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소신공양, 혹은 개발-기계에 대한 분노(Rage Against Development-Machine)

- sros23

지난주 6월 2일, 선거가 있었던 날이었다. 인사동에 나갔다가 조계사 부근을 지나는데, “문수수님, 소신공양의 큰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소신공양? 바쁘게 무심히 지나치던 눈길을 잡아끄는, 생각지 못했던 단어였다. 고등학교 땐가 교과서에 실린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본 이후로는 본 적도, 생각할 기회도 없던 단어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소설에서처럼 누군가 도를 위해 소신공양을 하셨던가보다 하곤 그냥 지나쳐왔다. 플래카드만으론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고, 누군가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었으니까. 그리곤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6월 4일, 쫓기던 글을 써 보내고, 그날 저녁에 있던 세미나도 끝내고, 오랜 만에 메일을 열었을 때, 어느 한 메일에서 그 단어가 다시 찾아왔다. 그 메일에는 군위 지보사에서 무문관 수행을 하던 문수스님이란 분이 5월 31일,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단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낙동강가에서 소신공양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억!! 이…이런…!!! ‘소신공양’이란 말이 더없는 강도로 다시 덮쳐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동리 소설이 아니라 80년대 이후 내 삶의 일부가 된, 분신하신 분들의 유령들과 함께였다. 슬쩍 보고 흘리듯 지나쳤던 것이었기에, 미안한 당혹과 더불어.

