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사고하다

잃어버린 낙원, 부유하는 텍스트, 샹그릴라(중국, 샹그릴라)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잃어버린 낙원, 부유하는 텍스트, 샹그릴라(중국, 샹그릴라)

1.


샹그릴라는 관광지를 떠도는 이름이다. 관광객이 있는 곳이라면 샹그릴라라는 카페, 레스토랑, 호텔을 만날 수 있다. 홍콩에 본사를 둔 샹그릴라 호텔(Shangri-La Hotels and Resorts)은 1971년 싱가포르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주요 도시에 55개의 호텔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은 화자인 루더포드가 친구인 콘웨이의 체험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0년대 초 인도의 바스쿨에서 영국의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현지의 영국 영사였던 콘웨이, 부영사 멜린슨, 미국인 사업가 버나드, 천주교 전도사 브링클로는 비행기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비행기는 안에 숨어 있던 티베트 청년에 의해 납치당해 히말라야 쿤룬산맥 서쪽 끝자락의 험준한 ‘푸른 달 계곡’에 불시착한다. 불시착으로 그 티베트 청년은 사망한다.

‘푸른 달 계곡’은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널 푸른 초원이 있고, 아름다운 호수가 반짝이는 곳이었다. 콘웨이 일행은 장노인이라는 인물의 초대를 받아 깊은 계곡 속에 위치한 사원 샹그릴라에 머문다. 여기서 그들은 원래 천주교 수도사였던 페로와 멸망한 청나라의 공주 로센을 만난다. 그런데 페로는 실제 나이가 삼백세에 가까웠으며, 18세 소녀로 보이는 로센은 아흔을 넘긴 노파였다. 콘웨이는 샹그릴라가 갈등과 탐욕이 없는 조화의 땅일 뿐만 아니라 무병장수하는 곳임을 알게 된다.

파국의 시작을 알리는 말 ‘그러던 중’, 일행의 한 명인 멜린슨은 로센과 사랑에 빠진다. 또 그는 샹그릴라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콘웨이에게 샹그릴라를 떠나자고 끈질기게 요구해 콘웨이는 일행과 함께 샹그릴라를 나온다. 예상되는 역접 ‘그러나’, 샹그릴라에서 벗어나자 로센은 본래의 90세 노파가 되어 숨지고 멜린슨도 병을 앓는다. 콘웨이는 샹그릴라가 진정한 이상향이었음을 깨닫고는 다시 돌아가고자 루더포드를 떠난다. 이후로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2.

다소 전형적인 줄거리 요약이 되었지만, <잃어버린 지평선>은 발표 당시 커다란 반향을 불러와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동양을 향한 이국적 호기심(Exoticism)을 담은 이 작품은 가히 ‘샹그릴라 신드롬’이라고 부를만한 현상을 낳았다. 1933년 소설이 발표되자 먼저 동양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1937년 텍사스의 저명한 자선가 루처 스타크(Lutcher Starker)는 텍사스주 오렌지 지역에 아예 샹그릴라를 지었으며, 같은 해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는 <잃어버린 지평선>을 영화로 제작했다. 1942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금은 캠프 데이비드(Camp David)라고 불리는 대통령의 휴양지를 샹그릴라라고 명명했다. 그 해 4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항공모함 호넷호(Hornet)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도쿄를 공격하였는데, 당시의 항공기술로 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대중들 사이에서 궁금증이 일자, 루스벨트는 샹그릴라에서 폭격기가 날아왔다고 답했다. 이후 태평양에서 활동하는 항공모함 한 척에 샹그릴라(USS Shangri-L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샹그릴라에 보다 근본적인 관심을 가졌던 인물은 루즈벨트와 전쟁을 벌이던 아돌프 히틀러일 것이다. 그는 샹그릴라를 순수 아리안 혈통의 진원지로 규정하고, 1938년 에른스트 섀퍼를 단장으로 무려 7차례나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조사단에는 하인리히 하러와 페터 아우프슈나이터가 일원으로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네팔 주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티베트로 탈출했다. 두 사람이 티베트에서의 생활과 체험을 쓴 논픽션은 훗날 영화로 만들어졌다. 바로 <티벳에서의 7년>이다.

3.

