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시앗서방을 둔 여자들의 영화

- 기픈옹달(수유너머 R)

– <해피엔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경축! 우리사랑>

여자가 (남자)첩을 둔다는 설정이 그리 익숙한 것은 아니다. 흔히 처첩제는 일부다처의 상황을 그리는 것이었다. 시대를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두 여자 이야기>(1994)에서 보듯, 한국전쟁 직후까지 한 지붕 아래 처첩이 기거했던 풍경이 존재하였다. ‘한 지붕 아래’라는 규정이 빠지면, ‘두 집 살림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이르는 무수한 멜로영화는 물론이고, <사랑과 전쟁>을 비롯한 온갖 불륜 소재 TV드라마에서 ‘두 집 살림하는 남자들’은 현재형으로 존재 한다. 그런데 스크린 상에 성차가 뒤집힌 처첩제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일명 ‘시앗 서방을 둔 여자들’의 출현이다. 뭐 유부녀 불륜 영화야 <자유부인>시절에도 있었던 것 아니냐고? ‘시앗 서방’을 두었다는 것은 유부녀가 잠시 결혼생활에서 이탈하여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정도가 아니고, 남편 이외의 남자와 지속적인 성관계와 연애감정 그리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그 관계를 자신의 공식적인 결혼생활과 병행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1. 최초로 시앗서방을 둔 여성을 그린 영화 <해피엔드>


이런 관계를 처음으로 그린 영화는 <해피엔드>(1999) 였다. 그녀(전도연)는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주진모)의 오피스텔 열쇄를 가지고 수시로 드나든다. 그곳에서 그녀는 목욕하고 웃고 먹고 논다. 이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유부녀(이응경)이 정기적으로 남자와 모텔을 드나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곳은 길이 아니라 집이며, 그녀는 잠시간이라도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그곳은 완전한 집은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 자신의 물건이 생기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며, 그저 쉬고 싶을 때 몸만 왔다 갔다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주진모)의 감정은 그보다 더 확실한 관계를 원했다. 그녀에게 “난 너한테 대체 뭐니? 내가 니 첩이니?” 같은 말을 내뱉고, “우리 딸 예쁘지?” 같은 그녀의 중립적 표현을 ‘자신의 딸’이라며 곡해한다. 즉 그는 첩으로서의 위치에 자괴감을 느끼고, 정상가족의 구성과 혈연(그녀의 남편이자 딸의 아버지 자리)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그녀의 집 근처를 배회하고, 집으로 전화를 하고, 집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여 남편의 눈에 띈다. 결국 이 불안정한 관계는 남편에 의해 종식된다. 그녀는 죽임을 당하고, 시앗 서방은 법의 처벌을 받는다.

이 영화는 최초로 시앗서방을 둔 여성을 그린 영화이지만, 그 관계가 첩(주진모)으로부터도 남편(최민식)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그 결과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젊고 아름다우며 유능한 커리어 우먼으로 가족 부양의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불륜과 모성 방기의 대가는 이혼이나 간통죄 정도가 아니라 남편의 손에 수차례 칼로 찔려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시앗서방은 살인죄를 덮어 써야할 중죄인으로 취급된다. (그는 형사들에게 간통 사실을 집중 추궁 받고, 간통 사실만으로도 살인혐의에 대한 무고함을 주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영화는 성인남성노동에 의해 구축되어 온 가부장적 질서가 IMF 경제위기로 흔들리고, 상대적으로 높아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성적 욕망이 가부장적 질서의 틀을 넘보고 있음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당시 한국사회의 남성적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능력과 욕망의 함수로 사고한 최초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는 이로부터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훨씬 안정적으로 ‘시앗 서방을 둔’ 여자를 그린다. 그녀(엄정화)는 친구의 소개팅으로 만난 시간강사(감우성)와 첫날 여관에 가서 동침을 하고 애인이 된다. 시간강사는 연애 상대로 손색이 없지만, 결혼제도에 대해 냉소적이며, 무엇보다 경제력이 없는 자신을 결혼에 부적합하다고 여긴다. 그녀는 선으로 만난 못생긴 의사와 결혼하기까지 시간강사와 줄곧 연애관계를 유지하며 결혼문제를 상담한다. 그녀의 경제력을 향한 욕망과 성적 욕망은 동등하게, 즉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며, 그녀의 두 가지 욕망은 복수의 결혼을 통해 추구된다.

