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사랑은 ‘차이’의 체험이다, 라고 말한다는 것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꽤 매혹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은 종종 독자의 은근한 기대를 보란 듯이 배신한다. 순진한 독자들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푸코의 <성의 역사>, 유명세를 무색하게 만드는 마조흐의 소설들, 정작 대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란 무엇인가?’ 같은 원초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 그 책의 리스트 마지막에 이 책(오사와 마사치의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을 추가해도 결코 결례는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제목과 달리 연애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 아니며, 그렇다고 ‘연애’ 자체에 관한 책도 아니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연애학 개론서도 아니다. 그래서 ‘연애’라는 단어에 꽂혀 덜컥 이 책을 집어 들면 서론을 채 넘어서기도 전에 배신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연애’와 전혀 무관한 책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이다. 이 책은 연애와 언어의 문제를 철학적인 차원에서 사유하고 있는 저작이며, 다만 ‘연애’를 특권적인 대상이 아니라 언어, 화폐, 표현, 역설, 커뮤니케이션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시키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연애’라는 사건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타자성의 체험’이다. 물론,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연애’라는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건과 언어철학의 ‘고유명사’의 동형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나아가 ‘타자’ 문제를 화폐와 커뮤니케이션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나를 사랑하는 거야?”라고 묻곤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관습적인 대답은 ‘~하기 때문에’, ‘~라서’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이 만족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대답은 “그럼, ~하기만 하면 내가 아니어도 좋다는 거야?” 같은 황당한 반문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이런 대답의 딜레마가 고유명사의 지시가 대상의 성질에 대한 기술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와 같다고 본다. ‘나’는 ‘나의 성질’로 환원될 수 없고, ‘당신’ 또한 ‘당신의 성질’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유일성의 논리(‘~임’)가 그것이다. 유일성이란 “둘도 없는 내 당신”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랑 안에서 발화되는 모든 질문은 궁극적으로 유일성에 대한 물음이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은 유일성이다. 그리고 이 유일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상(당신)의 대체불가능성(‘당신이 아니라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 유일성 증명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선택의 가능성, 즉 유일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 대체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대체가능성(선택가능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것은 ‘나’가 중심인 우주의 동일성에 잠재적으로 ‘차이성’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니콜라스 루만의 개념을 빌려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 즉 사랑의 비대칭성을 사랑하는 자의 ‘행위’가 사랑 받는 자의 ‘체험’에 접속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루만 식으로 말하면, 사랑이란 사랑하는 자가 그 행위의 결과가 사랑 받는 자의 체험에서 긍정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의미 부여되어 나타나도록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타자’이다. 왜 그럴까? 굳이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동물임을 전제하지 않아도, 사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임의의 지시가 대상을 ‘나’가 중심에 위치한 우주 안에 자리 잡게 만드는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지시는 결국 ‘나’의 중심성이라는 전제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사랑’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랑’에서는 나의 지시의 실효성 자체가 타자의 우주 내부에서 타자에 의해 승인됨으로써만 확립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나의 지시가 타자(당신)의 우주 내부 요소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지시의 최종적인 담당자는 ‘나’가 아니라 타자, 즉 ‘당신’이다.

‘사랑’이라는 사건, 낯선 준거점의 출현은 나의 단일성이라는 우주를 부정하고 나를 타자와 대등하게 한다. 뒤집어 말하면, 타자가 나의 우주 내부적 요소로만 나타날 때, 나와 타자는 대등하게 직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에서는 나의 단일성이 그 부정과 공존”하게 된다. 이것을 사랑의 비극적인 구조라고 부르자. 우리는 ‘사랑’ 안에서 ‘나’의 중심으로서의 기능을 타자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 빼앗김을 굳이 상실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오사와 마사치는 타자에 직면하고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체험에서 ‘나’의 단일성이 부정되는 것은 외부로 연결되는 창문이 뚫리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사랑은 우주의 중심을 ‘나’에게서 ‘타자’로 옮기는 사건이다. 사랑은 , ‘타자’가 중심인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진리를 알려주는, 그리하여 ‘나’라는 확고한 동일성을 깨뜨리는 사건이며, 그럼에도 ‘나’의 우주와 ‘타자’의 우주가 동일(평등)함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한 사건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평등’의 문제에 동일성과 차이를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동일성과 차이는 다른 수준에서 배분되고, 그것으로 인해 차이는 상대화된다. 상위의 동일성이 차이의 상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사랑을 ‘차이성’이 ‘동일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동일성과 차이가 다른 수준으로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등치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지점은 동일성이 이미 ‘차이’라는 것이다. 동일성 내부의 차이가 아닌, “동일성인 차이”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저자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미 ‘타자=차이’이기 때문에 타자는 ‘나’에 대한 절대적인 차이이고, 때문에 ‘타자’는 내가 ‘나’의 성질이나 공상을 투영할 수 없는 절대 거리로만 나타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사랑’은 차이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서론의 마지막에 쓴 “연애는 스스로의 불가능성이라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라고 문장은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동일성의 불가능성에 대하여’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듯하다.

– 고봉준

응답 2개

  1. 비포선셋말하길

    봉준샘. 그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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