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나이가 아닌 문제와 정면승부하기

- sros23

나이가 아닌 문제와 정면승부하기


나에게는 열 살 어린 여자 친구가 있다. 지금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니까, 그녀는 열여덟, 즉 아직 ‘민증’도 나오지 않은 새파란 십대와 사귀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도둑놈이이라고 지탄하는 자들도 있었고, 삼대가 복 받을 일이라고 부러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평상시 소심한 내 성격을 잘 알던 오래된 친구들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며 경악을 금지 못했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은 한결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나와 그녀의 만남은 ‘원조교제’인 셈인데, 도대체 나라는 캐릭터가 그런 짓을 할 만큼 배짱이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닌 말로, 그녀가 작정하고 고발하면 나는 영락없이 미성년 성추행범으로 감방신세를 지낼 수밖에 없다. 웃자고 한 말이지만,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 웃음 뒤에는 언제나 뒷목이 서늘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가. 사실 약간의 페이크가 있다. 그녀는 평범한 십대가 아니다. 자신이 다니던 학교를 뛰쳐나온 자퇴생이다. 나도 이십대 후반이 가질만한 캐릭터인 직장인 혹은 취업준비생이 아니라 취업에는 관심이 없는 순수한 백수다. 우리는 각자에게 부과된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적 테두리에서 한발 비껴나 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우리와 같은 이탈자들이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동체다. 따라서 우리는 무리하게 서로의 사회적 위치에서 이탈하는 모험을 감행하며 만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서 만났다. 그렇기에 공동체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녀와 사귄다는 사실에 그렇게까지 큰 충격을 받지도 않았고, 보통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처럼 ‘어떻게’를 묻지도 않았다. 그런 질문은 공동체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 던진다. 공동체에서 나이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장벽이 아니었다. 허구헌날 만나서 부대끼는데, 누가 누구하고 정분이 난들 뭐가 이상한가.

그렇다. 공동체는 나이를 넘어선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나이를 넘어선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은, 연애 관계에서도 더욱더 많은 실험이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열 살 차이가 나는 만남이 어떤 만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사회가 아닌 공동체에서 만나는 만남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장밋빛 비전은 바로 깨져버렸다. 너무나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민증이 없는 십대, 아직 만으로 열여덟도 안 된 나이다. 우리사회에서 십대 여성은 밤 시간 통제를 가장 많이 받는 연령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 자퇴를 허용할 정도로 열려 있는 부모님이라고 할지라도 통금 해제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의 통금시간은 그녀의 친구들 수준이었고, 따라서 내 기준으로서는 한참 이를 수밖에 없었다. 밤에 볼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밤에 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연인들로선 큰 타격이다. 생각해보라, 밤에만 나올 수 있는 연인들의 대화와 액션(!)이 부족한 연애의 풍경을. 썰렁할 수밖에.

아마 그녀 쪽에서는 반대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기 또래에 가능한 행동범위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한때 연애의 모든 시간을 대낮의 산책으로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산책을 좋아하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산책은 그녀의 환경적 조건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데이트였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 또래의 주변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연애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온건한 데이트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관계는 그 나이 또래의 연애처럼 잔잔히 발전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방식의 연애는 내가 생각하는 연애방식과는 다르다는 것. 나는 밤을 원했으나, 그녀는 낮을 원했다. 나는 강렬한 관계를 원했으나 그녀는 잔잔한 관계를 원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나이의 문제일까? 처음에는 나이의 문제로 접근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어리고 경험이 없다보니까 말랑말랑하고 편한 관계만을 원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를 나이 차이로 접근하다보니 해결할 길이 없었다. 어리니 어쩔 건가? 그녀가 경험을 쌓으며 어른의 연애(?)에 눈을 뜨기 전까지 기다려야지. 이건 전형적으로 체념하는 자세다. 그것도 나의 연애 모습은 성숙된 것이고, 그녀의 연애 모습은 미숙한 것이라는, 그래서 그녀가 결국 성숙한 연애 모습(실제로는 성인 남성인 ‘내’가 생각하는 연애상)을 갖게 될 것이라는 아주 오만한 자세에서 비롯된 체념 말이다. 차이는 차이일 뿐이다. 그녀의 연애상은 그녀에게 고유한 것이지, 나이의 문제로 소급할 수는 없다. 나이는 시간의 문제고, 문제를 시간화하는 순간 시간은 서로에게 폭력으로 작용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인내라는 폭력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복종이라는 폭력을 말이다. 이는 시간을 무기로 서로를 죽이는 꼴이다. 차이가 난다면 그 차이로 직접 대면해야하지 시간을 매개로 차이로 접근하면 차이는 오히려 무화된다.