그녀는 의사와의 공식적인 결혼에 앞서 애인을 신혼의 침대로 끌어들이며, 소박하고 달콤한 신혼여행을 간다. 그녀는 자신의 돈으로 애인에게 옥탑방을 얻어주고 그 공간을 같이 꾸미며 2주에 한번 주말부부처럼 그곳을 드나든다. 그녀에게 공식적인 결혼생활은 경제력을 제공하는 일종의 직장의 역할을 하고 알콩달콩한 신혼의 재미는 비공식적인 결혼(동거)에 의해 얻어진다. 이 관계에서 (남자)첩은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녀와의 정상가족 구성이나 혈연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녀의 공식적인 결혼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녀는 옥탑방에 대한 일정한 권리(“여기는 내가 꾸민 공간이라구!”)를 주장하며, 행복한 신혼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요리, 섹스, 쇼핑, 시부모 공경 등 살림의 달인이며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의사남편이라는 고용주를 완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걸 맞는 1+1/n 개의 결혼생활을 영위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시간강사 역시 자신의 능력에 맞는 1/n 개의 부분혼(파트타임 혹은 비정규직과 비슷한 개념)을 통해 ‘결혼이라는 허위의식 없이 섹스만이 실재하는 관계’라는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킨다. 이들의 관계는 나름의 균형상태에 도달하여 안정성을 지니며, 둘 사이에 약간의 언쟁과 소강상태가 생기더라도 그녀는 다시 옥탑방을 찾을 것이며 마지막까지 파국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능력이 많은 여자라면 ‘셋 서방에게 딴 살림을 차려주고’ 두 집 살림을 하더라도, 그녀의 욕망이 평화적으로 추구될 수 있음을 인정한 최초의 영화이다. 즉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법적 금기와 충동의 함수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욕망의 함수로 다룬 최초의 텍스트이다. 다만 그녀의 복수(複數)의 결혼 생활에 수반되는 임신과 혈연의 문제라는 가장 까다로운 주제를 결락하고 있기에, 여성 중혼에 대한 충분한 텍스트가 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3. 여성중혼에 대한 문제의식을 밀어붙였으나 보수적 사고실험에 그친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2008)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미완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그녀(손예진)는 연애상대로 완벽한 여자이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여자였다. 남자(김주혁)는 그녀의 자유분방함을 주저앉히기 위하여 결혼을 제안하고 계속 졸라대서 극적으로 관철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변함이 없다. 직장문제로 그녀가 지방에 내려가 주말부부가 된 후, 그녀는 현지에서 만난 남자와 ‘또 하나의 결혼’은 하겠다고 남편에게 통보한다. 그녀가 말하는 ‘또 하나의 결혼’이란 둘만의 비밀스러운 동거를 넘어서는 관계, 그러니까 시앗 서방과 혼인신고만 하지 않을 뿐 결혼식도 하고 그의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결혼관계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을 말한다. 그녀는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와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고, 주중에는 경주에 내려가 ‘부부 프로그래머’로써 ‘자신과 쌍둥이 같은’ 남자와 결혼생활을 한다. 그 중혼의 상태를 시앗서방과 본서방이 모두 인지하고 있으며, 명절이면 두개의 시댁을 오간다. 그러다가 드디어 아기가 태어자자 두 시댁의 환대를 받으며 두 번의 돌잔치를 하기에 이른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보다 더 밀고 나아간 지점은 분명히 있다. 첫째, 본서방의 관점에서 중혼을 다루어서 질투의 문제를 전면화 시키고, 둘째, 아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혈연의 문제를 건드리고, 셋째, 관계를 외화시켜 사회적 인정의 문제를 도출시킨다. 영화는 이 지점을 원작에서 보다 더 도드라지게 그리면서 원작이 가지고 있던 애매하고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제거하고 훨씬 보수적인 방식으로 전개시킨다. 본서방의 폭력적인 질투표출은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아이의 혈연은 본서방의 것으로 확인해주며 아내와 시앗서방은 피임을 합의하였다는 말까지 붙여 혈연의 문제는 본서방의 것이 되어야 함을 확고히 하고, 관계가 외화 되어 결국 직접적인 폭로가 이루어지면 한국을 떠야 하는 것으로 그리는 것이다.

