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매이야 놀자

- 매이아빠


어린이집에서 연장 운영 참가 신청서를 보내왔다. 이번에 ‘서울형 어린이집’으로 인가받으면서 서울시의 ‘연장 운행’ 지침을 따라야 하는데, 3명 이상 신청하면 밤 10시까지 아이를 봐 준다는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매달 12만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예전 같으면 만세를 부르며 신청했을 것이다. 매이가 어린이집에 잘 적응한다는 이유로 가장 늦게(저녁 7시 30분) 찾아오고 토요일에도 오후 3시까지 홀로 있는 매이를 데려오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는 단비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번갈아 가며 저녁에 아이를 보는 게 뭐 그리 힘드냐고 하겠지만, 아내나 나나 저녁에 스케줄이 있을 때가 많고 또 각자 원고마감이 임박하면 혼자 매이를 보는 그 사흘 저녁의 시간도 아쉽기 그지없다. 내년에 보낼 어린이집을 알아볼 때도 일차적인 기준은 몇 시까지 맡길 수 있느냐, 토요일에도 운영을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둘 다 정규직도 아니면서 바쁜 척은 다 한다고,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자기네 공부하고 글 쓰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기적인 부모라고 욕할 수도 있지만 원래 비정규직이 더 바쁘기 마련이고 위대한 이기주의야말로 상생의 지름길이라고 믿기에 그래 왔다.

그런데 막상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연장운영 소식을 접하자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매이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선생님이 좋고 친구들이 좋기로서니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시설’에서 ‘단체생활’을 해야 하다니 무척 피곤한 노릇일 것이다. 혼자 멍 때리며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엄마 아빠 품에서 놀거나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만화도 실컷 보고 싶은데, 어린이집에서 오자마자 씻고 자야 하다니 내가 매이라도 싫을 것 같았다.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야근이 불가피한 정규직도 아니고 평소 시간만 잘만 활용하면 죽을 만큼 바쁠 일도 없는 사람들이 괜히 애만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 30분 연장돌봄에 12만원이라는 추가비용도 종일돌봄 28만원에 비하면 싼편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매이를 돌보는 게 예전만큼 힘들지 않다. 집에 있으면 혼자 TV 보는 시간이 많고 때때로 책 읽어주거나 한두 번 장난 쳐주면 된다. 그리고 일주일에 사흘 정도 일찍 집에 퍼질러 누워 뒹굴 거리는 건 내 건강에도 좋다. 또 연구실에 데려오면 유나와 같이 놀리고 나는 책 읽으면 된다. 머릿속에서 5차 함수를 계산한 끝에 “됐다 그래. 그건 너무한 거 같다. 그냥 지금처럼 우리가 보자”고 결정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특히 2주 전부터 유나가 저녁에 연구실에 오는 날과 내가 매이를 보는 날이 같아서 같이 놀게 했더니 기대 이상으로, 횡재한 것처럼, 둘만의 시간을 갖고 논다. 오래 동안. 오히려 집에 안 갈려고 해서 문제다. 그동안 나는 책을 보든지 글을 쓰든지 하면 된다. 전에는 둘 다 어려서 잠깐은 잘 노는데 얼마 안 있어 꼭 싸웠다. 노는 방법도 잘 모르고, 그래서 물건 가지고 놀다가 서로 자기 거라면서 다퉜다. 어린 아이들이 물건 가지고 다투는 것에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소유욕 때문인 줄 알았다. 소유욕은 선천적인 것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몸에 밴 소유관념이 부지불식간에 학습된 것인가? 실은 소유욕 때문이 아니라 ‘닮은꼴의 욕망’ 때문이었다.

라캉이 ‘거울 국면’이라고 불렀던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거울상에 해당하는 다른 아이가 (자기가 때려서) 울면 자기도 따라 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거울상인 다른 아이가 어떤 물건(정말 사소하다. 인형도 아니다. 숟가락이나 종이 쪼가리, 혹은 어른들의 일상 용품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 아이의 거울상인 자신도 그걸 가져야 하는 거다. 자신의 거울상과 일치하려고 우물로 뛰어든 나르키소스처럼 아이들은 거울상과 일치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자신의 거울상을 깨버리고 마는 것이다. 소유의 욕망 이전에 닮은꼴의 욕망, 동일시의 욕망, 상호모방의 욕망이 먼저 있다.

유나나 매이는 이제 거울 단계를 지났다. 닮음의 욕망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의 학습이 끝났다는 뜻이고, 그 욕망이 중심적인 욕망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상징적 욕망을 체득하면서 매이는 규칙을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닮음의 욕망은 매이를 “따라쟁이”로 만들어서 유나가 하는 행동, 유나가 하는 말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사용되고, 물건은 단지 닮은꼴의 요소가 아니라 연극적 상상력 속에서 기상천외한 소품으로 활용되었다. 공부방 소파는 언덕이 되고 베개는 신데렐라의 마차가 되고 연구실 복도는 광활한 들판이 되고 상자는 신비한 동굴이 되었다. 유나와 매이는 2층과 4층을 오르락 내리며 세미나 간식을 약탈하는 해적이 되었다가 불 꺼진 방의 은둔자가 되었다가 어른들은 모르는 암호를 주고받으며 모략을 꾸미는 갱단이 되었다.

