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알바 9단 S양의 인생역전!

- sros23

알고나 드세요. 제 인생의 25분이에요.

박민규의 소설에 이런 장면이 있다. 시급 2500원을 받는 편의점 알바생이 동네 형에게 음료수를 사주며 속으로 이런 말을 한다. “알고나 드세요, 제 인생의 25분이에요”. 맑스를 읽다가 머리도 식힐 겸 좋아하는 소설을 오랜만에 펼쳤는데 이런; 맑스가 여기에도 있다. 이 문장 아래에 분홍색 색연필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 “알고나 드세요, 제 인생의 25분이에요.” 이 소설을 언제 처음 읽었던가. 분홍색을 좋아할 감수성이면 꽤 오래 전 일 듯 한데.. 기억났다. 대학 1학년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스무 살의 내가 왜 이 문장에 밑줄까지 그었을까? 생각해보니 뭐 이상한 일도 아니다. 굳이 자본론을 읽지 않아도 고등학교 졸업 하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줄곧 해왔던 내게 ‘시간 = 돈’ 이라는 공식은 이미 몸으로 체득된 상태였다. 밑줄은 공감의 표시였겠지.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돈으로 치환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온 몸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돈으로 치환된 우리의 시간을 소비한다.

모두 똑같은 표정의 시간들

물론 여기에서의 시간은 근대화된 ‘노동시간’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노동시간은 질적으로 차이를 갖지 않는다. 자본가에게 시간은 노동자에게 얼마만큼의 이윤을 뽑아내는가와 연관되며, 노동자 자신에게 역시 노동시간은 돈으로 환원 될 수 있는 시간만을 의미한다. 이것은 블루칼라 계급의 노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tv부속품을 생산하건, 책으로 둘러싸인 출판사 사무실에서 아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책 한권을 만들건 자본주의적 측면에서 모든 노동시간은 이윤을 창출하는 시간으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시간은 모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시간당 얼마”라는 숫자로만 이루어진 똑같은 표정. 아, 양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긴 하다. 누군가의 한 시간은 수십 수 백 만원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누군가의 한 시간은 고작 4110원(현재 최저임금)으로 보상될 뿐이다. 시간당 4110원을 받는 알바생의 비애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날, 이를테면 뜨겁고 얼큰한 것이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 세포까지 온 몸으로 땡기는 그런 날. 오늘 일한 한 시간 보다 비싼 짬뽕 사먹기가 아까워 짬뽕라면을 끓여먹는 심정을 혹시 아시는지??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이미 자본가에게 ‘판매’되었으므로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자유롭지 못한 시간이며, 노동자의 개인적 삶은 노동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 노동과 여가의 구분된 것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이 나타난 이분법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노동 후의 시간도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노동시간이 상품을 생산하는 시간이었다면 여가시간은 상품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자본화된 취향과 여가를 강요당한다.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영화사의 기획영화나 아기 기저귀부터 필통, 종이컵, 양말 등등 프린트 가능한 모든 상품 위에서 웃고 있는 미키마우스, 출판사의 사재기로 오른 베스트셀러, 곳곳에 포진된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감동 없는 아이돌의 음악까지 우리의 취향은 자본논리에 의해 거세되며, 선택의 폭 또한 제한된다. 한번은 친구를 기다리다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를 제외하곤 도저히 앉아 있을 곳이 없어 ‘던킨 도넛’에 들어가 못다 읽은 자본론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본 친구는 내게 “자본의 한복판에서 자본론을 읽다니 (언밸런스의 정도가) ‘GQ 코리아’를 읽는 80세 백발노인 같다!!”며 나를 놀렸다. 끝없이 확장하는 자본의 욕망은 이런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발생시킨다. 이렇게 노동시간부터 노동 후의 여가시간 까지, 자본 사회 내에서의 모든 노동과 시간은 고유한 차이와 표정을 갖지 못하고 물신화 된다.

S양의 인생역전

우울한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대졸자 백수 S양을 상상해보자. 부모님께 용돈 받으며 애써 당당하게 살던 S양. ‘수유+너머’라는 이름만 봐서는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의 백수 프로그램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면서 독립과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작정 집을 나와 버린다. 모아둔 돈이 다 떨어진 S양. 혼자 일하면서 책도 볼 수 있는, 장사 안 되는 편의점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계산을 하며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집 근처 편의점의 구인공고를 탐닉하다 한 편의점의 구인공고를 발견한다. 시급 란의 “협의 후 결정” 문구와 몇 달 동안 구인공고가 주기적으로 올라왔던 점이 거슬리지만, 뭐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귀여울까말까 한 외모의 S양은 ‘용모단정’ 조건이 없는 것이 어딘가 하며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이렇게 S양은 G편의점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5시간동안 시간당 3700원을 받고(법적 최저임금은 4110원이다)일을 하게 되었다. S양이 편의점에서 얻는 것 하나는 글쎄 좋아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읽고 있는< 자본론>을 몸으로 복습한다는 것이다.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라고는 하나 S양은 20분 일찍 출근해서 20분 늦게 퇴근한다. 앞 뒤 아르바이트생과 인수인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S양은 < 자본론>에서 읽었던 자본가의 ‘분(分)뜯어먹기’를 몸으로 복습한다. 다음 타임 근무인 고딩 알바생과 교대를 하며 아동착취를 복습하고(이들은 애초에 최저임금보다 적었던 시급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날짜 지난 삼각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 자본론>속 노동자의 빈곤한 영양 상태를 복습한다. 편의점 앞 김밥 집에서 1500원짜리 김밥이라도 하나 사 먹고 싶지만, 인생의 25분을 그렇게 쓰기가 왠지 S양에겐 아깝다. S양이 아무리 선천적 낙천주의자라지만, 이거야 원 < 자본론>이 나온 후로 10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현실은 그대로라니! S양의 마음은 참 씁쓸하기만 하다.