설령 정말 시간의 문제여서, 그녀가 나이를 먹으면 그녀가 바라는 연애의 상이 바뀐다고 해도, 문제의 핵심을 시간으로 바라봐서는 현재의 관계를 폭력적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 나이 차이를 생각하지 말고, 각자의 다른 관점들을 서로에게 침투시켜야 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연애의 상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그녀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 안에서 무수한 싸움들이 벌어져야지 펄펄 끓는 연애의 장이 형성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 사이에 나이가 개입되어버리면 문제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다. 가령 스킨십 같은 성적인 문제는 분명 나이가 걸려있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원인을 그렇게 설정하는 순간, 문제는 해결할 길이 요원하다. 그녀가 성숙할 때까지 나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나는 본의 아니게 그녀를 금욕적으로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연애와 금욕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욕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겠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변화는 문제를 억제하거나 해소하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니깐. 물론 어려운 일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본다는 것은. 하지만 사랑에는 그 장벽을 훌쩍 넘어버릴 힘이 잠재되어 있다. 나는 그저 그 힘을 긍정하기만 하면 될 뿐.

-조지훈(수유너머 남산)

응답 9개

  1. 조르바말하길

    풉 저도 열살 많은 남자와 사귀는뎁. 다른 연상연하 커플은 이런 고민을 하나봐요. 관계의 고민은 (나이차기 아니더라도) 정말 하루에도 오만가지 방향으로 뻗치지요. ㅋㅋㅋ

  2. hyde말하길

    읽다보니 한자 적고 싶어지네요^^
    30대 여성으로서 이 문제는 나이보다는 경험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나이=경험치인 경우가 많긴 하지만요.. 스물여덟 건장한 청년으로서 충분히 고민하시는것도 이해는 가지만 이부분에서 아무래도 제 경험을 생각해보면 경험이 많지 않았을 경우 때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성적 압력이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필자께서 그럴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필자께서 상대방이 성숙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정면으로 대면하실때 말씀하셨듯이 사랑의 그 강력한 힘으로 상대방이 진정 성숙해가길 도와주시게 되길, 그리하여 진정 멋진 상대로 남게 되길 바래봅니다.

  3. 만으로 30대말하길

    아, 그럼 이 글도 지훈 님의 욕망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행동’?
    암튼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4. 오지랖말하길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해야한다.’
    이 말에 왜 이리 웃음이 터지는 지요.
    양쪽 모두에게 건강한 연애 계속되길 바랍니다

  5. 딸가진 엄마말하길

    고2 딸 가진 엄마로서 글을 읽고 나니 뒷목이 뻣뻣해지는군요.

    • 미카딤말하길

      23살인 저의 어머니도 이렇게 생각하시겠죠…ㅎㅎ
      얼마 전 아버지가 제게 “너 남자친구랑 뽀뽀는 해봤어?”
      “당!(연하지~)…”
      그 옆에 앉아계시던 어머니께서 “얘가 나이가 몇살인데 뽀뽀를 해?!”
      라고 버럭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는 군요 ㅎㅎㅎㅎㅎ
      엄니, 죄송 ;_; ㅋㅋㅋㅋ

    • 미카딤말하길

      23살인 저의 어머니도 이렇게 생각하시겠죠…ㅎㅎ
      얼마 전 아버지가 제게 “너 남자친구랑 뽀뽀는 해봤어?”
      “당!(연하지~)…”
      그 옆에 앉아계시던 어머니께서 “얘가 나이가 몇살인데 뽀뽀를 해?!”
      라고 버럭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는 군요 ㅎㅎㅎㅎㅎ
      엄니, 죄송 ;_; ㅋㅋㅋㅋ

  6. 20대말하길

    당신이 정말 용기있는 자로군요.

  7. 사십대 여인말하길

    그러시면…’낮’에 모텔에 가서 일단 같이 있자고 하십시오. 꼭 성관계는 안하더라도 방에 같이 있으면서 손잡고 차근차근 서로의 욕망을 대면하고 대화하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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