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식물아, 나는 어쩌란 말이냐!

- 김융희

식물아, 나는 어쩌란 말이냐!

요즘 참 바쁩니다. 뚜렷하게 잡히는 무엇도 없이 허우적 거리게 바쁩니다.
오늘도 사당역 부근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다녀 옵니다. 오래전에 정해진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부랴 다녀옵니다. 비가 내리겠다는 예보는 다행히
빗나가 날씨는 햇빛이 납니다만, 이삼 일후면 장마가 시작되겠다는 예보가
내 마음을 더욱 바쁘게 합니다. 손 봐줄 야채들 생각으로 더욱 조급해 집니다.

조금씩 가꾼 여러 가지 야채들, 비틀거리고 넘어진 놈들을 붙들어 매주고,
잡초를 뽑아 주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랫 동안 가뭄으로 목타는 그들에게
물을 주면서, 틈틈이 돌봐 주고는 있지만, 오늘처럼 외출을 하거나, 다른 일로
내가 곁에 없으면 그들은 불안한가 봅니다. 미쳐 거둘지 못한 그들의 여러
애로들이 안타갑기도 하고 때로는 많이 귀찮기도 합니다.

지금 서둘러 집으로 달려 옴은 그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원고,
이미 늦었지만 오늘까지는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고 보니 구름이
덤벙거리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습니다. 장포로 내려 갔습니다.

항상 작물과 함께 그들 곁에 있어주어야만 하는 농부. 그래 농사꾼은 휴가가
없다고 했습니다. 장포를 들러 보니 그냥 그들을 외면하고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보았던 그들은 내린 비로 생기를 되찿아 보란듯 자태를 뽑낸가 했더니
밀식된 상추는 잎만 무성하지 줄기는 썩어 있고, 웃자란 쑥갓, 아욱, 열무, 얼갈이…
수확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냥 두면 모두 버려야겠네요! 그들의 S O S….

시장에 내어 팔려는 상품이라면 수확은 농사꾼에게 신나는 일이겠지만,
애시 당초 자급용 나만의 먹거리인데다, 어설픈 솜씨에 시기도 넘겨 누구에게
내 놓기도 꼴마저 주저로워 한심합니다. 듬성 듬성, 거칠게 그들을 뽑습니다.
거둔 야채들이 자꾸만 쌓입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이 일을 계속했습니다.

겨우 손발을 씻고 저녁을 들고 나니 지친 몸이 그냥 눕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쌓아두면 곧 떠서 누렇게 변질될 터.
오늘은 예보가 빗나갔지만, 하늘을 보니 저녁에라도 비는 내릴 것 같은데…
처리는 해야겠고. 상추야! 쑥갓아!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속상해서 그냥 쓰다 보니, 좀 심했지요? 솔직히 좀 속상합니다. 가까운 이들과
나누어 먹을려고 공들인 솜씨였는데, 그들도 내 속내를 아는 듯, 아주 탐스럽게
잘 자라 주었는데,(저의 서툰 농삿 일, 그래서 볼품없이 짜잔한 내 작물들,
그러나 엄마는 자기 새끼가 제일 이쁘듯, 서툰이의 농심도 엄마 마음입니다)

대충 보낼 곳 명단을 보면서 그동안 열심히 모아둔 포장 박스를 챙겨 보니
턱없이 부족 하네요. 좀 피곤합니다만, 그래도 내 가꾼 채소를 보내줄 이들이
나에게 있음이 다행이고 흐뭇합니다. 또한 보내주고 싶은 곳이 많이 많이 더
있지만 다 보내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제발 좀 오셔서 손수 챙겨 가면 참 좋으련만, 그것도 아쉬움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절대 택배는 않을 것이니 당장 가져다 먹으라 으름장을 놓아
보지만, 결국 오늘도 그들 것을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할 일들 많은, 바쁜 삶.

속상할 땐, 가까이 지낸 지인의 말이 상기되기도 합니다. “뭐 자기는 햇볕 아래
땀 흘리며 그런 짓 않는데요. 나의 농사일을 비아냥 거린듯, 재주 자랑인지
글 자랑인지… 그동안 원고를 쓰면 원고료가 얼만데!“(오래 전, 안전에서 내가
직접 당했던 일입니다. 그는 예술 이론으로 명문 대학 교수요 사계의 유명인)

또 작물을 주면서 당혹스런 경험도 가끔 있습니다. 싱싱하고 탐스러운 상품이
진열대에 지천인데, 몇 푼도 안된 이런 것을! 마치 자기를 얕잡아 하찮게 여긴
것처럼 오해하는 느낌도 가끔은 경험합니다.

칠칠치 못해 벌레가 함께 포장되고, 미리 포장해둔 것이 변질된 채 전해진
경우 상대방의 불쾌감. 어쩔 때는 알면서도 모자란 손놀림으로, 쓰레기처럼
무성의하게 전해진 경우 등, 등..
일일이 생각하면 지금도 등짝이 후끈거려지는 실수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곧 스쳐 지나가고 맙니다. 손수 내가 가꾼 작물을
함께 나누어 먹고 싶은 마음을 전할 내 이웃이 있음 흐뭇할 뿐입니다.
그 어떤 비아냥거림도, 또 어떤 오해도, 나에겐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볼 품은 없어도 값이 하찮아도, 정성껏 농약도 화학 비료도 아닌
자연 그데로의 솜씨로 정직한 작물이 전해질 수 있다면…
간절한 마음 뿐입니다.

야채를 손질하다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원고 생각이 번쩍 듭니다.
원래는 연주회를 다녀온 도시 이야기를 쓸려고 했는데,
겨를도 없이 야채일로 허둥데다 보니 벌써 새벽이네요. 또 바쁩니다.

하루저녁 야채와 겨룬 허튼 소리로 시시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경망의 너그러운 이해 바람니다.

– 김융희

응답 5개

  1. 하얀 뱀말하길

    여~ 강 선생님 늘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넽을 통해서나마 선생님이 건강히 계신다는것 늘 고마울뿐입니다 연락 드리고 조만간 한번 만나 좋아하시는 막걸리 한잔 하십시다 그럼 더욱더 건강 하십시요.

  2. 고추장말하길

    선생님, 얼갈이 잘 도착했습니다. 전화 주신 날, 오후에 주방에 배달되었더군요. 고맙습니다. 손하나 보태지 않고, 입만 쩍쩍 벌리는 아기새마냥… 죄송합니다.

  3. bada말하길

    여강 선배님, 이 글 읽으면서 작품은 머리와 펜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과 땀으로 쓰는 선배님의 작품, 원고료에 비할 바가 아닐 터,
    식물은 헤아려주지 못하는 선배님의 심정을 독자들은 모두 압니다.
    흙냄새, 땀냄새, 사람 냄새 풋풋한 들녘의 편지 덕분에 상쾌한 하루를 엽니다.

  4. lizom말하길

    구름이 덤벙거린다는 표현은 참, 저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선생님만의 멋진 표현입니다. 하지만 농사 짓는 사람의 마음은 저랑 같군요. 씨부리고 자라는 거 지켜보는 건 쉬운데, 정작 어려운 건 제때 잘 거뒤서 잘 나눠주는 일입니다. 손질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럴 때마다 마트에 깔끔하게 손질된 야채값이 터무니없이 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거 다듬을려면 손 꽤 갔을 텐데…..

  5. 상추쌈말하길

    여강쌤이 농작물을 다루시는 손길이 다름 아닌 하나의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꼭 한번 여강쌤의 마음의 손길이 담긴 농작물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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