하지만 과도하게 의미로 점철된 이름, 샹그릴라를 잠시 괄호에 두고 작품을 분석한다면, 장소의 상상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을 짚어낼 수 있다. 먼저 작가 제임스 힐튼은 티베트에 와본 일이 없다. 대신 그는 티베트와 원난성 일대를 여행한 사람들의 모험담을 바탕으로 이상향을 창조했다. 그런데 작품 속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면 바로 그러한 정보제공자들과 일치한다. 소설에는 영사와 사업가, 선교사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영사인 콘웨이의 체험담을 옮기는 식으로 전개된다. 동양은 탐험가의 모험담, 선교사와 무역가, 행정가가 전해준 정보를 통해 유럽에서 그 이미지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동양의 당시상황에서 괴리된 ‘텍스트적 세계’였다.

물론 제임스 힐튼의 텍스트에도 창작의 모티브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티베트 불교에서 전승되는 신비의 도시 샹바라(Shambhala, 香巴拉)를 소설의 밑그림으로 삼았다. 하지만 제임스 힐튼의 티베트는 마치 다른 나라의 도시에 가서 본 박물관의 그림 한 점이 거리에서 만난 어떤 풍경보다도 생생히 각인되어 도시 전체가 그림 한 점으로 기억되듯이, 추출과 환원으로 일궈진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제임스 힐튼이 다녔던 케임브리지 대학이 바로 샹그릴라라고 혹평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상상으로 그려낸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4.

그러나 빈약한 실증적 토대 위에 구축된 이미지는 당대의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안겼다. 그것은 무엇보다 소설이 세계대공황과 1차 대전 이후라는, 정신적 공황을 시대 배경으로 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샹그릴라는 누강이 만든 대협곡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곳의 사람들은 고요하게 살아간다. 쉽게 다다를 수 없는 히말라야의 한 자락에 위치한 샹그릴라는 때 묻지 않은 삶의 원형질을 보존하고 있다. 제임스 힐튼은 당시의 혼돈스런 유럽 상황을 샹그릴라에 음각화시켰으며, 그만큼 샹그릴라는 밝은 장소로서 창조되었다.

하지만 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작품 속에 담긴 ‘상실’의 감각이다. 제임스 힐튼은 샹그릴라를 이상향으로 묘사했지만, 작중 인물은 그곳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진정한 이상향임을 깨닫는다. 아마도 샹그릴라를 향해 다시 떠난 콘웨이는 샹그릴라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콘웨이를 첩첩산중의 샹그릴라로 인도했던 티베트 청년은 샹그릴라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콘웨이와 샹그릴라를 이어줄 매개체는 사라졌다.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이러한 설정은 유토피아 소설, 모험 소설에서 낯이 익다. 그 소설들에서 주인공이 낙원을 잃어버리는 까닭은 진정한 낙원은 한 번 잃어버린 다음의 낙원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낙원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대자화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를 부여한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천진한 아이들을 보며 어른은 자신이 다시 한 번 아이가 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아이였을 때가 좋았음을 의식할 수 있는 어른이기도 하기를 바라는 이중의식을 품는다. 샹그릴라에서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은 샹그릴라를 향한 갈망을 갖지 않는다(따라서 독자들은 그들에게 매료되지 않고, 낙원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애를 태우며 동일시한다). 이상향을 갖는 존재는 이상향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저렇듯 어른의 분열의식을 경험하는 이상향 바깥의 존재이다. 그리고 샹그릴라 혹은 샹그릴라로 대변되는 동양은 서양에게 순수했던 유년기, 때 묻지 않은 삶의 원형질을 의미하게 된다. 바로 여행자들을 동하게 만드는 다른 사회를 향한 주제넘은 바람, 바로 그것 말이다.

– 윤여일(수유 너머 R)

응답 2개

  1. cman말하길

    국내 드라마에서 처음 접할 정도로 샹그릴라는 물론 문학에 문외한에게는 주옥 같은 글 입니다. 다음에 윈난에 가면 꼭 갈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차라리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냥 아쉬움만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샹그릴라를 가지고 있겠고 또 여정을 계속하겠지만 항상 다다른 것은 아닐테니까요… 흥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에스프레소말하길

    글을 읽으니,
    이상향 바깥의 샹그릴라를 즐거이 노닐다 오고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