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공포증

- sros23

공포증


“매이야, 목욕하자” 욕조에서 아내가 매이를 부른다. “이거 좀 더 보고요” 거실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 매이가 대답한다. “매이~, 빨리 오세요~.” 한참 지난 후 아내가 다시 매이를 부른다. “이거, 두 번만 더 보고요” ‘막대기 달린 아이스크림’을 빨며 만화에 빠져든 매이가 말한다. 2회분 방송이 끝나고 내가 “자, 이제 두 번 봤으니까 목욕하자.” 라고 말한다. 매이가 목욕하는 동안이 유일하게 뉴스나 드라마 같은 내 ‘만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매이, 두 번만 보기로 했잖아. 자, 이제 엄마랑 목욕해” 그래도 매이는 TV 앞을 떠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내 주의를 돌리려고 “아빠, 흘렀어. 닦아줘” 하며 녹아내리고 있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내 쪽으로 내민다. “자기야, 매이 데리고 와” 아내가 재촉을 한다. 울컥 짜증이 난다. “매이! 이제 목욕하자. 목욕하고 코 자자” 급한 마음에 나는 매이를 달랑 안고 화장실로 데려가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요즘 매이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내가 자기 몸을 들고 옮기는 걸 제일 싫어한다. 엉엉 울면서 내려 달라고 소리친다. “아빠, 미워. 매이가, 매이 혼자 가려고 했는데!” 역시 무리수였다. 나는 협상에 실패해서 완력을 쓰는 나쁜 권력자가 되고 말았다. “매이가 안 가니까 그렇지” 구차한 변명을 했다. “앙앙, 매이 혼자 갈 수 있어. 저기서 혼자 갈 거야” 원칙이 중요하다. “알았어. 매이 혼자 가”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매이를 들어다 다시 거실 한 가운데 옮겨 놓았다. 잠깐 울더니 매이는 다시 만화를 본다. 나쁜 아빠의 약점까지 잡힌 나는 포기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이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아내가 그만 애쓰고 자기에게 맡기란다. 내가 모르는 비장의 카드가 있나 보다. “매이~ 안 오면 엄마 나간다. 그럼 매이는 아빠랑 씻어야 돼!” ‘저게 통할까?’ 그런데, 매이가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뭔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닥친 듯 불안해하더니 급기야 발을 동동 구르며 나한테 “아빠, 어떻게 좀 해봐. 악, 엄마 나온데, 아빠, 엄마 나오기 전에 어떻게 좀 해 봐. 제발, 어떻게 좀 해봐!” 하며 울먹이는 게 아닌가? 나참, 이게 무슨 오버인가? 엄마가 나와 버리는 게 뭐 그렇게 하늘 무너질 일이라고, 엄마 젖 먹으면서 목욕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별 재미없는 아빠랑 목욕하는게 뭐 그리 끔찍한 일이라고 저렇게 애원까지 하는가? 그리고 “엄마한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난해한 표현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아내도 좀 의아한가 보다. 나 없이 둘만 있을 때 “엄마 나간다. 혼자 씻어”라고 하면 다급한 마음에 욕조로 달려왔나 본데, 이번엔 아빠한테 엄마 어떻게 좀 해보라며 울며 애원하는 것이 의외였는지, 막 웃는다. “와, 엄마가 아빠랑 싸우고 집 나갈 때 애가 아빠한테 매달리는 장면 같지 않아? 애들 반응이 저런데 어떻게들 싸우고 집을 나갈꼬. 눈물겹다.”

매이가 날마다 새로 배우는 표현법 중에 저렇게 격정 멜로풍의 대사를 들을 때마다 놀란다. 엄마하고 싸울 때, “엄마, 매이 좋아했잖아.” 라거나 나랑 싸우다 내가 화를 내며 공부방으로 들어가 버릴 때 “아빠,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경우다. 매이는 엄마나 아빠와의 관계 단절에 대해 과도한 불안과 공포의 반응을 표출할 때가 있다. 엄마가 불렀는데 늑장부리다 가서는 꼭 “엄마,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라고 진지모드로 말하고, 엄마가 자신에게 토라진 반응을 보이거나 아내가 극약 처방으로 마치 매이가 옆에 없는 듯이 냉담하게 행동하면 매이는 급 반성 모드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한다.