가끔씩 연구실에서 자취를 감춰서 어디 갔나 하면 연구실 옆에 있는 작은 놀이터에서 놀다가 들어오곤 했다. 해도 있고 아이들도 많으면 괜찮은데, 달이 뜨고 아이들도 적어지면 둘만 놀이터에 보내기가 걱정되어서 나와 유나 엄마가 번갈아 가며 놀이터에 따라 간다. 지난 월요일에는 내가 아이들의 초병이 되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도 타고 헬스 기구도 타며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고 나는 가로등불이 비치는 계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놀이터에 조용히 내려앉은 달빛, 애들마냥 왔다 갔다 하는 초여름의 밤바람, 송사리처럼 뛰노는 유나와 매이의 움직임, 구석에 뭉쳐 있는 청소년들의 수근거림, 이 모든 게 소극장의 무대 같았다. 나는 잠시 책을 덥고 객석의 관객이 되어 턱을 괴고 초여름 밤의 야외극장을 관람했다.

유나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의 출현으로 무대는 발단을 넘어 전개를 지나 삽시간에 위기로 치달았다. 장난기 가득한 남자 아이 둘이 유나와 매이의 탐험대를 저지했다. 그 또래 남자아이들 특유의 전쟁놀이가 개시되었다. 무기는 “빵꾸”였다. 남자 아이들은 밑도 끝도 없이 여자아이들을 향해 “저애 보래요. 빵꾸래요. 빵꾸래요. 에잇! 빵구야!” 실로 기습적인 ‘빵꾸 공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유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매이를 데리고 슬슬 피한다. 하지만 여세를 몰아 남자아이들은 가공할 무기를 발사했다. “너는 똥이다! 야잇, 똥아!”

그 순간, 매이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매이, 빵꾸 아니야. 매이야.” 유나 옆에 붙어있던 매이는 슬슬 피하면서도 남자아이들을 향해 필사의 반격을 날렸다. “매이, 똥 아니야. 매이야.” 자기 방어에 성공한 매이는 치고 빠지는 남자아이들을 향해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주먹을 높이 쳐 들고 뽈뽈뽈 달려가더니 때리지는 못하고 입술을 앙 다문 채 눈을 치켜뜨고 집에서 아빠한테 했던 자세와 표정으로 “혼난다. 매이, 빵꾸 아니라 그랬지! 매이야!” 고함을 지르고는 뽀로로 나한테 온다.

더 이상 나는 한가한 관객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매이, 빵꾸 아니지. 오빠들이 매이한테 빵꾸라고 놀렸어?” 매이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 의기양양해져서 또한번 남자아이들한테 달려가 주먹을 높이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황급히 아군진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자 남자아이 하나가 과감히 우리 진영 깊숙이 들어와 역시 주먹을 높이 들고 매이를 때리는 시늉을 한다. “아, 안 돼! 동생이잖아. 때리면 안 돼” 내가 방어했다.

남자아이도 때릴 의사는 없어 보였다. 그냥 장난치고 싶은 거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들고 있던 손을 매이 머리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동안 심장이 콩알만해졌던 매이는 이 새털같은 충격에도 치명상을 입은 듯 “아앙, 앙, 엉, 흑, 흑”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매이를 꼭 껴안고 괜찮다고, 때린 게 아니라 오빠가 장난 친 거라고 달랬지만 매이의 울음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매이야, 그럼, 매이도 오빠한테 가서 빵꾸 똥꾸라고 놀려. 알았지?” 나는 매이의 닭똥같은 눈물을 닦아주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매이는 이미 상황 종료된 상태였다. 매이는 유나 언니 손을 이끌고 미끄럼틀 안으로 동굴탐사 하러 간다.

나는 다시 관객이 되어 매이와 유나의 동굴탐사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한참 지나서 흥미가 없어졌는지 유나가 나한테 와서 뭐하냐며 내 책을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내 책 좀 줘 보란다. “뭐하려고?” 하니까 가지고 놀 거란다. 뒤따라온 매이도 내 책을 달란다. 유나가 내 책을 가져갔다. 그러자 매이가 “매이도, 매이도.” 하면서 떼를 쓰려고 한다. 다급해진 나는 유나한테서 책을 뺏어서 “이 책은 그림도 없고 엄청 재미없는데 다른 거 가지고 놀면 안 될까?” 하며 궁색한 핑계를 댔다. 그랬더니 유나는 “그래, 또 달라고 하면 매이도 달라고 하고 그러면 또 싸우게 돼. 됐어요~안 가지고 놀래요” 한다. 헐~이 자식들 정말 많이 컸구나!

– 매이 아빠

응답 4개

  1. 풍경지기말하길

    유나와 매이가 정말 많이 자랐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방금 놀이터에서 놀다 온 기분입니다.^^

    소유욕이 아닌, 동일시의 욕망… 5분마다 한번씩 싸우는 꼬마들을 이제는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정말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2. 안티고네말하길

    공주님이었다가, 해적이 되었다가, 놀이터의 아이가 되었다가, 송사리가 되는 멋진 유나와 매이!

  3. 나무말하길

    보고싶어라~~~~~ㅜ.ㅜ

  4. 탱탱볼말하길

    헐…. 완전 귀엽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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