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좀 조용히 연애할 수는 없을까

- sros23

좀 조용히 연애할 수는 없을까

“성성이냐?”

나의 첫 연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불분명하지만)은 장애여성이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정서적으로 많은 교감을 나누었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보통 나의 연애사에 대한 술자리 잡담에서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반면 그만큼이나 짧았던 찰나의 관계들도, 상대가 비장애인이라면 쉽게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다고 내가 장애를 가진 나의 연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숭고하고 지고지순한 사랑 따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반적으로 ‘연인사이’라고 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과 행복감을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선 앞에서만큼은 몸의 운용이 자유로웠다. 편하게 휠체어에서 내려앉을 수 있었고, 택시에 올라타는 엉거주춤하고 느려터진 내 몸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공식적인 선언으로 시작해서 세상이 준비해놓은 퍼포먼스 안으로 진입하는 그러한 연애를 하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이동하기란 너무나 어려웠고, 각자의 몸을 이 험난한 바깥세상에서 유지하는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는 것을 내가 두려워한다는 데 있었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연애에 요구되는 일반적인 ‘퍼포먼스’(영화를 보고, 시내를 거닐고, 커플 반지를 맞추거나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따위의)에 참여하는 모습이 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에로스나 멜로의 시선에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휴먼다큐의 시선으로 포착될 것이었다. 나는 내 몸이 다른 몸과 낯간지러운 멜로드라마나 야한 포르노그래피적인 시선으로 조망되기를 원했지,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관에 살던 때, 사춘기 무렵의 우리들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을 ‘성성이’라 불렀다(몸이 ‘성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갖고 있었고 각각의 장애에 따라 그 작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매우 달랐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우월감과 권력의 성취는 바로 성성이와의 연애여부에 달려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재활원 앞으로 찾아와 이름을 불러주면, 그는 순간 가장 부러운 대상이 되었다. 재활관에서 함께 생활했던 나의 한 동기는, 내가 연애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성성이냐?”

나는 몇 명의 ‘성성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녀들은 내부 세계에서의 권력과 바깥세상에서의 자유로움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외출을 할 때마다 불편함도 많았지만 그 사람과 하는 데이트는 늘 즐거웠다. 나는 “봐라, 나는 장애인이지만 이렇게 연애도 한다”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인 연애에서, 나는 매순간마다 사랑이라는 느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단지 그녀들이 나의 성적인 매력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녀들의 몸을 통해 비로소 손상과 결핍, 추함과 불균형의 세계를 탈출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외출하는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그 동정의 시선들이, 여자친구의 신체를 통해 비로소 내 삶에 대한 승인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대학에 와 만난 한 사람과 처음으로 잤을 때, 나는 비로소 내 다리를 드러낸 채 수영장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내가 그 길고 곧게 뻗은 다리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직 내 몸을 승인해주는 대타자일 뿐이었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아름답고 ‘성성한’ 몸인가 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닥치고 연애하는 법이란 없나

정확히 어떤 것을 ‘연애’라고 불러야할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과도 자유롭게 사랑을, 혹은 연애를 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항상 어떤 ‘사람’을 보기 전에 그가 가진 장애의 유무와 정도를 먼저 살폈고 그것이 나의 존재에 차지할 의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하면서 연애를 하지 못했고, 연애를 하면서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건대,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연애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삶의 과제이다. 누군가는 연애에는 수백개의 유형이 있으므로, 영혼의 교감과 따듯하고 진심어린 우정과 연대도 연애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연애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연애는 오로지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내 편’을 만드는 것. 그리고 서로의 몸을 짜릿할 정도로 좋아하는 그러한 연애였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그런 연애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승인과 상대의 몸에 대한 강한 끌림이란 내 삶에서 있기 어려울 것이며, 오로지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강인하고 독자적인 정신과 서로의 몸을 조건 없이 긍정하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관계만이 내게 허용된 연애의 범주에 속할지도 모른다.

결국 어떤 식이든, 나의 연애는 수많은 의미들이 부여되어 정치적으로 독해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의 장애에 대한 스스로의 승인문제와 결부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 다 집어치우고, 그냥 한 사람이 좋아죽겠어서 그 사람과 같이 있고 그 사람과 있는 순간이 미칠 듯이 좋아서 그 주변은 뿌옇게 사라져버리는 그러한 연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내 몸과 관련된 경험들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고 때로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해왔지만, 적어도 연애에 대해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성성이’와의 섹스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질문이라든가, ‘성성하지 않은’ 마이너리티적 연애에 부여된 억압을 질문하는 사회과학적 물음표 따위를 좀 덧붙이지 않는, ‘닥치고 연애만’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사랑에 대한 해석에 반대한다. 그 해석과 의미부여는 외부로부터, 혹은 나 자신에게서 온다. 나는 조용한 연애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수다를 떨고 질문을 던진다. 성성이인가, 아닌가, 나의 욕망의 대상일 뿐인가, 우리 관계를 세상은 휴먼다큐로 해석하는가. 아아. 제발 닥치고 그냥 있어라. 세상도, 나도.

– 원영

응답 4개

  1. 쾌지나 칭칭 나네말하길

    나의 연애는 수많은 의미들이 부여되어.

    이 글에 맘이 아팠습니다.

  2. 말테말하길

    글 잘 읽었습니다. 해석의 폭력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뭔가 답글을 쓰고 싶었는데도 머뭇거리게 되었어요. 세상도, 나도 제발 닥치고 그저 연애만 할 수 있는 순간, 언젠가 저도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나의 해석 그 간극 속 어디엔가 경계를 흩트리고 문지르고 장난치고 포옹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고싶)어요.

  3. 엘리사벳말하길

    웅.. 솔직한 글. 연애에 대한 경험과 생각이 어쩜 이리도 저랑 똑같으신지.

  4. 말하길

    포르노그라피적 시선과 휴먼다큐의 시선, 어느 쪽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장애인의 사랑, 아니, 우리 모두의 사랑은 없을까요? 사회적 약자는 항상 해석노동에 시달리지요. 하지만 해석이 공통 관계의 능력이 되기도 하지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랑하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