仁川)은 어진 내, 어진 흐름이다. 물길이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던 시절 인천은 근대화의 진입통로였다. 항구에서 받아들인 서구문물을 서울로 실어냈고 외지사람들은 여기서 성공하면 서울로 나갔다. 엄마처럼 정성스레 품어 내어주는 곳이 인천이었고 그 중심에 배다리마을이 있다.

배다리는 인천 동구 금곡동 일대를 일컫는다. 19세기 말까지 마을 어귀에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불렸다. 유서 깊은 지명대로 배다리는 근대로부터 이어오는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초의 공립 보통학교 창영초등학교, 여선교사 기숙사 등 100년도 더 된 건물과 옛 성냥공장, 양조장을 볼 수 있다. 인천항에서 일하던 인부들과 먼 뭍에서 물건을 떼러 온 상인들이 묵었다던 여인숙길, 1․4후퇴 때 생긴 60년 전통 한복길, 고서점길 등이 구불구불 실개천처럼 흐른다. 마을전체가 탁 트인 하늘 아래 전시된 생활사박물관이라고나 할까.

동인천역에서 도원역 방향으로 가다가 건널목을 건너면 배다리삼거리가 부채모양으로 펼쳐진다. 왕복 2차선의 널찍한 아스팔트길이라서 골목이라기보다 소도시의 번화가 느낌이다. 낡은 단층 건물에 이발소, 사진관, 머리방, 체육사, 박의상실, 용화반점, 개코막걸리 등 예스럽고 투박한 간판이 내걸려 아스라한 향수를 자극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고서점과 문구도매상이 몰려 있는 헌책방 길로 유명하다. 거리 초입에 ‘아벨서점’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북적댄다. 곽현숙(60) 대표는 38년 째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제가 배다리사람이에요. 송림초등학교 나와서 여기서 자랐죠. 사회와 비빌 줄 몰라서 헌책방을 시작했는데 3평 남짓한 좁은 데서 문을 연 이래 중간에 2년 쉰 걸 빼면 책방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배다리가 참 좋은 가 봐요. 살수록 지루한 곳이 돼야하는데 책을 갖다 놓고 끊임없이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제게 평화를 주거든요. 인천을 떠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꼭 배다리를 찾는답니다.”

곡절 많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장사가 너무 안 될 때 누군가 책방을 홍보하라고 제의했지만 그에게는 그저 오늘 하루 잘 사는 것, 오늘 온 손님에게 책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상의 홍보가 없었다. 인터넷 헌책방을 해보라는 조언도 마다했다. 책은 떠 먹여주는 게 아니라 자기 발걸음으로 취해가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건 아니다.

곽현숙 대표는 배다리를 시가 흐르는 낭만의 길로 만들었다. 손수 톱질과 망치질을 해서 옆 건물에 ‘시 다락방’을 지었다. 시집 전시관으로 꾸며놓고 매달 시인을 초청해 시낭송회를 연다. 아늑한 문화공간이 된 것. “책을 빨리 많이 팔아서 부자로 살고픈 생각도 없고 이 동네에 책을 좋아하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책방을 하겠다”는 곽현숙 대표는 “망해더라도 책방을 하다가 망하겠다”며 두 눈이 다 감기도록 환히 웃는다.

저 순박한 웃음, 뜨거운 열정, 우직한 소신이 배다리를 지켰다. 가게 곳곳 유리문에는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 할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지난 2007년 배다리가 마을 중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와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곽현숙 대표는 시청 앞으로 달려가 1인 시위를 하고 손님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박의상실 박태순 대표를 비롯한 이웃들과 함께 앞장섰다.

주민들이 나서자 지역문화예술단체와 활동가들도 힘을 보탰다. 지역예술가들은 동네 곳곳에 벽화를 그리고 생활공동체모임에서는 동네 버려진 땅을 텃밭으로 가꾸었다. 인천 시내에 있던 대안미술문화공간 ‘스페이스 빔’은 아예 배다리의 80년 넘은 양조장에 둥지를 틀었다. 그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보수공사로 공간 자체를 볼거리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전시회와 공연을 기획하고 다양한 미술 강좌와 공부모임이 열린다. 배다리 사람들의 꿈과 사연이 아름드리 자라는 추억배양실이 되었다. 민운기 대표는 이제 마을 지키기에서 나아가 문화역사적 가치를 발굴하는 마을 가꾸기에 힘써야한다며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했다.

“배다리는 곡선적인 공간입니다. 속도가 빠르지 않고, 도시 특유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구분이 없지요. 도로에 차도 다니고 사람도 다녀요. 화분도 골목길에 내놓고요. 야박하지 않고 소문도 삽시간에 번지는 사람냄새 나는 마을이에요. 시간적 단절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이어가도록 지혜를 모아야죠.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면서 만드는 열린 도시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년에 걸친 주민들의 요구에 인천시가 물러섰다. 산업도로를 지하로 뚫기로 했다. 수억을 준다고 해도 수십 년 삶터와 바꾸지 않겠다는 책방 할아버지의 ‘순박한 바람’이, 내 살던 곳에서 어제처럼 오늘도 묵묵히 살아낸 의상실 아주머니의 ‘위대한 하루’가, 일주일에 한번 씩은 헌책방에 들른다는 귀 뚫은 청년의 ‘활기찬 걸음’이 무차별적인 개발의 거센 물길을 돌렸다. 높은 빌딩과 익명의 거주자로 채워질 뻔한 배다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사람은 생기지고 거리는 활기차다. 시간의 가치를 탐하는 사람들, 배다리라는 보물섬 지도를 손에 쥔 이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까닭이다.

– 은유1
  1. 이 글은 <야곱의 우물> 5월호에 실렸습니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