물론 <아내가 결혼했다>의 설정을 현실적이라고 인식할 사람은 없다. 일단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웬만한 의무를 돈으로 때울 수 있는 남자들과는 달리) 몸으로 때워야 하는 한국사회의 아내/며느리로서 두 명의 남편과 두 군데의 시댁을 상대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녀는 전문 직업인으로 사회생활까지 해야 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울트라 슈퍼우먼이 있다 치더라도 이 캐릭터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은 비현실적인 것보다 비논리적이라는 점에 있다. 일단 그녀가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엄정화처럼 본서방과 시앗서방으로부터 경제적인 만족과 성적‧정서적 만족을 나누어서 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본서방으로부터도 성적 만족을 얻고 있다. 그녀가 본서방과 시앗서방 양자를 통하여 얻는 성적․정서적 만족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해도, 그녀가 이를 얻기 위해 굳이 1+1/n의 결혼이 아닌 2개의 공식적인 결혼, 그러니까 두 번의 결혼식과 두개의 시댁, 두 번의 돌잔치를 할 필요가 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녀는 한때 집시처럼 살다 객사하는 것을 꿈꾸었던 사람이지만 결혼을 경험하자 마치 결혼 홍보대사인양 결혼이 참 행복의 길이라며 시앗서방에게 전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인 결혼이 여성에게 수혜적인 제도로 기능하진 않는다. 그녀는 가사노동을 책임지고, 시댁제사에 참여하여 일을 거드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기존의 가부장적 결혼제도를 그대로 놔둔 채 성차만 뒤집어 처첩제를 시연하는데, 성차 관계의 권력적 속성이 드러나면서 곳곳에서 모순이 표출된다. 그토록 능력이 많은 그녀가 왜 두개의 남편, 두개의 가정, 두개의 시댁을 위해 봉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녀는 합목적적이고 독자적인 욕망을 갖춘 살아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완벽한 아내라 할지라도 독점할 수가 없다면 이를 받아들일 남자가 있겠는가?’ 라는 사고실험에 동원된 ‘완벽한 아내’의 문자 그대로의 현신이라는 점이다. 즉 남성의 독점욕을 반증하기 위해 급조된 남성판타지의 아바타인 것이다.

4. 한 지붕 아래 시앗서방을 두고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텍스트 <경축! 우리사랑>

<경축! 우리사랑>(2008)은 <아내가 결혼했다>보다 덜 주목받았지만, 훨씬 진보적인 함의를 지닌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미완의 과제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원작소설과도 다르게 보수적으로 결론 맺은 세 가지 문제의식은 <경축! 우리 사랑>에 이르러 진보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영화는 본서방의 질투를 정당한 것으로 승인하지 않으며, 이제껏 자연스럽게 바람을 피우던 남성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둘째, 아기는 (화끈하게) 시앗서방의 아이임을 분명히 한다. 셋째, 관계가 외화 되어도 이들 관계는 기존 가정과 공동체의 승인을 얻으며, 그 집과 그 마을에서 그대로 함께 산다. 그녀는 아직까지 한번도 실현해보지 못한 ‘한 지붕 아래 시앗서방을 두고’ 사는 여자이며, 본서방과의 법적 결혼관계를 깨지 않으면서 시앗의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사는 여자이고, 그녀와 시앗서방은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거나 간통죄로 처벌받거나 자발적으로 외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삶을 영위하고 사랑을 이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성원들에게 사랑과 섹스와 임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타의 모범’이 된다.

이 텍스트는 결혼과 불륜을 소재로 한 어떤 영화들보다 전복적이며 여성주의적인 입장을 지닌다. 첫째, 봉순씨는 <아내가 결혼했다>의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달리 현실에 발을 붙인 인물이자 독자적인 욕망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엄마손 하숙집’과 노래방을 운영하는 아줌마로, 중간계급이하의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일하는 여성이다. 가사노동은 물론 보살핌 노동을 위주로 하는 서비스시장의 생계노동이 그녀의 몫이다. 카메라는 첫 장면부터 노동하는 그녀의 동선을 쫓는다. 전단지를 붙이고 노래방 청소를 하며, 하숙생과 가족들에게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짬짬이 인형눈알을 붙인다. 그 사이 남편은 동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논다. 물론 명목상 그는 ‘노래방 사장’이며, 약간의 경제력으로 바람도 피운다.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잠깐 언급이 되었듯이, 부부가 함께 일하는 영세 자영업의 경우 노동의 대부분을 여성이 제공하지만 사업장의 명의는 대게 남자의 것이다. 그녀는 가정경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고, 남편은 별 일 아니게 바람을 피워왔으면서도, 아내의 불륜을 안 남편은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 가정은 잘 살아왔다.” 혹은 “내가 이만큼 살게 해주지 않았나?” 남성중심적 사회의 정상결혼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다. 그러나 그녀의 노동이 실질적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정으로부터 축출당하지 않는다(“이혼 하고 싶으면 해”). 영화는 그동안 비가시적 영역에 머물렀던 ‘일하는 아줌마’의 구체적인 삶과 욕망에 주목한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에 다소 부담스러운 클로즈업을 해가며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주의 깊게 포착하며 그녀의 심경에 관객을 밀착시켜나간다. 영화는 그녀가 익명의 ‘아줌마’에서 여자로, 엄마로, 봉순씨라는 한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노래방에서 뭇매를 맡던 청년이 “봉순씨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자, 때리던 이들은 “봉순씨가 누구야?”라고 묻는다. 그녀는 청년에 의해 ‘꽃’이 되었다)

