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월드컵과 전자책

- ihunnyi

월드컵과 전자책, 요즘 내 관심을 끌고 있는 두 가지 주제다. 둘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닮아 있다. 먼저 월드컵은 공중파(public wave)의 영역이고 전자책은 출판(publication)의 영역으로, 둘 다 퍼블릭(public) 즉 공공성과 관련되어 있다. 또 하나, 둘은 모두 시장에 종속되어 있는데, 똑같이 시장에 종속되어 있긴 해도 그 양상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월드컵은 시장의 맨 앞에서 설쳐대는 방식으로, 전자책은 시장의 맨 뒤에서 쭈뼛쭈뼛 눈치보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시장의 노예임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언제나 사익(private benefit)과 공익(public benefit)이 충돌하게 마련이다. 돈이 된다면 기업들은 언제라도 공익을 밀어내고 사익으로 ‘싹쓸이’를 하고 싶어한다. 이번 월드컵과 관련해 sbs는 이런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거리응원전 취재 통제와 ‘북한 해적방송’ 해프닝은 공중파 기업이 사익에 눈이 멀어 연출한 코미디다. 독점중계권을 따내느라 1천억원이 넘는 거금을 배팅한 sbs는 투자액을 건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대중의 자발적 흐름으로 만들어진 역동적 거리 응원은 이제 기업들 간의 한낱 이권 싸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리 응원 취재를 두고 벌인 sbs쪽과 kbs 취재진 사이의 실랑이가 웃긴다. kbs 기자가 “sbs가 산 땅도 아닌데 촬영을 막을 권리가 없다”고 항의하자, “sbs만 중계권이 있어서 다른 방송국은 사진촬영도 (그 어떤 것도) 일체 안 된다”고 막아선 것이다. 도발은 sbs가 했지만 둘 다 촌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여기는 내 나와바리”라는 막가파식 주장에 기껏 묻는다는 게 “이 땅 sbs가 샀냐?”다. 샀으면 어쩔려구?

촌스러움의 대난투. 극단적인 사익추구는 극단적인 쫌스러움, 촌스러움으로 귀결된다.

sbs의 삼류 나와바리 의식은 강남을 벗어나 급기야 북한으로까지 향한다. 이것도 나름 일관성이겠다. 자본에게 시장은 늘 좁은 법이니까. ‘한반도 전역의 방영권’을 통째로 산 sbs는 북한의 월드컵 중계를 ‘해적방송’이라며 몰아세웠다. 자본은 동색(同色), 급기야 미국 국무부까지 나선다. 미 국무부 차관보는 sbs의 ‘북한 해적방송’ 보도를 근거로, 북한을 ‘범죄국가’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현대판 버전의 성동격서(聲東擊西)? 그러나 북한이 월드컵 경기를 녹화중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아태평양방송연합’(ABU)이 지역내 극빈국 여섯 나라를 위해 FIFA와 협의해 영상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눈이 멀면 정말 보이는 게 없어진다. 촌스러운 것은 걍,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이쯤해서 거리 응원일랑 접자. 차라리 집이나 동네 호프집에서 이웃들과 함께 월드컵을 보자. 그것도 돈벌이에 눈먼 저들을 비웃어주는 좋은 방법이 되겠다.

월드컵 함성에 가려 잘 들리지는 않으나 또 한편의 아우성이 있으니, 바로 전자책이다. 전자책은 지금 출판업계의 핫이슈다. 그러나 이 아우성은 몇몇 대형 유통업체 저들끼리 내는 아우성이다. 돈이 좀 된다 싶으니 너도나도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 아우성 속에 정작 출판사들은 조용한데,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다. 아니, 대책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행여 밥그릇 잃어버릴까 섣부른 액션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이패드로 대표되는 IT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출판사들은 이 새로운 흐름 속에 몸을 던져 대중과 하나로 섞여야 하는데도 두려움에 떨면서 망설이고 있다. 망설이는 것만이라면 차라리 괜찮다. 심각한 것은 이 도도한 흐름을 되돌려 놓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종이책과 똑같은 로직으로 콘텐트를 생산하고, 값을 매기고, 유통시키고, 저작권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용돌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는 이런 식의 태도로는 밥그릇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다. 사유의 매체인 출판은 존재 자체가 전위적일 수밖에 없다. 맨 앞에 서서 시대를 끌고 가야 할 출판이 맨 뒤에 처져서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휩쓸려 사라져가는 것뿐.

이 기계 속에 '미래'가 있을까? 차라리 미래는 지식과 대중의 '접속'에 있다.

sbs도 그렇고 출판계도 그렇고, 그들의 액션의 밑바탕에는 사적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깔려 있다. 사적 소유권은 배타성과 독점성을 특징으로 한다. 배타성과 독점성은 내버려두면 탐욕으로 흐른다. 방송이든 출판이든 사회적 인프라다. 개별 기업이 소유권과 경영권을 갖는다 해도 공공적 소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공중파란 말이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공중파는 “공중(sky)에 반사시켜 보내는 전파”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공공의 목적으로 쓰이는 전파”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 변형된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미디어 분야에서 사익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 우리의 삶은 피폐해진다. 모든 것을 시장에 넘겨주고, 모든 것을 시장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시장주의자들은 다시 원점에서 시장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장은 결국 모든 사람이 참여해서 만든 것, 따라서 공공의 공간이며 공공의 소유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시대의 흐름과 요구다. 지금의 디지털 환경은 사회 전반에 공유와 참여의 큰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흐름은 모든 미디어의 재미디어화(re-mediation)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미디어들은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활동방식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이유도, 의미도, 가능성도 없다. 조건은 주어졌고, 나머지는 어떻게 하느냐다. 미디어의 변화를 뜻하는 리-미디에이션(re-mediation)은 배치가 바뀜에 따라 치료를 뜻하는 레미디-에이션(remedi-ation)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사적 소유로 병든 우리의 마인드와 감각이 건강성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유재건(그린비 출판사)

응답 4개

  1. 들사람말하길

    여러가지로 늘 배우게 되네요. 잘 읽었슴다.^^

  2. sros23말하길

    통찰력 넘치는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3. 말하길

    와, ‘리-메디에이션’을 ‘리메디-에이선’으로…정말 깜짝 놀랄 탁견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유화할 수 없는 공주파와 공통 지성을 사유화하고 독접하려 할 때 일어나는 우스꽝스러움에 혀를 내 두를 지경입니다. 좋은 정보, 천둥같은 깨우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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