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어머니 대자연>: 어머니, 아기, 그리고 자연선택의 역사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저자 새러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는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에 석좌교수로 있는 영장류학자다. 스스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인도 라자스탄에 사는 랑구르원숭이의 영아살해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내에 번역된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 및 작년에 출판된 <어머니와 타인들>을 비롯한 여러 책과 글들을 발표했다. 허디는 풍부한 학문적 업적 뿐만 아니라 ‘다윈주의 페미니스트’라는 그의 입장으로도 유명하다. 홈페이지(www.citrona.com/hrdy)에 저술과 논문, 연구업적과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게시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참고하셔도 좋을 듯하다. (다만 아쉽지만, 영어로 되어 있다.)

1999년에 출간된 <어머니 대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체들의 삶의 모습을, 모성이 진화 과정에서 담당했던 역할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고 있다. 저자의 홈페이지에는 저자 자신이 더 선호하는 책의 부제가 “어머니, 아기, 그리고 자연 선택의 역사”라고 언급되어 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허디는 어머니와 아기가 인간 진화에서 담당했던 역할을 재구성하고, 진화의 핵심 개념인 자연 선택에 대한 이해 자체를 역사 속에 위치시키며, 세 층위 모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모성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종과 문화를 가로지르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그 구체성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생명체이고 포유류이며 영장류이자 그가 속한 문화의 행위자라는 다층적 존재로 이해된다. 과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접근하는 만큼 개별 존재를 설명 대상으로 삼는 일은 드물지만, 집단으로 고려할 때조차 단순하고 단일한 존재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책의 제목처럼 자연은 만물을 길러 내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형상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의 유일한 모습은 아니다. 우선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소설가 엘리엇의 표현을 빌면 자연은 여신보다는 나쁜 버릇을 가진 노부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성과 자연 모두에 투사되는 통념적인 이미지를 전복하면서 실제 어머니의 행동 및 어머니의 ‘본성’을 탐구해 들어간다.

그 결과는 가부장제적 상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본래 모습이 전적으로 헌신적이고 양육적이라는 견해는, 특정한 문화 속에서, 그것도 남성에게 자연의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그 배후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과학 자체의 이상에 비춰 볼 때도 자연을 통념을 입증하기 위한 단순 알리바이로 이용하는 것은 가장 나쁜 만남의 방식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질문들이 제기되며, 질문의 형식상 얻어낼 수 있는 답이 무엇인지를 따져 볼 때, 그 답이 어떤 의미에서의 진실이 되는지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허디에게 이 문제는 진화 연구에서 여성/암컷(female)의 관점이 배제되어 있었다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생물학은 성차별적이라며 등을 돌릴 것인가? 허디가 택하는 방식은 좀 더 공세적이다. 진화생물학이라는 장르의 ‘게임 규칙’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서사가 가능하다는 점, 심지어는 더 나은 과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행동 관찰 기법(focal sampling)에 대한 논의처럼, 인간 비인간 모두에서 실제 행동을 관찰해 보면, 그들이 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하나의 인간 사회로 한정하더라도, 여성이 놓인 맥락(가령 계급)에 따라 모성의 전술과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이유 때문에 비정상적 반응으로 취급되었던 여성/암컷의 태도나 행동들 역시 다시 검토해볼 수 있다. 예컨대, 왜 어머니들은 자식을 직접 키우지 않고 고아원으로 보냈던 것일까? 왜 어머니들은 아기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거나, 낳은 아기를 살해했던 것일까? 이런 결정들은 모성 본능에 반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의 한 결과인가? 사회적 배치가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배치 속에서 본능이 내놓은 최선의 대답인가?

허디의 이야기에서 각 행위자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생애 번식 성공을 더 높이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 핵심에는 진화적 계보를 지속하는 문제가 있다. 어머니들은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계보를 지속하는 방향으로 행동을 해 나간다. 앞에서 열거했던 내용들이 문제라면, 문제는 어머니들이 모성 본능에 충실하지 않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 결정들은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또한 어머니들이 경험하기 마련인 아이에 대한 양가감정은 모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성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난다.

허디는 이 맥락에서 ‘본능’이라는 말, 또는 ‘생물학적 어머니’라는 말이 너무 협소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머니는 단순히 자신의 유전적 자원을 물려 주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유전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유전적 투자를 헛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키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능력은 진화 과정과 더불어 구성되어 왔다. 이 때 모성이란 매우 구체적인 능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능력은 딱히 모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용들 역시 담고 있을 수 있다.

19세기 일본 판화, <은혜에 대한 가르침> 그림 속의 글의 내용은 자궁이 시들 수 있는 식물과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임신 단계별로 서로 다른 꽃을 손에 들고 있다. 3개월째는 벚꽃, 4개월째는 모란꽃, 5개월째에는 붓꽃이다.

