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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불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연애 소수자’들을 위한 영화 <미쓰 홍당무>

- sros23

연애가 불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연애 소수자’들을 위한 영화 <미쓰 홍당무>

동성애자들이 슬픈 이유는 그들의 사랑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주고받을 인구군이 협소해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들에게도 사랑의 욕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이성으로부터는 물론 동성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 그게 누구냐고? 연애가 불가능한, 소수자 중의 소수자, 속칭 ‘찐따(들)’말이다. <미쓰 홍당무>는 일종의 ‘여자 왕따 성장담’으로 계보를 찾자면 <캐리>, <내 책상위의 천사>,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뮤리엘의 결혼>, <판타스틱 소녀백서>등과 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캐릭터 묘사와 결말은 전대미문의 독창성을 뽐낸다.

그녀는 깡마른 체구에 얼굴은 시뻘겋고 목소리는 갑자기 흥분조로 변하는데다가, 20년전 촌티패션을 고수하며, 교무실에서 자고 학교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괴상한 여중 교사이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녀에게 세상이 좀처럼 주려하지 않는 변명의 기회를 주고, 그녀 같은 ‘비상식적 캐릭터’에 이해의 눈길을 허하고자 한다.

그녀가 엉뚱하게도 피부과 의사를 붙잡고 늘어놓는 ‘안면홍조증의 기원’은 고3 수학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욜라’ 촌스러운 복장의 그녀는 ‘왕따’였고, 아이들이 단단히 맞잡은 우정의 결계를 뚫지 못하고 혼자 안쓰럽게 도움닫기 하다가 결국 단체사진 속 우스꽝스러운 얼룩으로 남았다. 그때 유일하게 그녀를 찾던 서선생님을 짝사랑하게 되었고, 이제 같은 학교 선생님이 된 그녀는 “제제제작년 회식 때” 가벼운 신체접촉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며 망상을 키워간다. 그러나 서선생은 중학생 딸이 있는 유부남에다 예쁜 여선생과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녀는 전교 ‘왕따’인 서선생의 딸과 의기투합하여 둘을 갈라놓기 위해 온갖 ‘삽질’을 벌이는데, 상황은 꼬여만 간다. 결국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서선생과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녀와 짝이 되는 것은 서선생의 딸래미이다. “찐따와 찐따 애인”이 되어 시시덕거리는 두 여자의 해피엔딩 이라니! 참 파격적인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여성 왕따’ 스토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신데렐라>나 <미운 오리 새끼>가 제시하는 ‘왕따’ 탈출해법은 그녀의 땟물이 빠지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주거나 자신이 백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만, <미쓰 홍당무>는 그런 혁명적인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1등에 목을 매느니, 목을 매겠다”는 그녀의 지론처럼, 영화도 소박한 결말을 추구하는데, 평범한 관심이 고팠던 그녀에게 그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하나면 족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이라는 말처럼, 적당한 남자와 맺어주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가 되도록 하는 것(가령 <영어완전정복>)이 통상적 결말이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는 그러한 통상적 결말을 거부한다.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찐따와 찐따 애인”이 된 두 사람은 모두의 야유 속에서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을 펼친다. 이 장면을 <어바웃 어 보이>의 공연 장면과 비교해 보라. 휴 그랜트는 무대에 함께 함으로써 소년을 ‘왕따’의 위기에서 구출하지만, 그녀는 ‘전교 왕따’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혀준다. 그리고는 마치 환호라도 받은 듯이 킬킬거리며 교정을 내려간다. 두 사람이 <죽어야 사는 여자>의 메릴 스트립과 골디 혼처럼 팔짱을 끼고 히히덕거리며 교정을 내려가는 괴상망측한 엔딩은 우리사회의 공고한 ‘이성애 커플주의’에 강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동성사회적(homosocial) 관계이다. 그녀가 안면홍조증을 얻은 것도 (이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고에서의 따돌림 때문이다. 그녀가 서선생을 사랑해서 펼치는 소동들도 여자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사모님의 교습소를 다니고, 예쁜 선생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며, 딸내미와는 밤새 채팅과 연극연습을 한다. 