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칼국수 집

- 김융희

사십년 전 단골집을 그동안 잊고 지내다가 10년이 넘어서야 들렀습니다.
낙원동 뒷골목에 있는 구멍 식당으로 “해물 칼국수 집”입니다.
그 식당은 좁은 공간에 칼국수만 팔고 있는 헙수룩하여 전혀 볼품은 없지만,
옛부터 신문 잡지에도 소개되었고, 언제나 손님이 넘쳐나는 집이었습니다.

저는 손녀와 우동집에 가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이후 손녀는 끈질겼습니다.
“우동 한그릇”이란 책을 읽다가 생각이 나서 그냥 한 번 해본 소린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올시다. 주말이면 전화를 해서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우동집을 언제 가느냐고 따집니다.

손녀 우동 한그릇 사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놈이 요구하는 조건이 나를 난처하게 한 것입니다. 어린 그가
기대하는 것은, 우동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친절한 주인이
경영하는 분위기의 우동집에서 우동을 먹는 것입니다. 우동도 맛있어야
하지만 “주인이 좋은 우동집”이란 조건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별로 찿지 않는 밀가루 음식점을 요즘 자주 다녀보고 있습니다.
밀가루 음식은 위에도 부담이지만, 날씨는 더위로 푹푹 찌는데 좁은 공간에서
뜨거운 칼국수를 먹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손녀와의 그
약속 때문에, 오늘 “해물 칼국수집”을 찿는 까닭도 그런 이유에서였더랬습니다.

일본에서 우동이라면 우리에게는 칼국수에 해당할 것이란 생각도 했지만,
오래전 “해물 칼국수집”의 주인 아주머니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거의 40여년 전 일로 가끔 들려 칼국수 한 그릇 먹었던 식당에 별다른 관심이
있었겠는가 여기겠지만, 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식당입니다.

1970년대 였습니다. 작은 구옥들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낙원동 아주 뒷골목,
길 옆 문간방을 터서 탁자 두어개 놓고 대충 만든 식당에서 칼국수를 팔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다 점심 때가 되어 들렀지요.

손님이 없어 무료를 달래기 위함인지 성경을 읽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 우리를
맞아 칼국수를 정성껏 만들어 주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40대 초반의 안방 마님같은
인상의 아주머니는 영락교회 집사라면서 외아들은 군대를 갔고 가정 형편도 있지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골목 끝자락에 누가 찾겠냐며 공연한 짓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고 합니다.

늘 식당에서 외식을 주로 했던 때라, 어머니 손 맛 같고 가정집 분위기도 느낄 수
있어서 가끔 들르곤 했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을 못 들르다 모처럼 갔더니 식당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우연히 아주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식당, 옛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새로 개업을 해서 역시 칼국수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목이지만 큰길이 가까워 사람도 많이 다니고, 식당도
좀 더 넓혀 커졌습니다. 간판도 제법 크게 달았고 사람들이 혼잡할 정도로
성업중이었습니다. 10년도 훨씬 넘어 일로, 지금은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요즘 나는 손녀와의 약속을 위해 도통 골몰무가입니다. 골몰하다 보니 문득
칼국수집 아주머니가 떠올랐구요. 항상 봐도 언제나 웃는 얼굴에 누구에게나
친절하면서 남을 편하게 대해주는 아주머니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마음씨 고운 아주머니,
한 번은 어느 허름한(남루한) 차림의 손님이 식대로 5000원짜리를 내더군요.
돈을 받은 아주머니, 흘금 손님을 쳐다보더니 다른 분의 계산을 하면서
매우 바쁜 척, 조금 후, 오천원 낸 손님에게 거스름 돈 2000원이 아닌 칠천원을
주었습니다. 멈칫하던 손님은 모른 척 그냥 나가고 아주머니는 다시 분망합니다.
오천원을 10000원으로 착각하고 거스름 돈을 준 것도 모른 채….

그 사실을 넌지시 말해 주었더니, 아주머니는 또 웃으시며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차림새를 보니 그냥 먹고 가게 했으면 싶은데 행여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보아 슬적 모른 척 만원으로 착각한 것처럼 돈을 거스러 준 것이랍니다.
아주머니의 선행은 종종 쉬 볼 수 있는, 참 착하고 맘씨 고운 아주머니였습니다.

단골이었던, 오랜만에 찿아온 칼국수집이었습니다.
손녀에게 소개를 해주고 싶은 집이면서도, 그 집 칼국수가 어린 그에게 입맛에
맞지가 않을 것 같아 이 때까지 망설였고, 오늘도 나 홀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많이 변하여 옛 정취는 전혀 아닌 실망뿐입니다.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고, 우선 벽에 써 붙여진 “글귀”
[“1인당 기본 한 그릇, 두 분이 나눠 드시면 안돼요. 7세 이상 어린이는 꼭
주문해 주세요“ 항상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tv화면과 함께
kbs, mbc, sbs 방영…… 사진에도 그 어디에도 아주머니의 흔적은 없습니다.
식당은 그 자리에 식단도 그대론데, 얼굴과 분위기가 싹 바뀌었습니다.

음식은 싫지만 또 다시 밀가루 집을 찿아 나서야겠습니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

– 김융희

응답 1개

  1. bada말하길

    ‘북해정’을 찾으시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우동 한 그릇’ 공연을 손녀와 관람하시는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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