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이스라엘 대통령의 조용한 방한

- sros23

이스라엘 대통령의 조용한 방한

폭력이란 인간 본성이 아닌가를 생각할 정도로 강자가 약자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걸 자주 봅니다. 국가 간 전쟁에서도, 권력집단의 법적 폭력에서도, 개인 간의 사적 폭력에서도 그런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강자의 폭력이 간혹 그가 가진 공포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강자가 스스로를 약자로 상상하면서 엄청난 공포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실로 무서운 순간이지요. 왜냐하면 두려움에 떨 때 강자의 폭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해지거든요.

유대인 절멸정책에 나설 때 나치는 독일의 인종적 오염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것도 폭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초강대국 미국이 벌인 끔찍한 전쟁은 어떻습니까. 일상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동성애자 혐오증을 가리키는 호모포비아나 이주자 혐오증인 제노포비아도 그런 경우지요. 정작 불안하고 힘겨운 삶을 꾸려가는 건 소수자들인데, 다수자가 그런 소수자들의 존재에 공포를 느낍니다. 다수자가 소수자를 향해 ‘나 너 때문에 무서워 죽겠어’라고 말할 때 정말 끔찍한 장면이 연출될 수 있죠.

지난 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천안함 사건에, 지방선거에, 월드컵까지 워낙 다사다난한 때이긴 하지만 그처럼 중요한 인물을 우리가 너무 조용히 맞은 게 안타깝고(!) 서운합니다. 이스라엘은 보름전 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민간구호선에 특공대를 보내 십여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에 따르면 민간구호선에 탄 활동가들이 총칼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 설명을 그대로 믿기로 합시다. 그래서요? 네, 그런 구호활동가들의 저항이 두려웠는지 특공대가 총으로 쏴 죽였답니다.

사실 이 일의 발단은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생필품이나 의약품이 부족합니다. 이스라엘의 봉쇄 때문이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필(!) 강경파인 하마스에게 표를 던져 집권하게 한 게 문제였다는 군요.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자지구를 떠난 후 그들은 우리를 향해 약 1만 발의 로켓을 쐈습니다. 서울에 1만여 개의 로켓이 날아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페레스 대통령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 중에 한 말입니다. 그래서요? 하마스의 로켓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에 쳐들어가서 1400명을 죽이고 수십만 채의 건물을 부숴버렸죠. 너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두려운지 아느냐면서요. 참으로 무서운 두려움입니다.

민간구호선에 특공대를 보내 학살을 저지른 일을 페레스는 천안함 사태와 같은 거라고 했습니다. 공격을 받았으니 정당방위 차원에서 보복한다는 뜻이겠죠. 이명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민간구호선에 총격을 가한 당신들이야말로 천안함에 어뢰를 쏜 이들과 똑같다고 비난했을지 아니면 한국 입장을 지지해주니 정말 고맙다고 했을지. 아무래도 전자일 리는 없겠지요? 다만 국제사회의 눈을 의식해서 ‘조용히’ 환대한 모양입니다.

정부는 그렇다 치고 아쉬운 것은 우리의 대응입니다. 그의 ‘조용한’ 방문을 허용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환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이스라엘이 환각에서 깨어나길 바랍니다. 당신들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약하다는 당신들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까요.

이번 주에도 ‘불편한 연애’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지난주 <위클리 수유너머> 방문자 수가 전 주 대비 50% 정도 늘었다고 합니다. ‘연애’라는 말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저희 독자들이 그런 단어 하나에 좌우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연애’에 담긴 ‘불편함’,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그리고 지난 주 이진경 선생님이 쓰신 칼럼의 내용이 편집자의 실수로 상당 부분 누락되었습니다. 이진경 선생님과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며 이번호에 다시 수정 개재했으니 열독 부탁드립니다.

– 고병권

응답 1개

  1. 매이엄마말하길

    지난 10일 오전 10시에 청계천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반대 목소리를 전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참여단체는 나눔문화, 인권연대, 다함께 등이었습니다.

    한 25명 쯤 모인 기자회견장이었는데, 기자가 한 20명가까이 왔고, 경찰이 한 100명 이상이더군요. 약 40분 동안 반대발언하고, 기자회견문 낭독하고, 구호 한 세번 외치고, 이스라엘 국기에 빨간색 손도장 찍는 작은 퍼포먼스가 행해졌는데, 역시나 경찰은 구호와 퍼포먼스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해산 명령을 내리더군요. 박대발언을 하였던 오창익(인권연대)님은 경찰과 입씨름을 좀 하시고…

    뭐 그런 아주 작은 기자회견이었는데….그게 이스라엘 현지 언론에까지 전해졌다고 하더라구. 참 효율적인 시위였달까. 꼭 반대 목소리를 내야 되는 사안이었는데, 이런 시위라도 없었다면 정말 한국사람인 것이 너무 창피했을 것 같더군요.

    =======아래 기사================

    http://www.ytn.co.kr/_ln/0104_201006111333415543

    이스라엘 언론, 한국 ‘반 페레스 시위’ 보도 입력시각 : 2010-06-11 13:33

    한국의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한국을 방문 중인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을 ‘살인자’라는 구호와 함께 맞이했다고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가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페레스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대사관을 둘러싼 시위대 약 50명이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가던 구호선단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항의했다고 전했습니다.

    또, 시위 참가자 일부는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손바닥 모양을 찍어 이스라엘 국기를 훼손하고 가자지구 봉쇄를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전했습니다.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는 페레스 대통령의 방한이 환영과 비난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습니다.

    김종욱 [jwkim@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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