둘째, 그녀의 여성성은 모성성과 상충되지 않으며, 상호보완되며 변증법적으로 합일되어 있다. <해피엔드>의 전도연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발현하기 위하여 모성을 방기하였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도덕적 철퇴를 맞아야 했지만, <경축! 우리 사랑>의 그녀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지키는 행위와 임신을 유지하는 행위를 함께 수행한다. 그녀가 청년과 사귀는 과정 역시 여성성과 모성성이 결합된 행위였다. 그녀는 모성애로 (하숙집 아줌마이자 장모의 입장에서) 청년에게 측은지심을 느꼈으며, 그를 업고 그를 닦아주다가 그의 손을 빠는 청년에게 사랑을 느낀 것이다. 그와의 동침으로 임신을 하자 그녀의 얼굴은 화사하게 피어난다. 그녀가 청년에게 정을 교류하는 과정은 음식을 해주는 것이다. 그녀에게 보살핌 노동과 모성성은 삶의 능력이자 무기이고 도덕적 정당성을 담보해준다. 그녀는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남편과 딸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뒤늦게 찾아온 보물’을 지켜낸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첫 애니메이션 화면에서 남녀가 만나고 아이를 낳고 늙어지는 몸뚱이를 보여주는데 성교가 나와야 할 장면에서 남자가 여자의 젖을 빠는 것으로 그려놓았다.)

셋째 섹슈얼리티를 은밀하고 억압된 욕망이 아니라 밝고 건강한 생명의 에너지이자 삶의 윤리로 사고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들리는 교성(嬌聲)에 감흥을 받아 동네 사람들이 화목하게 음식을 나눠먹으며 축제의 춤판을 펼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성교를 나누고 너도 나도 임신을 한다는 이 유쾌한 판타지는 ‘성=사랑=생명’의 관점을 분명히 한다. 재개발 설명회 장에서 “우웩” 입덧을 하던 봉순씨의 뒤를 이어, 모두가 임신을 하는 마을로, 즉 진정한 의미의 ‘뉴타운’으로 거듭난 동네에서 봉순씨와 시앗서방은 여전히 한 지붕아래에 살며, 떠났던 딸래미도 돌아와 동생을 돌보고, 남편은 자신의 사랑을 계속한다. 누구의 사랑도 비난받지 않으며 아무도 떠나지 않는 ‘행복이 넘쳐나는 꽃동네 새 동네♬’가 이곳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영화의 금기 없는 성의식은 뜬금없이 똥파리와 텃밭의 배추를 비추던 카메라의 생태학적 시선과 더불어 생철학을 일깨운다. 중년 여성이 사위가 될 뻔 했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만으로도 <정사>의 문제의식을 훨씬 넘어서며, 남편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지 않고 아예 한 지붕 아래 시앗서방을 두고 산다는 설정만으로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훨씬 능가한다. 게다가 시앗서방의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측면에서 <아내가 결혼했다>가 결코 넘지 못한 부계혈연의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선다. 더욱이 이들이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관을 변화시킨다는 설정은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시앗서방을 둔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센세이셔널리즘의 문제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은밀한 불륜의 소재로 탐독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결혼의 본질을 드러내는 텍스트이자 성정치학적 혁명성을 내장한 텍스트로 묘파되어야 한다. ‘창조적 읽기’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 황진미 (영화 평론가)

응답 1개

  1. 탱탱볼말하길

    와아….. ‘경축 우리사랑’ 당장 봐야되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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