분신과 소신공양이란 말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틀림없이 그건 소신공양이란 말을 처음 접했던 김동리 소설의 영향일 게다. 속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높이의 구도의 마음에, 고통스레 일그러진 표정으로 선채로 찬 스님의 이미지.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마저 적막하게 만들고 비명의 고통마저 이해할 수 없는 저편의 어떤 것으로 표상하게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마도 ‘소신공양’이란 말을 플래카드에서 보고서도,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일인 양, 흘려보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태일이나 80년대의 분신하신 분들의 고통스런 고함소리와는 아주 다른 불길이었다. 두 번 찾아온 ‘소신공양’이란 말이 그토록 달랐던 것은 그래서였을 게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 또한 그랬을 것이다. 속인의 눈에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세계가 사실은 ‘둘이 아님(不二)’으로 섞여 있었던 것일 게다. 무문관(無門關), 문을 잠가 걸고 오직 수행에 매진하던 수행자인 만큼, 불도에 목숨을 건 수행자의 마음이 그 힘찬 불길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하다. 불도에 자신의 삶,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것, 그것은 구도적인 삶의 극한임이 틀림없으니까. 보이지 않지만 아주 선명한 마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을 본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 몸이 살아간 삶을, 그 삶이 펼쳐진 현실을 잊는다면, 그것은 수행과 도가 일상의 삶과 하나임을 반복해서 강조했던 禪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잊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속인의 삶으로부터 도인의 삶, 혹은 수행자의 삶을 멀리 떼놓고 분리시키는 것을 뜻하게 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소신공양을 하면서 옆에 곱게 접어놓은 승복과 함께 단호하고 간결한 문장의 유서를 남겨놓은 것은 수행자의 삶에서 일상을 지우고, 승을 속에서 분리하려는, 빈번히 나타나는 그런 오해에 대해 경책을 하고자 했음일 것이다. 20년 이상을 참선하며 교수사로 지내온 신수 상좌가 아니라 아직 계도 받지 않은, 방아찧는 행자 혜능에게 의발을 넘겨주었던 5조 홍인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 같은 어찌할 수 없는 속인도,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그 마음의 일단을 본다. ‘4대강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어가는 거대한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은 ‘인간’ 아닌 중생, ‘인간’ 아닌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야 보이지 않겠지만, 세상 만물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음을, 어떤 차별도 없이 모두 ‘본래 부처’임을 보는 불도의 수행자에겐 자신의 목숨조차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게 할 정도로 지대한 것이었을 게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을 해도 늘어만 가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면 될수록 기업으로부터 쫓겨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힘든 삶에 대한 안타까움, 그것은 경제학적 숫자들을 올리는 것으로 삶을 이해하고 아예 까놓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며 떠들썩하게 난리를 치는 사람들 눈에야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겠지만, 중생의 삶을 제도하는데 자신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세운 수행자들에겐 자신의 무거운 육신조차 초개처럼 가벼이 여기게 만들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 유서가,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의당 갖기 십상인 어떤 비장한 슬픔조차 전혀 비치지 않은 채, 거친 구호처럼 보이는 문장 셋으로 축약된 것은, 아마도 이 거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를 버리고 가는 것’, 그것이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음을 가르치는 불교의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유였을 것이다.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며, 나의 힘으로 세상을 휘젓는 사람들에 대해 그것만큼 직설적이고 단호한 일갈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나를 버리고 가마”라며 꼭꼭 눌러쓴 전태일의 유서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버리고,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잣대를 버리고 중생들의 삶 속으로 몸을 던져 넣게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분신이든, 다른 죽음이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찬미하는 처연한 낭만주의에 대해 아주 강한 위화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뒤를 따라가듯 자신을 버리고 간 많은 분들의 뜻을, ‘생명의 소중함’이란 말을 빌어 무모하고 속절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값싼 말들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말 그대로 ‘어두운 죽음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것은 단지 계속해서 이어진 분신의 죽음만은 아니었다. 도서관 창문에서 쫓기다 떨어져 죽고, 총에 맞듯 최루탄에 맞아 죽고, 경찰들의 고문에 죽고, 그 많은 죽음 속에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죽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운동이나 저항은 비장해진다. 표상할 수 없는 어떤 것, 살아 있는 사람의 감각이나 생각에 담기엔 너무 커서 살아있다는 사실의 소소함을 절감하게 만드는, 칸트라면 ‘숭고’라고 불렀을 감정과 감응은 필경 사람들을 비장하고 처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2000년대는 그런 무거운 비장함이 사라진 시대였다. 가벼움의 시대, 그러나 결코 진지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대였다. 월드컵 축구와 반미시위, 대통령 선거로 가볍게 넘나들던 시대. 그래서 나는 그 가벼움을, 진지한 가벼움을 배우고자 했다. 그래야만 이 새로운 감성을 가진 대중들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신공양이라는 죽음을 대하면서, 세상이 또 한 번 방향을 바꾸는 건 아닌가 싶은, 결코 반갑지 않은 생각이 일어난다. 그것은 단지 한 분의 죽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백만의 대중이 그토록 긴 시간을 외쳤건만, 몇 번의 거짓말로 넘기고선 결국 모든 것을 ‘쌩까고’ 거꾸로 적반하장의 반성을 요구하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의 통치가, 우익 시위 아니곤 시위를 할 수 없게 억압하는 낡은 시간이, TV를 정권의 홍보장치로 사용하면서 모든 항의와 저항의 소리를 씹는 곰팡이 슨 공간이, 그 공간에서 불타 죽은 철거민들의 비명소리가,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면 ‘유언비어’라고 잡아가두고 자신이 한 짓이 폭로되면 ‘명예훼손’–그런 짓이 명예롭지 않다는 건 잘 아는 것 같다–이라고 고소하는 웃음 나는 유신의 체제가, 일상화된 ‘긴급조치’들과 함께 확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햄릿처럼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여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를 고민하게 만드는 시대가 다시 시작된 것일까? <<햄릿>>에서 ‘시대의 불의’란 말이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남(The Time is out of joint)’이란 말로 표현되었음에 주목했던 데리다라면, 깊은 숙고를 거쳤을 수행자의 이 죽음에서 시간의 이음매를 다시 이으려는, 그 자신이 ‘정의(Justice)’라고 표현했을 근본적 해체의 힘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정녕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것이 틀림없다. ‘개발’로 표상되는 ‘경제’가 살 길이라고 믿어, 아는 것이라곤 돈 밖에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삽질 밖에 없는 70년대 건설회사 사장님을 스스로 지도자로 모신 덕에, 우리의 시간의 이음매를 끊고 거대한 타임머신이 끼어든 것이다. 아니, 집단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지나간 시간 속으로 끼어들어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건설업을 경기부양의 축으로 삼고, ‘공급자(건축업자)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고는 거대한 토목-기계, 거대한 착취-기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왕에 시간의 관절을 빼 낸 거라면, 좀 더 멀리 날며 또 다른 시간을 불러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963년 6월 11일 시내 한복판에서, 미국의 거대한 살인-기계에 맞서서, 불교를 탄압하는 정권에 맞서 거리에 앉아 가부좌를 튼 채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틱쾅둑 스님의 분신. 불길에 몸이 타들어감에도 결가부좌를 한 채 미동하지 않는, 귀를 찢고 눈을 태우는 적막한 고함소리 사이로, 분진을 날리는 연기 사이로 수많은 시간의 씨들이 날아오른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이 그 사진을 자신의 첫 앨범의 표지로 삼았던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씨들을 몇 개 보았기 때문인 것일까?

‘밀리면 죽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칙 하나 말고는 어떤 ‘정치’의 기술도 알지 못하며 후진도 방향선회로 모르는 채 오직 앞으로 밀고 가는 것만을 아는 자칭 ‘불도저’의 통치-기계가, 그리하여 오직 모든 것을 무시하고 생까는 것에서 모든 것을 밀고 가는 힘을 찾는 무능한 권력-기계가 이 분노의 씨들을, 이 ‘해체의 힘’을 견딜 수 있을까? “정의는 해체될 수 없다”고, “해체는 해체될 수 없다”고 했던 데리다의 말은 그만두고라도, 분노는 밟거나 생까는 것으로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증폭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 이진경(수유너머N)

응답 3개

  1. unzeit말하길

    새로 보내주신 파일로 수정했습니다. 거듭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2. 고추장말하길

    중요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글이 전문 게재가 되지 않고 중간에 반쯤 잘렸습니다. 아마도 편집기호와 관련된 기술적 에러가 있는 모양입니다. 전문을 다시 게재하겠습니다. 저자와 독자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3. 이진경말하길

    고쳐보낸 원고를 실어주면 좋았을텐데, 여러 번 고쳐보냈는데
    아마도 처음에 보낸 것이 실린 듯 하네요.
    가능하면 다시 수정원고를 게재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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