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좁은 공간, 너른 품

- 기픈옹달(수유너머 R)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좁은 공간, 너른 품
– <서울, 골목길 풍경> 임석재, 북하우스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다. 평생 전셋집으로 전전하던 우리에게 ‘우리’ 집이 생겼다. 그 동안 이년 혹은 삼년에 한번씩 꼭 이사를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마냥 신났지만 중학생이 되자 우리가 이사하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이사를 하는 날이면 큰 대야마다 살림살이를 가득 담아서 집 앞에 늘어놓은 모습, 그 모습을 쳐다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내 자신이 왜 그리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집안 살림이 어려워 자주 집을 옮겨다녀야 했던 부모님의 심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그 모습이 내 존재인 것 같아 슬펐을 따름이었다. 이런 나에게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작은 집이었지만 무척 기뻤다.

이 집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에 면해 있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곳에는 저녁 무렵이면 이웃집에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집이었지만 방이 셋이었고 서서 작업할 공간만 겨우 되는 입식 부엌이 있었고 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아주 좁은 통로인 마루가 있었다. 그리고 좁지만 마당도 있었다. 부엌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이 마당은 부엌의 확장이었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집이 작아 화장실 문을 집안으로 내게 되면 냄새 때문에 생활이 힘들어서 화장실 문은 대문 밖에 있었다. 그리고 방과 방 사이 작은 공간을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보름달이 뜬 날의 풍경이었다. 손바닥만한 마당을 달빛이 가득 채우고 동생과 생활하는 내 방에도 그 달빛 한 자락이 놀러왔다. 달빛이 고와서 잠 못 이루고 그 달빛 아래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행복했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좁은 골목길이라 골목길을 걷는 행인의 존재감은 무척 컸다. 특히 내 방 책상 위로 난 창문이 있었는데 골목길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무심코 들여다보면 내 눈과 마주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이며 무서워하곤 했다. 방학이 되면 더 불편함을 느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려고 대문을 열고 나서면 동네 아줌마들이 화장실 앞 난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동네 꼬마들이 화장실 앞 골목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배를 움켜잡고 집안으로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이 집에 살다가는 변비 걸리기 십상이라 투덜거렸다. 집에서 어머니에게 야단이라도 듣는 날이면 이 집이 정말 싫었다. 집과 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어 누가 무슨 일을 해서 야단을 듣는지를 훤히 알 수 있었다. 소리도 동네 마실을 다니던 곳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그곳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 책이 임석재 선생의 <서울, 골목길 풍경>(북하우스)이었다. 대학에서 건축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임석재 선생은 건축에 담긴 우리네 삶을 들려주는 글을 많이 썼다. 차분하게 우리 건축과 서양건축을 비교하면서 우리 건축의 멋과 그 속에 담긴 삶을 들려주는 <우리 옛 건축과 서양건축의 만남>, 현재 우리나라 건축을 통해 본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전하는 <건축, 우리의 자화상>을 읽고 이 분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필자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한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을 보자 몇 년 전에 읽은 건축가 승효상 선생의 <빈자의 미학>(미건사)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이 알뜰하게 나눠 쓰는 공간인 ‘골목길’은 건축가들이 건축 설계를 할때 건축적 상상력을 얻는 공간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 공간이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한다는 미명 아래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래서 임석재 선생은 우리네 골목길을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서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골목길을 직접 걸으며 지도를 그리고 사진을 찍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기록했다. 삼선 1동, 한남동, 이태원, 용산2가동, 북아현동, 청파동, 서계동, 삼청동의 골목길을 걸으며 그곳 삶을 정성껏 담아낸다. 골목길이 가진 시각적 조형미를 건축가 특유의 시선으로 들려준다. 그리고 빨래를 널고, 화초를 키우고,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골목길에서의 삶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의 흔적을 들려준다.

우리는 골목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문화재다. 그곳은 물리적으로도 뛰어난 공간이다. 나는 나를 미치게 하는 창조적 공간을 외국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골목길에는 아직도 넘쳐난다. 그런 골목길이 점점 사라져간다. 모두 대기표를 손에 들고 철거 순서를 기다린다. 새치기라도 하고 싶어 난리들이다. 나에게 타워팰리스와 골목길 한 귀퉁이의 아담한 집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예전 서울에 갔을 때 대학로에서 출발하여 낙산공원까지 산책한 적이 있었다. 낙산공원 너른 마당에서 내려다 본 서울 풍경은 도심에 내 자신이 묻혀있을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성벽을 보니 작은 성문이 있었다. 그 순간 저 성문으로 들어가면 눈앞에 넓은 산이 이어지고 탁 트인 공간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대학로를 걸을 때 상상도 하지 못한 낙산공원에서의 확 트인 시야를 또다시 기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나를 몰아내는 것 같은, 개짖는 소리와 함께 내가 맞닥뜨린 것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눈에 익숙한 표지가 보였다. 장수길, 이 책을 통해 만났던 골목길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골목길 아래로 빨래를 널어놓은 옥상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길이 이어질 것이라 여기고 들어선 공간에서 ‘길없음’이라는 반전을 맛보기도 했다. 이 좁은 골목길은 내 존재를 지우지 않았다. 아주 넓은 도로에서 나라는 존재는 있으나마나 표가 나지 않는 존재였지만 골목길은 달랐다. 내가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 임석재 선생은 이것을 두고 휴먼스케일이라 했었다. 임석재 선생의 책을 읽고 걷는 골목길은 내 존재를 느끼며 세상을 들여다 보는 여행길이 되었다. 임석재 선생은 이 골목길을 걷고 걸으며 책에 담고 마음에 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때는 골목길에서 이루어지는, 소중한 삶을 눈여겨보지 않았을까? 가난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나눠쓰던 공간, 그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왜 지금까지 외면하고 살아왔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이 책을 읽은 직후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복도식으로 된 아파트였다. 계단식 아파트에 비해 복도식 아파트는 불편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녀서 여름에도 문을 마음대로 열어둘 수 없었고 복도에 쌓여있는 물건들이 많아 큰 짐을 가지고 걸어다니기 불편했다. 그리고 휴일날 늦게까지 잠을 자려고 하면 어김없이 복도에는 꼬마들이 자전거 타는 소리, 축구하는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불편한 공간이 이 책을 읽은 직후에 새롭게 다가왔다.

‘아, 이곳이 골목길이었구나.’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순간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무거운 짐을 들고 골목을 걸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지금은 그런 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여유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읽어낸 것은 지난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어우러지는 삶에 대한 존중이었다.

– 풍경지기 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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