가령 사회적 지위의 확보는 어머니로서 하는 일 중 하나다. 아이들을 양육할 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와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야망은 모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이룬다. 특정한 사회적 배치가 그 둘을 상반되는 것으로 보게 만들 뿐이다. 여성의 사회 활동은 더 나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라도 항상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운동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일 수 없다. 결론은 여성에게는 통념적인 ‘모성’과는 다른 형태의 모성이 진화적 유산으로 주어졌고, 남성 고유의 것으로 여겨졌던 자질들 역시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육아가 족쇄가 되는 것은, 사회 활동과 육아가 별개이며 육아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라고 취급되는 한에서다. 여기서 허디는 ‘애착’의 문제를 다시 검토하려 한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여성은 아이를 홀로 기른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도움을 항상 받았고, 그 자신은 사회 생활이나 생계 활동을 병행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인간 여성에게 특유한 번식 생리는 양육을 돕는 다른 존재들을 가정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이 맥락에서는 제한된 모성관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다른 관계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고, 인간은 본래 협동해서 번식하는 종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저자 자신의 언급에 따르면, 그것이 이 책의 중심 주장이다.) 아기 역시 인간 진화 과정에서의 주요 행위자로 부각된다. 왜 아기는 터무니없이 떼를 쓰는가? 아기가 그토록 매혹적인 존재인 까닭은 무엇인가? 아기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은 생애사에서 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해 놓고 나면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볼 법 하다. 여성은 자애로운 어머니는 아니더라도 결국 어머니인가? 이 관점에서 보면 허디의 논의 방식은 양면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성을 가두는 특정한 모성 개념을 전복하려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을 여전히 어머니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라면 일단 그의 연구 주제가 ‘모성’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난점은 허디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진화 이론 자체가 최종 원인의 자리에 번식의 문제를 두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논의를 일관되게 적용하자면, 남성 역시 가장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아버지로서 행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로서 하는 노력(parental effort)을 부모-자식간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에 한정해 둘 때가 많다. 책의 문제의식을 다시 살펴보면, 여성/암컷의 진화와 관련해 거의 유일한 동력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바로 부모 노력이며 또한 너무 협소하게 이해된 부모 노력이었다는 데 있다. 거듭 강조한 것처럼 여성/암컷은 훨씬 다면적인 존재다. 그리고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삶의 행로를 좌우할만큼 큰 문제라면 바로 그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점검해 볼 필요도 있다. 어떤 조건에서 여성은 오직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되는가? 허디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 해답은 여성의 ‘생물학’에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은 문제가 오히려 다른 데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허디의 관점에서 인간 실존을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듯 보인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 생물학을 ‘사회’ 생물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 이들 유기체가 이루는 사회 관계라는 측면에서 생명 현상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이라는 개념 역시 이미 결정된 행동패턴이나 일방향적인 충동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적합한 행동을 산출하기 위한 여러 능력들의 체계를 일컫는다. 생물체는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자신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제 풀이 기계다. 생명체 자신이 변화함에 따라 그들에게 제기되는 문제 역시 변화한다. 따라서 진화는 멈추지 않는다. 진화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처럼, 생명은 본질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생명은 문화만큼이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진 속 아이포 어머니는 방금 세번째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는 원치 않았던 딸이었다. 어머니는 버리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꾼다.

그렇다면 진화 이론이 본능의 문제를 문화의 문제와 뒤섞는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사회’, 즉 ‘관계 자체’를 무엇이라고 가정하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수 있다. 만약 다른 ‘사회’를 가정한다면 생명 현상 역시 다르게 보일까? 그 둘은 함께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생물학을 문화의 토대로, 생물학적 개념들을 그 자체 사실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생물학적 개념들이 그 토대에서 어떤 사회를 가정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허디에게 그것은 남성/수컷 중심적인 사회다. 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과학학자 다나 해러웨이의 지적처럼 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암컷을 진화 과정에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등장시키기 위해, 남성/수컷과 동등한 경쟁적 주체, 이해관계에 밝은 주체로서 갖는 능력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동등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주어진 척도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의 ‘평등’은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서의 평등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페미니즘 논의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생물학 자체에 대해 아예 다른 ‘게임 규칙’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관점에서 보면 허디의 논의는 다소 미진해 보일 수 있다.

물론 책의 의미가 거기에 머무르리라는 법은 없다. 분량만큼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고, 풍부하게 제시되는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정 성별의 자손 선호, 임신중절, 완경(보통 ‘폐경’이라고 이야기되는 이 개념의 번역어는 저자 자신의 논지를 반영해 선택했다)과 같은 여성 생애사의 현상, 산후 우울증, 부부간의 양육 분담, 육아와 관련된 사회복지, 영아 돌연사 증후군과 같은 주제들이 그 내용에 포함된다. 또한 주장을 이끌어가는 저자의 논의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으며, 스스로의 삶의 경험 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질문한 흔적들이 자주 엿보인다. 인간을 다루는 다른 진화생물학 저작들에 비해 종간 비교의 차원에서나 문화 비교의 차원에서나 훨씬 더 적극적인 논의를 제공한다는 점 역시 큰 강점이다. 문화가 다르다고 단순히 가정한 후 ‘사실은’ 보편성이 있다고 ‘입증’하기보다는 실제로 다른 행동과 태도가 산출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 황희선(역자, 수유너머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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