오늘의 저 황당 시추에이션은 만화도 보고 싶고, 엄마의 애정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둘 다를 쥐고 있다가, 엄마와의 애정관계를 자신이 망쳐버린 것 같은 파국이 감지될 때, 매이는 발작적인 행동을 보인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이의 이러한 공포반응을 보면 한편으로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매이 앞에서 부부 싸움을 한 적도 없고, 매이를 오래 동안 떨어뜨린 적도 없고, 그 옛날 우리 부모처럼 “말 안 들으면 다리 밑에 있는 거지 엄마한테 데려다준다”며 공갈을 친 적도 없었는데, 남부럽지 않은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저런 분리 공포를 표출하는 걸까? 어린이집에 너무 오래 동안 맡겨서 부모정이 고팠나? 그런 티 안 내고 재미나게 놀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아내가 보이는 유사 신경증적 공포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아내는 겁이 많다. 공포영화는 물론이고 그냥 영화에서 사고장면 같은 게 나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쥔 채 온몸을 벌벌 떤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그 많은 영화를 어찌 보는지?) 연애할 때 한 번 장난으로 몰래 다가가 “왁!” 하고 놀라킨 적이 있는데, 거의 20분 동안 놀란 가슴 진정을 못하고 패닉상태를 보여서 민망해서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곰팡이나 벌레를 발견하면 “으악” 비명을 지른다. 한번은 가스랜지 밸브가 완전히 안 잠겨서 불꽃이 조금 남아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일어날 수도 있었을 화재 장면을 상상하며 삼십분 이상 부들부들 떨었다. 상상력이 남달라서인지, 신경이 예민해서인지 영화 속의 험악한 장면을 보는 날엔 집에 와서도 사색이 되어 그 공포를 곱씹으며 진저리를 친다. 애를 낳고, 매이와 정이 담뿍 들수록 영화 속의 유괴사건이나 유아 폭력에 대한 반응은 거의 신경증 수준이다. 그래서 르뽀프로나 뉴스에서 소아 질병이나 소아 폭력 관련 보도가 나오면 한 순간도 보지 못하고 헉헉대며 채널을 돌려 버린다. 그런 끔찍한 일이 매이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정신줄을 놓곤 한다.

“아유, 예뻐. 매이, 사랑해! 이렇게 사랑하는데, 만약 매이가 없어지면, 엄마 어떻게? 아유, 무서워.” 겨우 진정이 되어서도 저런 말을 하며 누워있는 매이를 으스러질 듯 껴안는 아내를 보며 나는 또 내 나름대로 걱정이다. 사실 분리장애는 매이가 아니라 아내에게 더 큰 문제다. 매이가 학교에서 캠프 떠나면, 혹은 더 커서 기숙학교라도 가면, 유학이라도 가면, 시집이라도 가면, 관계가 틀어져서 정을 끊고 살기라도 하면, 혹은 만의 하나 신의 폭력으로 죽기라도 하면, 저 사람의 삶도 무너져버리는 게 아닐까? 관계가 깊을수록 상실과 분리의 공포도 깊어진다.

매이도 아내처럼 엄마와의 애정이 깊은 만큼 상실의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걸까? 프로이트가 거세 콤플렉스를 설명할 때 말했던 것처럼 상실은 오직 ‘가능성’만으로 심리적 현실을 장악해 버린다. 부모와의 애정이 깊은 만큼 상실의 가능성에 압도되어 어떤 애는 미래의 거세공포로 남성이 되고 어떤 애는 현재의 거세를 상상하며 여성이 된다. 상실과 결여의 공포를 연기하며 바야흐로 매이는 외디푸스의 극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매이아빠

응답 3개

  1. 안티고네말하길

    매이의 오이디푸스기가… 한편으론 정말 기대되어요~ㅋㅋㅋ(사악한 웃음, 씨익~)

  2. 효리말하길

    매이를 보고 있으면 꼭 책대로 크는 것 같달까? 뭔가 신기한 느낌이에요. 자신을 ‘매이’ 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렇고, 엄마아빠와의 애착관계도 그렇고, ㅎㅎ 아무튼 매이데이 제일 재밌게 보고 있어요~ 다음 회도 기대하겠습니당.

    • 매이엄마말하길

      아이 성장에 관한 어떤 책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저도 관련 책을 하나 보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시는데로 알려주시면 참고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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