그녀들이 성적 판타지를 발산한 채팅 상대자도 예쁜 선생이다. 여기서 서선생은, “커진다커진다커진다…”라고 쳐대면 저편의 예쁜 선생은 흥분하고 이편의 두 여자들은 우정이 돈독해지는, 문자 그대로 ‘텅 빈 기표로서의 남근적 존재’에 불과하다. 5자 대면의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되기도 하고 성추행이 되기도 하며 어찌 보면 가정파괴범이 되기도 하는 사안의 복잡성은 모두 그녀와 딸래미와 사모님의 말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서선생은 갈등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기실 그녀들이 펼치는 마당극 한가운데 박힌 ‘말뚝’이다. 에필로그에서 두 여자는 피부과 의사를 찾아가는데, 그 남자 역시 두 여자의 ‘말뚝’이 될 것이다. 이처럼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을 ‘텅 빈 중심’으로 사고하고, ‘주변’에서 회전하는 여성들간의 애증의 관계에 착목하는 시선은 이미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서도 보았던 감독 특유의 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결말이 여교사와 여학생간의 결합이라고 해서 동성애 영화로 볼 수는 없다. <여고괴담4-목소리>에서 여교사와 여학생의 관계는 어떤 이성애 관계보다 농밀하였다. 그러나 “찐따와 찐따 애인”은 그러한 농밀함을 지니지 않는다. 이는 그녀와 서선생간의 관계가 <연애의 목적>의 스캔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쓰 홍당무>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멜로가 불가능한, 뭘 해도 시트콤이 되고야 마는 찐따(들)’이다. 이와 가장 대극에 놓인 사람이 사모님이다. 그녀는 전신 기부스를 하고 병실에 누워서도 9살 연하의 봉사자를 엎어뜨렸고, “난 니가 마음에 든다”는 한마디로 결혼에 성공한다. 세상에는 성적 매력이 충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모든 멜로가 이성애든 동성애든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인간들을 향하지만, <미쓰 홍당무>는 그렇지 못한 애정-소수자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돌린다. 비슷한 여성들간의 결합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 <몬스터>나 <봉자>와 비교해보면 <미쓰 홍당무>가 이들의 관계를 굉장히 밝고 명랑하게 승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을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노력해야 해…” “열심히 해도 소용없어…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 같은 대사들을 통해 그들의 자의식과 목소리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산만하고 매끄럽지 못한 편집에, 웃음의 코드도 썰렁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연애 소수자들을 위한 영화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한마디로 ‘꽃들에게 희망을’, 혹은 ‘그 얼굴에 햇살을’을 외치는 영화이다.

– 황진미

응답 3개

  1. 탱탱볼말하길

    이 영화 무척 재밌게 보았습니다. ^^ (영화 비평적 측면에서) 동성애 영화로 볼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만, 현실에서 동성사회적(homosocial) 관계와 동성애(자) 사회의 코드가 딱 구분되기만 하는건 아니어서 문득 전복적 읽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그러기엔 캐릭터들이 너무 ‘찐따’적인가?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대상화하지 않는 느낌이라 오히려 희화화하고 있는 부분들이 비교적 유쾌하던데요?) 이 귀여운 커플, 처음부터 끝까지 누가 구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뭔가 씨니컬한듯 하면서도 좀 변태적인(?) 구석도 있고 발랄하고 힘이 있어서 저도 주변의 친구들도 보고나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 글쓴이말하길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고 해서 전복적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충분히 전복적입니다. ‘이성애 커플주의에 강펀티를 날린다’는 것이 그런 뜻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찐따들 이야기라서 시시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그리는 것 같은 ‘진정한 소수자들’의 욕망이나 관계에 대한 주목이 이성애냐 동성애냐 하는 담론보다 더 본원적이고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탱탱볼말하길

      아, 부연을 해주시니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되네요. ^^ 저도 그런 의미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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