알바 9단이 전하는 tip 하나: 시급 란의 ‘협의 후 결정’ 표시를 보고 정규직의 연봉협상 같은 것을 떠올리면 안 된다. ‘협의 후 결정’이라는 말은 최저 임금보다 적게 준다는 말이라 생각하면 된다. 자본가들이 대놓고 최저임금법을 어길 수는 없으므로 생각해낸 잔머리에 불과하다.

알바 9단이 전하는 tip 둘: 구인공고가 자주 올라온다는 것은 알바생이 자주 바뀐다는 것! 고로 일하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일이 힘들거나 사장이 특수한 정신체계를 가졌거나(psycho). 대부분 후자의 경우가 많다.

알바 9단이 전하는 tip 셋: ‘용모단정’은 결코 단정한 외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정한 외모만 믿고 지원했다간 자본가와 본인 모두 서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은 평균 이상의 키와 외모, 평균 이하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만 지원하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편의점에서 < 자본론>속 자본의 논리를 절감하던 S양은 우연히 여성공동체 ‘W’의 목공 작업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제 S양은 목공작업장에서 시간당 5,040원을 받고 9시에서 3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5시간동안 근무를 한다. 출근은 편의점에서처럼 정시간 보다 20분 빨리 하는데, 이는 공동체 구성원 다 같이 공동으로 쓰는 공간을 함께 청소하기 위해서이다. S양에게 이것은 공동체구성원과의 약속으로 이해되지 자본가의 시간 갉아먹기 수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목공 작업장에서 S양이 하는 일은 나무를 가공하여 가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S양은 직업에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한다. S양은 나무를 만지고 향을 맡으며, 시간의 흔적인 나뭇결을 눈으로 즐기며 일하는 것이 아주 좋다.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데에서 노동과 생산의 기쁨을, 머릿속으로 상상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낼 때는 더없는 창작의 기쁨을 누린다. 매달 공부가 절실한 여성 두 명을 선정해 책상을 만들어 선물하는 ‘여자들의 책상 갖기 운동’에선 나눔의 즐거움을 느낀다. S양에게 노동시간은 더 이상 죽은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매순간 다른 표정의 시간 갖기

눈치 챘겠지만 대졸자 백수 S양은 바로 나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와 여성공동체 W의 목공작업장에서 일하는 지금의 나. 둘 다 시간당 페이를 받으며 임노동을 하는 모습이지만 알바생으로서의 삶에 비해 지금의 삶이 확실히 자본 논리에서 그래도 반 발짝쯤은 벗어난 느낌이다.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내에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화폐로 환산될 뿐인 무표정한 내 시간에 표정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지구에 60억 인구가 있다면 60억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왕 태어난 거 4110원짜리 시간이 아니라 자본화되지 않은 매 순간의 욕망, 성취감, 우정, 창조, 성찰, 교감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간지나지 않느냐고!

– 서다혜

응답 8개

  1. 권영은말하길

    귀여울까말까 다혜는 이렇게, 속으론 훨씬 그 결이 깊어지고 있었구나!

  2. vega말하길

    안녕하세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하지만 만일 다혜님 같은 분이 아니라 유통업에 관심이 있던 어떤 학생이 최말단의 점포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일을 직접 체험해보고싶어서 편의점 알바에 지원했더라면, 그 학생은 다혜님이 목공소에서 일하면서 느꼈던것과 비슷한 애착과 뿌듯함을 느꼈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편의점 알바일을 하다가 우연히 목공소일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아직 다혜님이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동안에 목공소일을 해보고싶은 욕망이나 재능을 발견하셨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요. 편의점일을 경험해본 다음에야 목공소일이 다혜님에게는 표정을 불어넣게 해주는 일이란걸 알게 되셨다면, 편의점에서의 경험도 헛되지많은 않은 일이었다고 해석할수도 있을것 같고요. ^^;

  3. 지나다말하길

    이 글을 읽고나니 과연 자본의 논리에서 빗겨간 덕분에 시간의 표정을 찾게 되었는 것인지 의문이 가네요.
    W에서 3700원보다 더 낮은 시급을 주었다면?
    결국은 더 높은 시급이 있었기에 더 높은 만족도를 가지는 일을 할 수 있었던거 아닌가 싶습니다.

    • 서다혜말하길

      W의 시급이 더 많아서 더 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무표정한 시간’이라 칭했던 것은 오직 돈을 버는 것 외엔 다른 목적이 없이 일을 하는 시간입니다. 만약 편의점에서 5040원을 받고, W에서 3700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제가 목공일을 하면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낀다면 W에서의 노동시간은 저에게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위에도 썼듯이 한 시간에 수 만원을 벌던 최저임금보다 못한 시급을 받던 오직 돈과 바꿔야하는 시간이라면 둘다 ‘죽은 시간’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겠지요.

  4. 탱탱볼말하길

    글 재밌어요. ^^ 조금더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자본의 논리에서 반발자국 비켜간, ‘시간에 표정을 불어넣는’ 일터의 장을 더 많이 열어갈 수도 있겠지요?

  5. 말하길

    재밌고, 유익하고, 교훈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6. 박초록말하길

    ‘무표정한 내 시간에 표정불어넣기’
    동감이예요!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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